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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수원 봉녕사 '


 

차디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4월의 첫 무렵,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찾았다.

화서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인 서호(西湖)를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후식거리를 물색하다가 수원시내 동북부에 자리한 봉녕사로
길을 잡았다.


  콘크리트와 개발의 산물에 둘러싸인 봉녕사 표석 (봉녕사입구)


 

♠  봉녕사 입문

▲  봉녕사 일주문(一柱門)

녕사입구에서 봉녕사를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동남쪽 오르막 길을 5분 정도 가면 봉
녕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과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는 문으로 1994년에 지어졌는데 문에 쓰인 목재는 영
천 백흥암(百興庵) 승려인 육문이 희사(喜捨)했다. 육중한 맞배지붕을 받치고자 돌로 기둥을
삼았지만 지붕의 위엄을 감당하기가 버겨운지 바로 옆에 보조용 목조 기둥을 두어 4개의 기둥
으로 지붕을 사이좋게 받쳐들고 있다.


▲  일주문 옆에 자리한 봉녕사 사적비

문 정면에는 '광교산 봉녕사(光敎山 奉寧寺)'
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 기둥에는
'봉
녕사 승가대학(奉寧寺僧伽大學)','봉녕사금강
율원(奉寧寺金剛律院)'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
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알려준다.

문 옆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 있고, 그 너머로 요즘 한참 난개발이 진행
되고 있는 광교(光敎)신도시가 바라보인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소나무와 함께 한참 물이 오른 연분홍 진달래꽃이 중생들을
환영한다. 이 언덕은 봉녕사 비구니들이 직접 가꾼 것으로 그 언덕 너머에 바로 봉녕사가 자
리해 있는데, 경내로 다가설수록 언덕의 높이도 낮아져 절 건물의 머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
낸다.
보통 평지나 낮은 곳에 자리한 절들은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거의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
면 경내 외곽부터 법당까지 줄줄이 나타나는데 반해 여기는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음에도 지
형상의 이유로 경내를 바로 언덕 너머에 두고 빙 둘러가는 구조를 취했다. 오로지 지름길과
직선을 선호하는 요즘 세상과는 맞지 않게 말이다. 물론 일주문을 지나 쭉 들어가면 알아서
경내가 나오기는 하나 중간에 서쪽으로 90도로 휘어져 경내로 이어지니 이는 부질없는 인생,
너무 빠른 길만 찾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돌아가는 삶도 즐기면서 살라는 봉녕사의 주문이 담
긴 것은 아닐까 싶다.


▲  길이 서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부분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 쓰인 2개의 돌기둥이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돌기둥을 지나면 나오는 오르막길
경사가 낮은 저 언덕길을 오르면 봉녕사 경내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  범종루 주변 (정면에 3층석탑과 '佛' 바위글씨가 있음)

조금 구부러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주차장이 있는 경내 외곽에 이른다. 바로 정면에는 범
종각과 우화궁, 불(佛)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등이 보이고, 왼쪽(남쪽)에는 늘씬한 숲길과
승려들의 보금자리인 육화료(六和寮), 그리고 오른쪽(북쪽)에는 불서각을 비롯해 경내 중심이
질서를 잡으며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법당인 대적광전까지 길(130m 정도 됨)이 곧
게 닦여져 있어 장쾌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게다가 길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문도 없으니
대적광전까지 속시원히 두 눈에 들어와 그런 기분을 더욱 돋구어 주며, 그 길을 척추로 하여
좌우에 향하당과 청운당, 소요삼장 등의 건물과 온갖 석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자리
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비추는 불서각(쉼터)에는 불교 용품과 서적, 공양미 등을 판매하
고 있는데, 옆 쉼터에는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 그리고 의자가 넉넉히 배치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봉녕사 범종루(梵鍾樓)
2002년에 조성된 범종(梵鍾)을 비롯해 법고
(法故),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의 4물
(四物)이 담겨져 있다.

▲  '佛' 바위글씨의 위엄
크고 단단하게 생긴 바위에 부처를 뜻하는
'佛' 1글자가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수원 우만동 뒷산에 자리한 봉녕사는 비구니 수행/교육도량으로 수원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광교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광교산 봉녕사'를 칭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광교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가 한참이나 떨
어진 금강산(金剛山)을 가져와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는 것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봉
녕사와 광교산 사이에 도로와 주거지, 경기대가 자리하여 서로를 떨어트려서 그렇지 이곳도
엄연한 광교산(582m)의 일부이다. 정확히 말하면 광교산의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해당된다.

봉녕사는 1208년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여 창성사(彰聖寺) 또는 성창사(聖彰寺)라 했다
고 전한다. 원각이 과연 세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경내에 고려 중기 석불이 있고, 800
년 정도 묵은 향나무가 있어 13세기에 창건되었음을 그런데로 받쳐주고 있다.
조선 초에는 봉덕사(奉德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1469년 혜각국사(慧覺國師)가 중수하여 봉녕
사로 이름을 갈았다. 혜각국사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世祖)
가 예우했던 신미
(信眉)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한자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로 해석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승려이다.

이후 1878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중반부터 조금씩 중창을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  돌다리와 계단 너머로 보이는 대적광전

1878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칠성탱, 현왕탱을 조성했고, 1891년에 신중탱을 조성했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하다가 1971년 묘전(妙典)이 주지가 되면서 우리나라 현대 비구니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묘엄(妙嚴)과 의기투합해 요사와 법당을 신축하고 선원을 개원했으며, 1974
년에 대웅전을 신축하고, 석가불을 봉안했다. 그리고 1975년에는 묘엄이 승가학원을 설립하면
봉녕사는 이때부터 비구니 수행/교육 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83년 육화당(육화료) 3층 건물을 지어 승가학원을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개칭하여 묘엄이
초대 승가대학장이 되었으며, 1989년과 1992년에 도서관(소요삼장)을 세우면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모두 지닌 비구니 수련도량으로 내실을 키웠다.

1994년에는 영천 백흥암의 육문이 희사한 나무로 일주문을 세웠고, 1998년 약사보전을 중건했
으며, 야외에서 고통받던 석조3존불을 위해 용화각을 그에게 씌우는 한편, 1998년에는 법당을
중건해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묘엄이 천하 최초로 비구니 율원(律
院)인 금강율원(金剛律院, 금강율원승가대학원)을 개원하여 수행도량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
높였다.
지금의 봉녕사와 승가대학, 그리고 비구니 최초의 율원을 만든 저력을 과시한 묘엄은 2011년
12월 3일 봉녕사에서 80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그는 큰 승려로 찬양받는 성철의 유일한 비
구니 제자로도 유명하다.

제법 너른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용화각, 약사보전,
향하당, 청운
당, 소요삼장 등 10여 동의 온갖 건물이 자리해 있는데, 용화각과 약사보전, 불서각 등을 제
외하면 허벌나게 크다. 그리고 대적광전과 용화각, 약사보전은 동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경내가 완전 북향도 남향도 아닌 동남향(東南向)이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석조3존불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신중
탱, 현왕탱 등 지방문화재 2점이 있으며, 대적광전 뜨락에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그 외에는 딱히 오래된 유물은 없으며, 건물도
1971년 이후에 죄다 으리으리하게 갈았기 때문에 고색의 향기도 싹 말라버렸다.

봉녕사는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깔끔하고 정갈하다. 어여쁜 꽃과 식물들이 구석구석 심
어져 자연과 여인의 향기를 그윽하게 베풀고 있고, 조금의 먼지도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피
부와 눈 색깔이 다른 외국인 비구니도 많은데, 서구에서 온 이들이 많다. 또한 다른 정통수행
도량과 달리 속세에도 개방적이라 나들이객과 속인들에게도 친절한 편이며, 템플스테이와 산
사음악회, 사찰음식대향연(매년 10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축제를 열어 속세와의 거리를 좁히
고자 애쓰고 있다.

* 봉녕사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창룡대로 236-54 ☎ 031-256-4127)

* 봉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 돌조각
연꽃이 그대로 돌로 굳은 것 같다. 저기에 색채만 입히면 정말 연꽃이
따로 없을듯~


 

♠  봉녕사 둘러보기

▲  3층석탑과 석불 (어디서 많이 본 모습들인데..?)

불서각(쉼터)에서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직선 길에 임하면 독특한 모습의 3층석탑과 석불을
만나게 된다. 다들 근래에 심어진 것들이라 하얀 피부가 봄햇살에 비쳐 더욱 빛을 발하고 있
는데, 그들의 모습이 왠지 옛친구처럼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것일까? 아 기억이 난다. 바로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복사(神福寺)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불과 석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과 석가탑,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3층석탑 등을 모방한 것은
많이 봤지만 인지도도 별로 없는 신복사터 탑과 석불을 모방한 것은 처음 본다. 마치 그들에
게 낀 오랜 세월의 때를 빡빡 밀어내고 윤을 낸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사람이 강릉이 고향이
거나 강릉이 고향인 고참 승려의 부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  다보탑(多寶塔)

신복사지 석탑/석불 맞은편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축소/재현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곳
다보탑보다 작아서 그렇지 영락없이 닮은 꼴로 신라 때 불국사처럼 수행도량의 대표 성지(聖
地)로 성장하고 싶은 봉녕사의 염원을 다보탑의 축소판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듯 싶다.


▲  봉녕사에서 만난 백송(白松)

신복사지 탑과 다보탑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적광전 계단 밑에 뿌리를 내린 하얀 피부의 소
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천하의 희귀종으로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백송이다.
백송은 원래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그곳을 오가는 조선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이 여럿 남아있
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서쪽 통의동(通義洞)에 있는 백송으로 천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백송이었으나 1990년 9월 폭우로 장렬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아직 남아있
음) 그래서 헌법재판소 안에 자리한 재동(齋洞) 백송이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타이틀을 쥐
게 되었다.
그 외에 조계사(曹溪寺) 백송과 이천(利川) 백송, 예산 추사고택 백송이 있는데, 이들이 오래
된 백송의 전부이며, (원효로 백송, 내자동 백송, 회현동 백송, 보은 백송, 밀양 백송은 사망
) 그들의 후예가 창경궁(昌慶宮)과 재동 백송 주변, 그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 백송의 부흥
을 꿈꾼다.
봉녕사에 백송이 들어온 것은 1999년 4월 기증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조계사와 더불어 백송을
간직한 이 땅에 흔치 않은 절이 된 것이다.

  대적광전 계단 밑에 자리한 샘터
자연이 베푼 샘물이 4개의 동그란 석조와
3개의 대나무통을 거쳐 내려온다.

▲  청운당(淸雲堂)

▲  향하당(香霞堂)

대적광전 1단계 밑 좌우에는 비슷하게 생긴 청운당과 향하당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정면 7칸
, 측면 4칸의 2층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청운당은 1999년에 지어졌는데, 콘크리트로 구성된
1층은 큰방과 율원 지대방이 있고, 나무로 된 2층은 금강율원, 율주(律主) 승려방, 강사 승려
방이 있다.
그리고 청운당과 마주보고 있는 향하당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다각실이, 2층에는 선방(禪房)과 주지실, 객실 등이 있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적광전은 봉녕사의 법당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운당, 향하당과 달리 1층이라 그렇지 우람한 수준은 그들에 못지 않다.
원래 이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조그만 대웅전(大雄殿)이 있었으나 1997년 1월에 부셔버리고 지
금의 건물을 지어 1998년 7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때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불단(佛
壇)에는 1998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과 노사나불, 석가여래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비롯
해 후불탱인 삼신불탱과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는 팔십화엄변상도(八十
華嚴變相圖)가 장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오래된 돌덩어리
돌의 뿌연 피부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묵은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돌덩어리 위에는 원래
있어야 될 존재 대신 꽃이 조촐하게 둥지를 틀었다.

▲  봉녕사 향나무 - 수원시 보호수 22호

적광전 뜨락 좌측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나이가 무려 800년
을 헤아린다고 한다. 800년이면 창건시기인 1208년과도 거의 맞아떨어져 봉녕사의 13세기 창
건설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절의 오랜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8m, 둘레 2.7m 덩치로 자라났으며, 2007년에 수원시 보호수
로 지정되었다.

▲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팔십화엄변상도의 위엄

▲  대적광전 앞 (대적광전에서 주차장까지
곧게 뻗은 길)


▲  봉녕사 용화각(龍華閣)

적광전 좌측에는 용화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인 석조3존불의 거처이다.
용화각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거처로 보통 용화전(龍華殿)을 칭하기 마련이
다. 허나 봉녕사는 미륵보살에는 썩 의미를 두지 않는지 전(殿)보다 1단계 낮은 용화각을 칭
하고 있다. 

이곳에 깃든 석조3존불은 고려 중기 석불로 1995년에 대적광전 뒤쪽을 손질하며 터를 닦다가
발견되었다. 하여 봉녕사 초창기 시절의 석불이 분명하며, 향나무와 함께 13세기 창건설을 입
증하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허나 그런 고마운 존재에게 번듯한 건물도 지어주지 않고 야외에
두는 우를 범하다가 1998년에 이르러 용화각을 씌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건물 이름을
용화(龍華)로 한 것을 보면 그들을 미륵불로 삼은 모양이다.

봉녕사 석조삼존불
▲  봉녕사 석조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1호
(문화재청 사진)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약사보전을 우선 살펴본 다음 용화각을 보려고 했다. 약사보전을 살피는
동안 시간이 18시가 되면서 비구니들이 이들 건물에 들어가 저녁 예불을 벌였는데, 약사보전
은 예불 전에 싹 사진에 담았으나 용화각은 예불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예불을 방
해하면서까지 내 욕심을 채우기는 싫었기에 예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6시 30분이 넘어
도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이제 곧 땅꺼미의 세상이 될 터인데, 배도 고프고 더 기다리기
도 어정쩡하여 문틈으로 소심하게 석조3존불을 보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나를 구경하지 못한 석조3존불은 대적광전 뒤쪽 야산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불상(본존불)
은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있고, 좌우 석불은 서 있다. 본존불은 왼쪽 어깨에 법의(法衣)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머리와 목이 지나치게 커 신체비례가
떨어진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씻겨 내려가 눈과 코. 입은 거의 닳았으며, 희
미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다. 수인(手印)은 손가락을 곧게 펴 왼손은 경례를 하
듯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위에 두었다.
좌우 석불도 본존불처럼 비슷한 스타일로 법의를 걸쳤으며 모두 머리 부분이 깎여져 있다. 이
들 모두 귀는 짧고 목이 매우 두꺼운데, 앉고 서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비슷해 같
은 사람이 조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또는 후기)로 여겨지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하는 증거물
이자 수원 토박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봉녕사는 초창기와 조선 중/후기 부분
에 많은 공백이 있는데, 불상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발견된 것을 보면 봉녕사도 우울한 시절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  봉녕사 마무리

▲  약사보전(藥師寶殿)

대적광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약사보전이 있다. 1998년에 중건된
것으로 1979년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해 석가모니후불탱과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밖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은 '
석문의범(釋門儀範)','가
사이운(袈裟移運)'의 가영(歌詠)에서 옮겨온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약사보전 앞에 있는 봉황(鳳凰)의 위엄 (봉황 맞나?)
왼쪽 봉황은 가만히 서 있고, 오른쪽 봉황은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봉황이긴 해도 조금은 어설퍼보여 봉황 흉내를 낸 닭처럼 보인다.


▲  약사보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

▲  신중탱(神衆幀)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2호

약사보전 내부에 자리한 신중탱과 현왕탱은 '봉녕사 불화(佛畵)'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신중단(神衆壇)에 자리한 신중탱은 1891년에
현조(現照), 돈조(頓照)가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68cm, 세로 178cm의 크기이다.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신의 무리
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래 중앙에는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용왕(龍王), 금강상(金剛像) 등을 그렸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빼곡하게 그려져 조금은 정신
이 없어 보인다.


▲  현왕탱(賢王幀, 왼쪽 그림)과 아미타후불탱(오른쪽)

현왕탱은 1878년에 완선(完善)이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31cm, 세로 104cm 크기이다. 현왕
이란 저승의 제왕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의 다른 칭호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그에게 소환
되어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현왕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인물이 그려져 있
는데, 이 그림은 보통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건다.

약사
보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서양인 비구니가 들어와 불단과 불화 앞을 정리하고 향내
로 진동하는 건물 내부를 정화하고자 문을 활짝 열고 저녁예불을 준비한다. 사진을 찍으며 서
성이는 나를 그리 경계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이따가 예불을 할테니 같이 하자고 그런다.
그래서 자연히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는 멀리 동유럽 체코에서 왔다고 한다. 요즘 불교가 서구에서 적지않게 주목을 받고 있다보
니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승려의 길을 택하거나 불교를 익히고 있는데, 그도 불교에
심취해 꽃다운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출가를 했다. 자연히 우리나라 말도 꽤 능숙해 의사 소
통에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현왕탱과 신중탱을 찍고자 양해를 구하니 상관없다면서 마음껏
사진에 담으라고 그런다.
그렇게 시간은 18시가 되고 건물 안에 있던 아줌마 신도 1명과 저녁예불에 들어갔다. 나는 용
화각에 볼일이 있어 이따가 참석하겠다고 나왔는데, 용화각은 비구니 1명이 한참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다시 약사보전으로 들어와 체코 비구니가 주관하는 예불에 참
여했다. (대적광전은 2명이 예불을 주관했음)


▲  주차장 남쪽에 늘씬하게 솟은 숲길

저녁예불에서 절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나와서 용화각을 노렸으나 여전히 예불 중이었다. 그
렇게 시간은 18시 반이 넘어가고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은 꽁무니를 숨기면서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게다가 저녁시간이라 배도 무지 고프고, 봉녕사에 발을 들인지 어언 1시간 반이
넘어 더 이상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봉녕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사찰음식대향연이 열리는 10월에 다시 인연을 지어 사진에 담지 못한 석조3존불을 사진에 담
고 사찰 음식으로 배를 실컷 채워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수원 봉녕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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