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튼 오목대는 1380년 이성계가 전주이씨 종족들
을 모아 연회를 베풀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
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연으로 오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끝없이 기울어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침범하
여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강화도까지 쳐
들어와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약탈해갈 정도였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때려잡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충렬왕(忠烈王) 이후 몽고의 통제로 강력했던 고려의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벌에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하여 1380년 진포
(鎭浦, 금강 하류)에서 왜구를 50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다
소 반전이 된다.
하지만 그때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 잔당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 내륙지역으로 줄
행랑을 치면서 고려 정부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
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인 의제(義弟)인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 운봉(
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죄다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전투가 그 빛나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서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 모
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 대풍가
(大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적지 않은 역
겨움을 느끼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말을 달려 단숨에 남천(南川, 전주천 상류)
을 건너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말을 멈추고 개경(開京)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읊고는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1388년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명나라를 향해야 할 창
을 개경으로 돌렸다.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정몽주와 최영(崔瑩) 등 고려의 보루(堡壘)들을 죽
이고 끝내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
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의 친필이
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한옥마을을 묵묵히 굽어보는 오목대는 한옥마을과도 길이 이어져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허나 이곳까지 오르는 답사객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
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비각 좌우로 멋드러지게 가지를 올린 나무 여러 그루가 비석을 호위한다. |
예로부터 전주의 중심부인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 일대에 넓게 조성된 전주한옥마을은 서
울의 북촌(北村)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곳 밖에 없는 대규모 한옥밀집지역이다. 전주시의 꾸준
한 홍보와 정비사업으로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여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온다.
전주한옥마을은 총면적이 76,320평에 이르며, 약 900여 채의 전통한옥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왜
정(倭政) 이후에 지어진 한옥으로 100년 이상 된 집은 거의 없다. 이곳에 기와집이 많이 뿌리를
내린 것은 왜정이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던 전주성(全州城)을 말끔히 부시고 도로를 뚫으면서
성 밖에 사던 왜인들이 성 안으로 마구잡이로 기어들어와 물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전주 사람들은 전주를 지키고자 너도나도 한옥을 지어 살면서 거대한 한옥마
을이 된 것이며, 왜정 때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향수가 진하게 서린 고풍(古風
)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몇몇 한옥은 북촌의 한옥처럼 문화공간이나 공예관, 찻집, 식당, 민
박집이나 한옥체험장, 전통체험관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그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자극시킨다. |
오목대 동쪽에는 남원(南原)으로 달리는 17번 국도(기린로)가 뚫려있다. 전주 도심을 우회하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수레의 굉음이 귀를 진하게 때려댄다. 길 건너편 동쪽에는
이목대가 있는데,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
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
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
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
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어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
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
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
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
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
翰)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
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
존했으며, 1900년 고종 황제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碑文)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
居遺址)'라 쓰여 있다. 비문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가지 설화가 적혀있는데,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라고 한다.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또한 호운암(虎隕岩) 설화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어느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
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
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
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
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
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
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
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 오목대, 이목대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서울과 주요 지역에서 전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고양, 의정부, 인천, 부천, 안양, 수원, 안산, 대전(유성, 서대전), 군산, 광주, 순천, 대구
(서부). 울산, 부산, 창원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익산, 용산행 전라선 열차 이용
② 전주 현지 교통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남부시장이나 풍남문을 경유하
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한옥마을) 하차. 이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물 흐르듯 빈번하
게 다니므로 교통은 편하다. 전동성당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풍남
문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태조로(太祖路)로 진입하여 7분 정도를 가면
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 언덕 정상에 바로 오목대가 있다.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
에서 하차하여 기린로를 따라 남쪽으로 도보 15분
* 금암광장에서 429번(1일 12회), 486번(1일 18회) 시내버스를 타면 오목대 앞까지 간다. 허나
차가 별로 없고, 전주교대와 좁은목으로 삥 돌아서 가므로 교통편이 좋은 전동성당에서 내려
걷는 것이 속 편하다.
*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과 반대방향(동쪽)을 보면 기린로란 큰 도로가 있다. 도로 위에 걸린
오목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이목대 비각이다.
③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전주 방면 → 인후동(모래내)
→ 기린로 → 오목대
*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조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기린로 직진 →
오목대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공예품전시관이나 한벽당 부근 전통문화센터에 하면 된다.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