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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길상사 겨울 산책 '

▲  길상사 관음보살상


 

묵은 해가 천하만물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저물고 따끈따끈한 새해의 햇살이 천하를 막 보
듬던 1월의 첫 주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년에 4~5회 이상 찾을 정도로 지겹게 발걸음을 한 곳이다. 허나 도심 속의 별천
지 같은 그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져 질리기는 커녕 자꾸만 손과 발이 간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있는 사찰 중,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몸이 길상사의 열성 신도나 법정스님의 팬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길상사를 그렇게도 많이 찾았건만 모두 봄과 여름, 늦가을에 갔을 뿐,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설경(雪景)을 보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그저 다짐으로만 끝난 채 벌
써 여러 해의 겨울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갈리는 시점에 큰 눈
이 내렸는데 이때다 싶어 새해 첫 주말 나들이 메뉴로 그곳을 택했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2차선 골목인 선잠로를 따라 12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면 됨~) 그 짧은 구
간은 권력층과 졸부들의 번쩍번쩍한 금입택(金入宅)이 덥수룩하게 펼쳐진 현장으로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나날이 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거의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
(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지나가는 선량한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고
급빌라와 저택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다.

비록 나같은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
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구중궁궐의 저택이라 하여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
고 당당히 가슴을 펴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
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에 우리나라의 0.1%
서식한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 따위들이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
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김영한)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녹아든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극락전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로 가득한 성
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의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를
흐르고 있어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거니와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다른 절에서는 접하기 힘
든 이채로운 볼거리도 여럿 있어 두 눈에 적지않게 흥분감을 던진다.

길상사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法燈)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
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시절 권력실세와 졸부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
지하고 찾을 수 있는 절로 변신한 전대미문의 현장이자 무소유(無所有)의 저자로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고급요정을 흔쾌히 기증했던
김영한(길상화)의 인생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법정은 201031113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날 순천 송광
(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위치는
변경 가능)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
  의 영화와 같은 탄생과정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날
렸던 대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세들과 졸부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이가 바로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1916년 부유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허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났고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여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신랑은 몸이 매우 허
약했고,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곁에 있던 남편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과부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물 부근에서 놀다가 빠진 듯함)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이성 잃은 구박이 나날이 드쎄지자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집을
나왔으나 정작 정처(定處)는 없었다. 하여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
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때 나이 16)

그는 가무와 궁중무, 시문 등 기생의 기본 소양을 익혔는데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문학, 예술
적 소질까지 넘쳐나 금세 서울 권번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삼천리 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대단했음)
흥사단(興士團)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1933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나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그가 있다는 함경도 함흥(咸興) 감옥을 찾았다. 허나 만나
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는데 거기서 영어 교사로
있던 백석(白石, 1912~1996)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둘은 급 가까워진다.

김영한에게 퐁당퐁당 빠진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 부르며 그녀의 하숙에서 함께 지냈다.
거기서 거의 출퇴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자 교사직까지 내
던지고 그를 따라 상경, 조선일보에 취직했다. 그리고 청진동(종로1)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
과 함흥을 오가며 3년 동안 동거에 들어갔다.
허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의 혼인을 쌍수들고
반대했고 극기야 다른 여자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른다. 허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에
도망쳐 김영한을 찾았고, 이후에도 그런 행위는 계속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과 부모 사이에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갈등하다가 아예 만주로 도망치자고 김영
한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이곳에 있자고 하였고 서로가 조금
씩 갈등의 골을 보이다가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비운
에 빠트렸다며 늘 후회했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서 활동했음)
혼자가 된 김영한은 그 외로움을 돈벌이로 풀었다. 돈에 대한 강인한 집녑을 보이며 적지 않
은 재산을 긁어모았고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그녀의 나이 불과 35세에 거금 650만 원
을 들여 현 길상사 자리를 매입해 대원각의 전신이 되는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내었다.
그는 계곡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났던 그곳에 좋은 예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 명당 기운에도 적지 않게 욕심을 냈을 것이다.
또한 사업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몇 편의 수필과 '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쓰기도 했다.

잠시 식당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대원각의 명성에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
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함)
대원각 단골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잘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
도 였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
을 드날렸다.

허나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하
고 악착같이 살았지만 나이를 강제로 먹으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닫던 중, 법정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미대륙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렀
1987년 그곳으로 설법을 하러 온 법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법문에 다시 감동의 파도를 느낀 그는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증하기
로 했다. 당시 대원각은 면적 7,000여 평, 건물만 40여 동에 이르렀으며 시가는 무려 1,000
을 헤아렸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바로 받
으면 그것 또한 모양새가 좋지 않음) 허나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법정은 1995년 그곳을 받아 일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갑자기 큰 보물단지를 얻게 되어 싱글벙글이 된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갈아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이자 법정이 김영한에게 지어
준 법명인 길상화(吉祥花, 吉祥華)를 따서 길상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그해 1214일 개원
법회를 열어 길상사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개원법회에는 천주교의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몰렸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 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
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염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
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인생의 끝 무렵을 보내던 그는 1999111483세의 나이로 외로
운 삶을 놓게되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중생의 통곡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었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
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 태반의 졸부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대원각을 기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래봐야 그 사람(
백석)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
며 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
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감동의 싹과 눈물을 선사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이 점거하여 진흙탕이 되버린 성북동
부촌(성북로 북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겨났다.

▲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던
길상헌

▲  조촐한 모습의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정 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30동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라서 딱히 문화유산은 없
으나 20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절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 법회 때는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
들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
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은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못지 않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들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벌이는 1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여하거나 3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면 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원 출입시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침묵의집 -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
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시간은 10~17시이며, 일요
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짧게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1달에 2(매월 3/4째주 토~일요일
12일 일정) 정도 열린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 차담, 자유포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려 5만원으로 이곳
템플스테이에 1회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3만원으로 깎아준다. (여름선수련회와 3~4시간 일정
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 길상사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길상사 하차, 또는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앞에 템플스테이의 링크된 부분이나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을 들어설 때면 다들 정면에 보이는 풍경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있어 천정을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 문을 들어서는 중생의 99.9%는 그냥 앞만 보고 갈 것이다. 그게 사람의 본능
이니까. 허나 여기서 잠시 목운동을 해보자. 고개를 90도 올려다보면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이 두 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
지를 가진 새 2마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새의 모습을 보니 거의 봉황(鳳凰)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
이다보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보여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가 아닐까도 싶다. 그림이 꽤 수작(秀作)으로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어서 지나가는 중
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길상사를 30번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2012년 봄이었으니 진정한 숨바꼭질의 종결자가 아닐 수 없다.

   ◀  이국적으로 생긴 길상사 관음보살상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상사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
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
이건 무슨 스타일의 관음보살인가?'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아
소탈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머
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며,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
왔다.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 그 자체
라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
취했고, 왼손에는 관음보살의 필수 아이템인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
런 조각이 없다.

이 이국적인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
로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428일에 봉안
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긴 하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겨울 제국의 핍박에 물까지 끊긴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
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봄과 여름, 가을에는 늘 물로 가득했다.
나 지금은 겨울 제국 시절이라 물이 끊겨 연꽃무늬의 석조(石槽) 안에는 물 대신 눈이 가득하
. 그러다보니 바가지들도 딱히 소임거리가 없어 찬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들 있다.


▲  설법전 앞뜨락 (범종각과 샘터, 관음보살상)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의 모습이 꽤 이채롭다. 그는
예전에는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허나 겨울 제국
에게 모든 걸 빼앗겨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신세로 몰래 봄을 잉태하여 쏟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
m, 둘레는 2.5m이다.


▲  느티나무 그늘 쉼터에서 만난 법정스님 어록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무지 넓은 설법전 내부

▲  해맑은 표정의 금동석가불좌상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
)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825,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아로새겨진 기단부와
기단과 탑신의 경계를 이루는 석사자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
등이 바라보인다.


 

♠  길상사 극락전과 지장전 주변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
이나 안방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법정의 영정 (영정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극락전 뜨락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대원각 초창기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황토색과 하얀색(눈),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극락전 뜨락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 3.2m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덩치를 갖추었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
10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5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내부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있으며, 붉은 색
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종일 잔잔히 울러펴지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
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무덤 석실(石室)처럼 모
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
.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삼존불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
보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눈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지장전 뜨락과 연못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깊은 숲속의 절을 보는 듯 하다.

▲ 계곡 건너에 자리한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다리와 길상헌 뒤쪽 담장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하며 조그만 폭포도 2
정도 있는데, 눈과 얼음에 갇혀 나래를 펼치
지 못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거추장스
러운 얼음을 박차고 졸졸졸 깨어나겠지.


 

♠  길상사 마무리 (진영각, 침묵의집)

▲  경내 서북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나무그늘 쉼터
경내 서북쪽 언덕에 2012년에 새롭게 터를 다진 낭만적인 이름의 나무그늘이 있다.
이곳은 좌선을 위한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나무 그늘로 가득해
여름 제국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단 겨울 제국이 손을 대는 경우,
이곳 사용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됨)


▲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37(음력 126)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
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진영각 중앙에 자리한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3월부터 1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린 것이다. 전 문화재청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는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
올 것 같다며 격찬을 했는데 진영의 글씨와 진영각 현판은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의 제자
, 승려 기현(奇玄)이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문서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  극락전 뒤쪽 자비실
승려의 생활 및 참선 장소로 지붕이 유난히
크다. 절집보다는 거의 별장 같은 분위기로
길상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
부터 17(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목조
3존불감의 모조품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나누는 기쁨'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곱상
하게 생긴 작은 찻잔에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둥둥 띄워 제공하는데 (나는 매실차를 마
셨음) 차의 가격은 3,000~5,000원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좀 저렴하며 대신 리필이
안된다. (상황에 따라 되는 경우도 있음)
전통차 외에 커피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그런데로 착한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사
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길상화(김영한)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던 부
처와 관음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수행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면서 한겨울에 찾아간 길상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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