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과 심우장 중간인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전통 기와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 이 머물고 있다. 그 집이 바로 성북동의 주요 명소이자 이곳의 굵직한 전통 찻집으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월북작가로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의 집이다. 이곳은 성북동의 배꼽 부분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도 완사명월형의 기운을 듬뿍 받 고 싶었는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을 1933년에 매입하여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채 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가 가득해 산속의 별 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 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 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자 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방 앞 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에는 1 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20세 기 초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 로 손질하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 던 시절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 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가득해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거쳐 찾는 이가 늘었으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동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하여 성북동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리고 있다.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라린 기 억이 있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 마저 해칠 수 있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 두에게 좋다. |
* 상허 이태준(1904~?)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인 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 파에 밀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썩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岐 )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거름 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게 돈을 충당하면서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년 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성북동에 집을 구입해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으며, 바로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 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장 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표 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동광,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삼천리,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신동아, 1933 ,3)','달밤(중앙, 1933.11)', 손거부(孫巨富/신동아, 1935.11)','가마귀(조광, 1936.1),'복덕방 (조광, 1937.3)' 패강냉(浿江冷/ 삼천리문학, 1938.1)','농군(문장, 1939.7)', '밤길(문장,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춘추, 1942.6)','돌다리(국민문학,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문 학,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 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돌연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와 우경 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아마도 소리소문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회 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의 섬 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抒情性) 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 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 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 년 이후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월북작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면서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용 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 발하게 진행되어 이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쥐가 날 정도로 등장할 정도이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고, 자연 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수연산방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쌍다리(성북구립미 술관) 하차, 여기서 서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성북구립미술관 이 나오는데, 바로 옆에 돌담을 두른 기와집이 있다. 거기가 수연산방이다. * 운영시간은 10시부터 20시까지로 다양한 전통차를 판매한다. (가격은 인사동보다 조금 비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8 ☎ 02-764-17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