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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  호암산 (사진 밑부분에 보이는 기와집이 호압사)


 

천하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서서히 변해가던 11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
인 호암산을 찾았다. 호암산에 안길 때는 시흥2동 호압사입구에서 보통 출발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삼성산성지에서 첫발을 떼었다.

신림역(2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화계사↔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를 가로질
러 삼성산성지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호암산의 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성당과 삼성산
청소년수련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더 가면 계곡 오른쪽 산중턱에 천주교 성
지인 삼성산성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성산성지 동쪽 삼호약수터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  기해박해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의 무덤 (유해 일부가 묻힘)

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1970년에 지어진 삼성산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에 박힌 예수 형상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겨울에 서서히 잠기고 있는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 남쪽)

▲  삼성산성지에서 호압사로 이어지는 산길 (관악산둘레길)

삼성산성지를 간단히 둘러보고 호암산 서쪽에 자리한 호압사로 길을 옮긴다. 지도로 보면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트막한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바로 호압사의 뒷통수인 호압
사 분기점에 이른다.


▲  호압사 채소밭에서 바라본 호암산(虎巖山)의 위엄
알록달록 익어가는 늦가을 단풍이 산 전체를 활활 태우고 있다.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서울을 위협하는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어진 오래된 산사 - 호암산 호압사(虎壓寺)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호압사 경내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
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
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
하니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하여 두 산의 기운을 잡고자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세웠으며, 호암산에 호압
사를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대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
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
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
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으며,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절에서 그럴싸하게 빚은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
을 싹 소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
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殿下),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
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
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
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른
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
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함>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일주문

▲  호압사 범종각과 원두막 쉼터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는데 아
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호압사입구에서 도보 10분이면 끝) 절
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
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원두막 쉼터를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1년에 2~3번 정도 방문함)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
인다. 특히 중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등을 마련하는 등
호압사의 배려가 돋보인다. 범종각 우측 쉼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으며, 종무소에서 물과 음료
수, 염주 등의 불교용품을 판매한다.

호압사는 내가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불
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호압사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52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삼성산성지
  에서 내려서 25분 정도 올라가도 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5517번(서울대↔중앙대), 6515번(양
  천차고지↔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마을버스 01번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 매주 일요일 12~13시에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상황에 따라 안주는 경우도 있음)
* 매년 12월 31일 밤 10시 이후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있다.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
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 겸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
용도 건물로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심검당 옆에 솟아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  쉼터 옆에 자리한 5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심검당과 범종각 옆에는 500년 숙성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하는 산증인들로 오랫동안 뜨락에 아낌없이 그늘을 드리운 고마운 존재들이
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라 그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떠나가려는 늦가을의 발목이라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늦가을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겨울 제국의 이빨이 커지면서 뜨락에는 벌써부터 맥없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낙엽이란 꼬리표를 달며 산바람과 사람들의 빗자루질, 발질에 이
리저리 흩날려 속절없는 삶을 정리한다.

심검당 옆에 자리하며 천하를 굽어보는 느티나무는 키가 7m, 가슴둘레 4.2m이며, 범종각 옆에서
나란히 천하를 바라보는 느티나무는 키 11m, 가슴둘레 3.6m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성장했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절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
을 유난히도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
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 안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
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게도 좌
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약사전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
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995
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치성광여래(칠성)가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山神幀)

▲  푸른 두광(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불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단에
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
이자 상징인 석조약사불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석약사불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
불)'>이 협시보살을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
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
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
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
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과 일광, 월광보살좌상

15~16세기 조성된 이 불상은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
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에는 새로운 식구인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를 지킨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
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료시킨다.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훤하게 만든다.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
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
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리
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벌러덩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

▲  새롭게 마련된 호압사 샘터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지만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지
만 사라진 지 이미 오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물을 제공했다. 그
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제공한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늦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호암산 정상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까지는 해발 160m 정도만 오르면 끝난다. (절 바로 윗봉우리가 정상임)
허나 그 길이 다소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다행
히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만 고생하면 정상 입구 갈림길
이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꼭대기(393m, 또는 385m)에 이른다.

호암산은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산림욕장에서 남쪽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른다면 구름 위를 거닐
듯 편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93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다
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
리에 해당된다.
서울에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
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光明)과 안양(安養),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
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적지않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1)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2)
서울 금천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단지, 광명, 도덕산, 소래산 등이 보인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구름처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
이다. 하여 능선을 따라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
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많은 바위들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
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부와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
가 오래된 명소들도 풍부하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우리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 가지 않고 호암산산림욕장을 거쳐 시흥동(始興洞) 시내로 내려
왔다. 넓게 퍼진 벽산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바로 시흥2,5동 시내인데,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며 걷던 중, 솔향기란 식당이 진하게 손짓을 한다. 날씨도 쌀쌀하여 다들 뜨끈한 해물칼
국수를 먹자고 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  시흥동 솔향기에서 먹은 돌솥비빔밥과 조개 국물의 위엄

솔향기는 해물칼국수와 돌솥비빔밥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다. 다들 칼국수를 몇 그릇씩 먹을 기
세로 들어왔지만 정작 시킨 것은 돌솥비빔밥이었다. 갖은 나물과 고추장, 그리고 돌솥에 바짝
익혀진 밥이 잘 버무려져 그런대로 섭취할 만 했고, 밑반찬으로 깔린 김치도 잘익어 맛이 좋았
다. 특히 하얀 조개 국물이 일품이라 비록 비빔밥의 부속물로 나왔지만 오히려 주물로 봐도 손
색이 없을 정도였다.
비빔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듯 싶어 손만두 2인분을 주문했다. 그러니 조그만 만두 10개(1인
분)가 각 테이블에 수줍은 듯 차려져 나온다. 만두를 집어먹으니 뱃속은 말끔히 채워졌고, 그
렇게 저녁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근데 이 집은 특이하게도 소주나 맥주 등의 곡차(穀茶)
를 팔지 않는 이 땅에 흔치 않은 무알콜 식당이었다. 산행도 했으니 곡차 1잔 걸쳐야 마땅하지
만 술이 없으니 조금은 아쉬운 저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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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2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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