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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 대웅전 뜨락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
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바
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하고 있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그것이다. <그냥 축제도 아니
고 무려 대축제..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신통치 않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모르는 실정이다. 주말에는 답사꾼, 사진꾼, 산꾼 등이 좀 몰리긴 하지만 평일은 피
서철임에도 한산한 편이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해 보인다.

7월 한복판에 봉원사 연꽃 축제 소식을 접하고 연꽃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흔쾌히 축제를
기다렸다. 그 축제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지만 여름이 왔으니 친(親)여름파
인 연꽃의 향연을 1번은 꼭 봐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축제일이 다가오자 후배 여인네와 함께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서대문역
(5호선)에서 봉원사 턱 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8분 정도를 달려 봉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
, 꼬리를 무는 차량들의 정체와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
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는 곳은 봉원사 주차장으로 그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여기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석종형(石鐘形)부터 8
각원당형(八角圓堂形)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
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상관은 없다.
마을은 절 바로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거의 붙어있으며 나무도 제법 많아 마치
벽지 산골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이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 일대를 봉
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  봉원사 종점에서 봉원사로 인도하는 길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애타게 눈길
을 보낸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
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
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을 기리는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
나 절에 시주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남긴다는 뜻의 유애비(遺哀碑)를 칭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
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
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
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
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신세 한탄
을 자주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지극히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 죽음
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자리해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춧돌로 비각은 오래 전에(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함) 녹아 없어졌다.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도 구석에 있어 진짜 지나치기가 쉽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
다보니 풍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
었다. 높이는 18m, 둘레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
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 나무에서도 완
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
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 장안에서 규모가 제법 있는 절이지만 아직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
했다. 그러니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가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를 팔고 있으며,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
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는 것 같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
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우려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봉원사에 크게 재정을 지원했던 전성기(全星基)
의 송덕비(頌德碑)가 담겨져 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다.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하얀 연꽃의 수수한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수조를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
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과 백련(白蓮)까지 늦
여름에 나타나는 수련(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모여 있다. 어여쁜 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와 대
자연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꽃들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입을 오므린 홍련
저 홍련에서 심청(沈淸) 누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건물 이름
그대로 범종이 담겨져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
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정도를 길게 하
고자 함이라 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
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
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의 하나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
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국사 창건설은 거의 신뢰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
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했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
御)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하니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
란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 수경원(綏慶園)을 1764년에 조성했다.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
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
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리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말, 무심한 총탄과 폭탄이 무수히 날라와 광복
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까지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웅전과 몇몇 건물만 간신히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
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1994년 쓰러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
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고, 201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
),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370호
), 반야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이들은 2014년 여름 이후에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
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
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봉원사는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으로 숲속에 묻힌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이다.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기도 하며, 접근성과 교통도 그런데로 착한 편이라 속세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온 듯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맑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6년을 기준으로 벌써 14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도 전통차 시음,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절에서 안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숨은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까지 올라
가면 동쪽 정상부에 서울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
대는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홍제동, 독립문 방면으로 내려가면 되며, 안산 둘레에는
도심의 아름다운 숲길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안산자락길(7.4km)이 아주 편안하게 닦여져 둘레
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4번 출
  구)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경복궁역(3호선) 1번 출구를 나와서 사직동주민센터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
  고(봉원동)에서 하차, 봉원사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여름(7월 말~8월 초)에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영산재를 비롯해 산사음악회와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2016년에는 7월 30일 딱 하루만 축제를 했음)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을 하는데, 퇴근
  이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이 절을 지킨다. (연꽃축제 기간에는 대웅전은 늦게까
  지 문을 열어둠)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대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홍련을 희롱하는 잠자리
연꽃 봉오리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방긋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내 보인 백련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
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당시 봉원사 주지인 영월이 6.25로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
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세우고 대방
으로 삼았다. 그래도 명세기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데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
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金
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
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
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
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
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
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인간문화재인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아서 이곳에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숨겨진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자리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운수각(雲水閣)과 영안각(靈晏閣)

▲  영안각과 전씨영각(靈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
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넘긴 전성기 부
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
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면 시주한 재산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절이나 속세
나 돈 앞에서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
유까지 하며 찬양을 하니 말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
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미국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
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
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駕
)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과 좌우에 가득 널린
조그만 3천불의 위엄

▲  삼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돌리면 불교 경전을 다 이해하고
더불어 소원까지 성취된다고 한다.

▲  저보다 정신이 없는 그림이 또 있을까?
100명이 넘는 호법신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천불전 내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금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
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
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
승정(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진신사리 보유 사찰
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
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
음껏 뽐낸다.

▲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좁게나마 신촌과 서대문구,
마포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저 수인(手印)은 무슨 제스쳐일까?


▲  삼천불전 서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3) - 서울시 보호수 13-2호
봉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높이 21.5m, 둘레는 4.4m이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72년) 추정 나이가 430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 40년이 얹혀져
470여 년의 장대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  삼천불전 주변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
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
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
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자리해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을 보니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맞는다면 거의 620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
개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
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
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명부(저승)
식구들을 지킨다.


▲  명부전 옆구리에 둥지를 튼 연꽃 무리들 (거의 연잎만 있음)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
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彌勒佛)이 그저 밉기만 하
다.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 후에 나타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살
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리따운 홍련

▲  삼천불전의 숨겨진 부분 - 절 주차장

봉원사에 조촐히 닦여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연꽃이 앗아간 나의 마음을 간신히 되찾아 절을 나올 때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삼천불
전 서쪽으로 내려갔다. 경내에서 볼 때는 1층(아래 공양간을 합치면 2층)이지만 그 밑에 숨바
꼭질을 하는 공간이 있어 삼천불전은 거의 4층 규모이다. 물론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삼천불전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도 봉원사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을 지나니 봉원사의
숨겨진 나머지 보호수 1그루(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봉원사 느티나무 (4) - 서울시 보호수 13-5호

이 느티나무는 민가 옆에 비스듬히 자리해 있다. 하늘을 향한 높이는 23m, 둘레는 3m로 보호수
로 지정된 1981년 당시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80여 년으로 보면 된다. 나무가
특이하게 절을 향해 45도 정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절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나무를 끝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
는다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와 반야암(봉원사의 부속 암자)에 깃든 지방문화재
불상들을 꼭 두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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