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선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조금 걸으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서울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돈의문) 자리로 여겨지는 곳으로 여기서 왼쪽(북쪽) 길인 송월길로 조금 들어 서면 하얀 피부의 성곽(城郭)이 나타나 뭇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성곽은 근래에 복원 된 한양도성의 일부로 여기서 홍난파가옥까지 성곽을 겯드린 월암근린공원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서 각각 길이 끊긴 한양도성은 월암근린공원에서 짧게나마 모습을 비춘다. 허나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하여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닦은 촬영세트장 이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倭政)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철저하게 뭉 개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으며, 도성 복원 계 획으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성곽을 복원 하면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다시 부여했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 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공원 이름인 월암은 인근에 있는 월암 바위글씨에서 비롯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시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 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언젠가는 반드시 복원이 마무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또한 안되면 그만이다. |
월암근린공원 북쪽에는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두룬 별장 같은 아 담한 주택이 시선을 부여잡는다. 그 집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 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 시절,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909년, 한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심장병으로 37세란 한참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었던 왜 정(倭政)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 고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 년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 불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 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작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 하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고,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 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 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 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 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 과 자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까지 닦았다. |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작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이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 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 면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 정악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 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 주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 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 곡','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 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 영세(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 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 羅素雲)이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 무국(學務局)에서 결성된 친일단체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 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 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 려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를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나의 돌머리를 적지않게 아프게 했는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 작자들의 개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 보질 않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해마다 적당한 음악인 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 먹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서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 다버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서 '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난파기념사업회도 생각이 있다면 이제 그만 난파음악상을 접고 조용히 잠수를 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게 난파의 이름에 그나마 덜 먹칠을 하는 거니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온통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홍난파 가옥은 붉은 날을 제외하고 늘 속세에 열려있다. 허나 현 관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이 잠긴 줄 알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이 바로 홍난파 가옥의 함정, 허나 관람시간이라면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문 앞 에 달린 벨을 눌러보자. 그러면 안에서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탄 다음, 1층 홀로 들어간다. 1층에는 거실과 침실 2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침실 2개를 합쳐서 전시관 겸 소공연장으로 꾸몄다. 거실에는 이 집의 특징인 붉은 벽난로가 있으며, 그의 흉상과 의자, 바이올린, 피아노 등이 놓여져 음악가 의 집임을 새삼 실감케 한다. |
▲ 홍난파의 인생을 요약하면 위와 같다. 친일 행적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두 빠져있고 꿀발린 내용만 가득하다. 이러면 역사 왜곡을 일삼으며 민중을 우롱하는 식민사관, 친일파 후손 패거리와 다를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 홍난파의 그 잘난 사진과 그의 유품, 음악 문서들
▲ 홍난파의 사진과 조선가요작곡집(오른쪽)
▲ 왼쪽은 고향의 봄 악곡집, 가운데는 봉선화 악보, 오른쪽은 조선동요백곡집
▲ 홍난파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어둑어둑한 홍난파 가옥 지하 이곳은 시청각실로 쓰인다. 허나 그 횟수가 별로 없어 거의 노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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