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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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