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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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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2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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