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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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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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大拉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恩眞)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尹一柱 )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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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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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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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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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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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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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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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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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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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