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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성북동 나들이 '
(최순우 옛집, 수연산방)

▲  수연산방 사철나무

▲  최순우 옛집 뒷뜰에 있는
둥그런 탁자와 의자

▲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조그만
맷돌과 석구(石臼, 돌통)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 방면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가니 왼쪽 골목에 키다리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이 손짓을 보낸다. 그 집이 이 땅의 고미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이 말년을 보냈던 집이다.

이 집에 살았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
()으로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
물관장인 고유섭()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
년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한 한강인도교 폭파 만행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
한군에게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北壇莊)과 보화각(葆華閣)이라
불림>에 있던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했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을
소환해 그것을 모두 포장하여 지정된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최순우와 손재형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힘들여 수집한 문화유산의 북송만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기가 막힌 눈속임작전을 감행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
(奇)는 아주 어벙벙한 작자였다.

그들은 기씨에게 왜국(倭國) 판화로 된 춘화(春畵, 미성년자 관람불가급의 예민한 그림)를 보
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태클을 걸었고 손재형은 일
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다리가 아프다고 연극까지 벌여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되
어 상자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달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자 뚜껑이 뒤집힌 북한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고 했다.
허나 그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면서 추궁은 모면하게 되었고, 간송미술관의 유물
은 모두 북송을 면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간송 전형필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
원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어 박물관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1년에는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
며, 1984년 12월 16일 성북동 자택(지금의 최순우 옛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
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겸재 정선론()', 한국
의 불화()','혜원 신윤복론(),'이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
동자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  최순우 선생의 왕년의 모습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
채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
락에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는 1976년에 이 집을 구입해
1984년 생애 마지막 날까지 살았으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야말로 풍전등화
의 위태로운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청천
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뜻있는 사람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해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절대 사수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개발의 칼질은 그들의 의기(義氣)
에 보기 좋게 참교육을 당해 고개를 숙였고,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는 2003년부터 2004
년까지 돈을 모아 복원하고 뜨락을 꾸미면서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
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해 지킨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내셔
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음)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
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꾸몄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여
나무와 풀, 꽃이 뜰을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
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기증을 받거나 수습해온 동자상과 문인석, 맷돌, 석구(石臼) 등 다
양한 석물을 배치해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꾼다. 구석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니 넓고 알찬
느낌을 선사한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
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그늘이
가득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사무실에 허가를 구하면 들어가게 해주며, 쪽마루에 앉아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심 속의 새로운 오아시
스이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이벤트가 열려 성북동의 대중적인
명소이자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다.

길상사의 창건주인 길상화(김영한)가 자신이 일군 고급 요정을 절로 바꾸어 속세에게 선물했
듯이 이 집 또한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킨 뜻 깊은 이들이 속세에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또
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성북동의 꿀
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여 대문 문턱이 무너질 정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
도 이곳을 2008년부터 거의 10회 이상 찾아 내부 구조를 거의 외울 정도이다.
성북동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답사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한성대입구역을 기점으로 삼
아 이곳을 먼저 둘러보기 바란다. 단 겨울(12~3월)과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으며 관람시간
은 10시부터 16시까지로 짧은 편이다.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내셔널트러스트 최순우 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개발의 칼질을 참교육시킨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이곳은 그나마 운이 좋았지
속세의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발로 날라간 옛 집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  속세를 향해 가슴을 연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아 옛집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안채 앞뜨락

▲  최순우 옛집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최순우 관련 서적과 전통차를 판매하고 있다.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와 이전 주인 일가의 식수를 제공했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여러 석물과 서적들이 놓인 뒷뜨락 남쪽
돌의자에 놓인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으며 돌의자나 안채 뒷쪽 쪽마루에
걸터앉아 독서에 임하면 된다.

▲  동쪽 행랑에서 바라본 뒷뜨락

▲  수풀 밑에 누워있는 석구(石臼)

▲  표정이 앳된 조그만 동자상


▲  박석이 입혀진 뒷뜨락 돌길과 장승 2기 (오른쪽 장승은 수풀에 가려짐)

돌길이 우리네 인생처럼 너무나 짧다.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끝나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재
밌게 생긴 장승 2기가 돌길을 지키고 있는데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영 좋지않은 기운들
은 장승의 재미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  뒷뜨락에 닦여진 둥그런 탁자 (누구든지 앉아서 독서나 대화 가능)

▲  뒷뜨락 장독대
장독대에는 무언가가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저들은 속이 빈 장식용이다.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나그네들의 조촐한 휴식공간
안채 뒷쪽 쪽마루

▲  안채 내부 - 복원 과정에서 꾸며진
부분이 상당수 된다.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입혀진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 이상으로 뚝 떨어진다. 내게 큰 지우개
가 있다면 담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혜곡이 쓰던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마루에 놓인 검은 피부의 커다란 함지박


 

♠  상허 이태준이 살던 기와집,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상허 이태준 가옥(尙虛 李泰俊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1호

▲  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壽硯山房)> 외경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지친 머리와 두 다리도 잠시 달랠 겸, 차 1잔의 여유를 즐기
기로 했다. 하여 찾아간 곳은 예전부터 꼭 차를 마시고 싶었던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전통담장과 나무로 몸을 가린 기와집이다.
성북동의 어엿한 명소이자 굵직한 전통찻집으로 사람들로 늘 미어터져 주말에는 자리를 잡기
가 힘들다.

이곳은 월북작가로 이 땅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은 대접을 받았던 상허 이태준의 집이다. 그는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 명당에 욕심이 났는지 29살이던 1933년에 성북동의 배
꼽 부분에 해당되는 바로 이 자리에 땅을 구입해 개량한옥을 지었다. 이런 한옥을 짓고 살 정
도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서 1946년까지 가족과 살았으며,
'달밤','돌다리','황진이' 등 그의 수많은 작품이
여기서 태어났다. 이른바 그의 문학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어떤 자료에는 1900년대에 지어
진 집으로 나옴)


집의 규모는 대지 약 120평, 건물 면적 23.2평으로 서남향(西南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사랑
채와 안채를 합친 본채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조그만 대문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게 펼
쳐진 뜨락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매며,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와 온갖 화초들로 가득해 산속의
외딴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산방 동쪽에는 찻집으로 쓰이는 본채가 있으며, 서쪽에도 기와
집이 있으나 이는 찻집을 확장하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또한 예전에는 상심루란 건물이 본채
앞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이라 불리는 본채는 앞부분은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맞배지붕으로 'ㄱ'
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앙 2칸을 대청으로 하고 대청 남쪽에는 1칸 크기의 안방을, 안
방 앞에는 작은 1칸 크기의 누마루가 있다. 그 뒤에 반칸 크기의 부엌을 두었으며, 대청 북쪽
에는 1칸의 건넌방이 있고, 대청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가 있으며, 건넌방 뒤에 1칸의 뒷방이
있다.

이태준이 월북하자 그의 남겨진 가족들은 나라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살았으며, 1977년에 개
량한옥의 모습을 잘보여주고 있는 점과 사랑채와 안채를 합친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서울시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그의 외종손녀인 조상명이 이 집을 전통찻집으로 손질하
여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다. 당시 성북동은 지금처럼 제대로 된 찻집이나 까페가 없던 시절
이니 거의 성북동의 전문 전통찻집 1호나 다름이 없다.
찻집의 이름은 이태준의 당호(堂號)인 수연산방으로 삼았는데, 수연산방이란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속의 작은 집'이란 뜻이다. 왜정(倭政)까지만 해도 이곳은 산속 같은 변두리라 그 이
름이 딱 어울렸으나 이제는 졸부들의 집이 주변에 널려 주택가 속의 외로운 기와집이 되었다.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분위기와 한옥에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매력으로 속
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간송미술관과 길상사, 삼청각, 심우장 등 성북
동의 간판 명소들이 크게 인기를 누리면서 그 후광(後光)을 단단히 봤다. 성북동에서 꼭 가봐
야 직성이 풀리는 전통찻집 겸 한옥으로 명성이 높아졌고,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
을 누리고 있다.
특히 휴일에는 거의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올 때마다 만원이라 여러 번 발길을 돌린 쓰
라린 기억이 있다. 허나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사랑채 쪽에 자리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차
를 1잔 마셨다.
이토록 늘어나는 손님을 해결하고자 서쪽에 새로 건물을 지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신축이나 증축도 어렵다. 주어진 공간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본채를 건드리는 것은 말도 안되며,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고풍스런 분위기마저 해칠
수 있다. 괜한 욕심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수연
산방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좋다.

▲  뜨락에 세워진 이태준 문학의 산실 표석

▲  뜨락에 심어진 돌기둥과 석등


* 상허 이태준(1904 ~ ?)의 간략한 삶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호는 상허(尙虛)이다.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開化派)의 지식
인으로 활약했던 이문교(李文敎)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수구파에 밀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태준의 가정형편은 그리 좋은 편이 되지 못했으며, 9살에 어머니까지 별세하면
서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는 책장사를 해가며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당시 그 학교 교사였던 이병기(李秉
岐)의 영향을 받아 고전문학의 소양을 듬뿍 쌓았다. 그 소양은 나중에 소설가로 성장하는 밑
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학교의 무슨 비리나 문제가 있었는지 불합
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가 입선되어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를 했고,
1926년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 진학해 신문과 우유 배달로 힘겹
게 돈을 충당하며 공부를 했으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1930
년에 이화여전 음악가 출신인 이순옥과 혼인하여 가정을 꾸린다. 1933년에는 그동안 모은 돈
으로 성북동에 땅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한옥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한다. 그
리고 그해 이효석(李孝石)과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유치진(柳致眞) 등과 친목단체
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 시절 평론가이던 최재서(崔載瑞)는 시는 정지용(鄭芝溶), 산문은 이태준이라 할 정도로 문
장의 달인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의 기수, 한국 단편의 완성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수많은 문제작품(問題作品)을 발
표했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문단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1931년 '아무일도 없소(東
光, 1931.7.)'를 시작으로 '불우선생(不遇先生 / 三千里, 1932.4)'과 '꽃나무는 심어놓고(新
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 / 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 1936.1),'복덕방(朝光, 1937.3)' 패강냉(浿江冷 / 三千里文學, 1938.1)','농군(文章, 1939.7)', '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 / 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
學, 1943.1) 등을 냈다.
1945년 이후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해방전후(解放前後/
文學, 1946.8)'는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으로 속인들의 호응을 크게 받
았다.

1945년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
면서 '해방전후'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기념 조선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
다가 1946년 여름 홍명희와 함께 월북(越北)했다.
1946년 10월에는 북한의 조선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다녀왔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의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그리고 6.25시절에는 종군작가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허나 1952년부터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상검토를 당하고 과거를 추궁받았으며, 1956년 친일혐의
와 우경적인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함흥(咸興)으로 추방당해 콘크리트 블럭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아마도 소리소문도 없이 처단된 듯 싶다.

그의 1945년 이전 작품은 대체로 시대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을 띄기보다는 구인
회의 성격에 맞는 현실에 초연한 예술지상적 색채를 진하게 나타내고 있다. 인간 세정(世情)
의 섬세한 묘사나 동정적 시선으로 대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자세 때문에 단편소설의 서정성(
抒情性)을 높여 예술적 완성도와 깊이를 세워 나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는다. 1945년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작품에도 사회주
의적 색채를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북한 종군기자로 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고향길(1950)'이나 '첫전투(1949) 등은 생경한
이데올로기를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왜정 때 쓴 작품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그가 월북한 것도 자의적인 것이 아닌 강제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1956년 이후에
숙청으로 사라진 것은 그가 철저한 사회주의적 작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엄연한 월북작가라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작품을 몽땅 통제하여 그의 이름과 작품
은 생매장을 당했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존재는 1988년 통제에서 풀려나면서 정지
용과 더불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록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또한 그의 외종손녀의 노력으로 그의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널리 알려졌으며 자
연히 그의 이름 3자와 작품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 (성북로26길 8 ☎ 02-764-1736)


▲  문이 활짝 열린 수연산방 정문

▲  뚜껑이 닫힌 우물
본채 앞에 사람 키 정도로 땅을 파 석축을 입히고 그 복판에 우물을 팠다.
이태준 일가에게 시원한 물을 선사했던 우물은 오래전에 생명을 다해
지금은 겉모습만 남았다.

▲  문학의 향기와 차의 향기가 뒤섞인 수연산방 본채(죽간서옥)

죽간서옥이라 불리는 본채의 방과 툇마루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로 발을 디딜 공
간이 없다. 이곳은 이태준이 있던 시절, 구인회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우리들 귀에 매우 익숙
한 이효석, 정지용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여기서 다과나 곡차(穀茶)를 즐기며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토론을 했으며, 세상 걱정에 자주 밤을 샜다고 전한다.
죽간서옥은 대나무 숲 사이의 서옥(書屋)을 뜻하며, 건물 안에는 이태준의 손때가 묻은 유물
과 그가 직접 쓴 작품과 서적들이 있다.


▲  빛바랜 수연산방 현판의 위엄 - 이태준의 글씨로 전해진다.
빛바랜 부분이 많아서 수십 년이 아닌 300년은 거뜬히 묵은 현판 같다.

▲  빛이 바랜 죽간서옥 현판 - 이태준 글씨
죽(竹) 글씨 위가 하얗게 바래지면서 마치 대나무에 쌓인 눈을 보는 듯 하다.

▲  본채(죽간서옥) 앞에 놓인 소나무 분재의 위엄

▲  뜨락 중앙에 자리한 사철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4호
수연산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자연물로 아담한 키로 뜨락을 햇볕으로부터 지킨다.
나이가 5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50년이면 이태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의 남은 가족이 망중한을 달래고자 심은 듯 싶다.

▲  뜨락을 수식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있는 벌개미취와 여러 꽃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 가족 사진
슬하의 자녀가 무려 5명이나 된다. (그 시절에는 5~6명은 기본이었으니)
본채에서 차를 마실 때, 방 곳곳에 걸린 사진과 현판, 그의 유품과
서적을 구경할 수 있다.

▲  본채 내부에 걸린 이태준의 친필 현판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액자에 소중히 담긴 이태준의 문서

▲  수연산방에서 누린 전통차 (차 이름은 잊어먹었음)

수연산방에서는 본채(사랑채, 안채) 내부나 새로 지은 서쪽 건물과 야외 자리, 그리고 사철나
무 밑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실 수 있다. 그 자리들이 모두 찼을 때는 본채 툇마루에서 마셔
야 되는데 그 자리라도 앉으면 다행이다. (사랑채 안쪽 자리가 명당으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것
이 좋음)
이곳 전통차 가격은 인사동과 비슷하거나 좀 야박한 수준으로 차를 주문하면 유과 등의 먹거
리와 따뜻한 물이 같이 덩달아서 나온다. 양반가의 방처럼 꾸며진 고풍스런 기와집에서 마시
는 전통차라 그런가 맛이 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비오는 날 뚝뚝 대지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빗소리를 노래 삼아 누리는 차 1잔의 여유는 이곳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차의 향기도 좋고, 찻집 분위기도 아주 그윽하고 좋으니 서로의 긴장된 마음이 열리면서 이야
기꽃이 마구 쏟아진다. 그렇게 여기서 머문 시간은 무려 2시간, 전통찻집이나 까페는 자주 가
는 편이지만 길어봐야 2시간 이하로 머무는데, 여기서는 그 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다. 정말 1
시간 정도 머문 것 같은데, 이곳이 시간 도둑인지 시간을 잡아먹는 블랙홀인지 하루에 1/12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게다가 방에 앉아서 마시는 거라 일어나기 귀찮음이 발생하면 머무는 시
간은 자연히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잠시나마 차담(茶啖)으로 각박한 속세를 잠시 잊는 것도 괜찮지. 식사를 하는 것이 아
닌 분위기에 취해, 차 향기에 취해, 이야기에 취하며 오래 머무는 공간이 바로 찻집(또는 까
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가을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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