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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명부전의 주인인 지장보살상은 돌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84.5cm이다. 그는 민머리의 성문비구형으로 상

체를 앞으로 조금 내밀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에 둥근 보주를 들고 있으며, 왼손은 편 상태로 무릎 위

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다.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석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인이다.

각진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콧등이 평평한 세모 코, 미소를 머금은 입, 길게 늘어진 두 귀를 지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입고, 대의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반달 모양으로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있

며, 왼쪽 어깨의 대의 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겹쳐져 있다. 이런 겹친 표현은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목불에서 편삼이 대의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과 차이가 난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복부

에서 앞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있고, 그 옆에 낮은 옷자락이 펼쳐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가린 승각기는 상단이 수평이고, 내부에 대각선으로 간략하게 접혀있다. 불상 뒷면은 목 주위에 대의

를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늘어져 있다.

지장보살 옆에 자리한 도명존자(높이 74cm), 무독귀왕(높이 81.5cm)은 지장보살과 크기가 비슷한데, 민머리의 도명존자

는 합장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문관복에 원류관을 쓰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다. 이들이 지장삼존상을 이

루고 있는데, 그 좌우로 명부(저승) 시왕을 배치했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우측에 홀수(1,3,5,7,9) 대왕을, 좌측에 짝수(
2,4,6,8,10) 대왕을 두었다.

 

2.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시왕상 뒤쪽에는 시왕도가 걸려있다. 시왕(10왕) 중 2왕 또는 3왕을 한 폭으로 구성한 4폭 형식으로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우측에 1/3왕도 1폭, 5/7/9왕도 1폭, 좌측에 2/4왕도 1폭, 6/8/10왕도 1폭 등이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나 일부가 누락되거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패널에 오려 붙일 때 내용과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즉 1/3왕과 2/4왕의 방제가 바뀌었고,

5왕인 염라대왕에는 7왕 태산대왕의 방제가 붙어있는 것이다.
5/7/9왕도와 6/8/10왕도의 화기는 배접할 때 일부 잘려나갔으나 '삼각산 흥천사 명부전에 봉안되었고~~ 상궁이 시주했다'

는 내용이 있고, '酉'가 확인되어 을유년인 1885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이곳 시왕도는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시왕도의 일원으로 보광사 시왕도(1872), 화계사 시왕도(1878), 봉

국사 시왕도(1898), 봉원사 시왕도(19세기 말) 등과 유사한 도상을 보인다. 화면 상단에는 시왕을 중심으로 심판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밑에는 지옥 장면이 펼쳐져 있다. 시왕이 있는 곳이 성 안쪽이고, 지옥형벌을 받는 곳이 성 바깥이라는 표현을

성벽과 구름 또는 산수, 성문 등으로 장면을 분할했으니 이는 조선 후기 시왕도에서 성행하던 기법이다.

상단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시왕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큼직하게 묘사되었으며, 시왕 주위의 난간과 계단 아래쪽에 권

속들이 시립하고 있다. 옥졸은 대부분 창과 같은 무기류를 들고 있으며, 판관은 복두를 쓰고 우산이나 부채 등, 동자는 벼루,
두루마리, 책, 천녀는 부채를 들고 있다. 하단은 거의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지옥의 형벌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3. 명부전 윗쪽에 걸린 괘불함

저 괘불함에 1832년에 제작된 비로자나삼신괘불도가 들어있다. 그는 서울에서도 제법 오래된 측에 속하는 괘불로 예전 석

가탄신일 때 친견한 적이 있는데, 그를 보고 싶다면 석가탄신일을 이용하기 바란다. (상황에 따라 오전에만 나올 수 있음)

 

4. 흥천사 극락보전

흥천사의 법당으로 1853년 계장이 중건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 집으로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조선

후기 불교 건축물로 가치가 높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저 안에 국가 보물로 지정된 금동천수관음보

살좌상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탱화들이 가득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5. 극락보전의 잘생긴 뒷모습

 

6.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벽화들
사천왕이 그려진 듯 싶다.

 

7. 극락보전의 화려한 닫집과 목조여래좌상,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목조보살좌상, 아미타불도

극락보전 불단에는 조그만 목조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들 뒤로 고색이 느껴지는 아미타불도가 후불탱으로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데, 그는 1867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상도 화승들
이 여럿 참여해 19세기 말 경상도 화풍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다.
왕실 상궁인 조씨와 안씨, 천씨가 고종 내외의 안녕과 무강을 빌고자 돈을 대어 만든 것으로 19세기 말 서울에서 많이 나타

나는 왕실과 절과의 후원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8. 극락보전 불단 식구들(목조보살좌상, 목조여래좌상,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왼쪽에 꽃을 든 목조보살좌상(관세음보살상)은 101.5cm의 보살상으로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이다. 머리에 쓴 보관

은 정면을 향해 날고 있는 2마리의 봉황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화문과 연화문 장식 등이 붙어 있고, 상단에 5개의 화염문과
측면 좌우로 관대가 매달려 있다. 보관 겉면에 몇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장식 일부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머리 정상에 높은 보계(상투)가 있고, 보관 밑 이마에 머리카락이 단정히 처리되어 있으며, 보살의 머리카락이 귀를 타고 내

려와 어깨 위에 3가닥으로 늘어져 있다. 얼굴은 조선 후기 제작된 불상에 비하여 역삼각형에 가까운 갸름하다. 머리는 어깨
에 비해 큰 편이나, 상반신이 길고 하반신이 넓어 안정된 신체 비율을 보인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편이고, 선정을 하듯이 가

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고, 코는 뾰족하고 콧등은 짧아 조선 후기에 제작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 된 인
상과 다르다. 미간 사이에는 얼굴에 비해 큰 백호가 있다.
양 손은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오른손과 어깨까지 치켜든 왼손에 연봉오리가 달린 줄기를 자연스

럽게 들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이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끝자락이

엉덩이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가슴을 덮은 승각기는 상단이 자연스럽게 접혀 있어 연판형으로 처리된 17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보살상과 차이가 난다.

이 보살상은 복장물도 없고, 조성 연대를 밝혀주는 발원문도 없어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원래 다른 곳에 있다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불단 가운데에 자리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56.3cm의 불상이다.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장대한 신체의 비례는 조선 전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덩치에 비해 얼굴은 작은 편이나 머리의 측면 폭은 넓다.
육계가 낮아 머리와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 머리에는 나발이 큼직하고 중앙에 반달형의 중간계주와 정상에 둥근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표현되었다. 개금이 두꺼워 이목구비의 세부를 알아보기 어려우나 미간의 백호에는 수정이 박혀있고 우뚝한 콧

날과 넓은 인중, 미소 띤 자비로운 입가에서 차분하고 단엄한 상호를 보인다.

대의를 입은 착의 형식은 가사를 2벌 겹쳐 입은 이른바 이중착의법(또는 변형 편단우견)으로 오른쪽 어깨에 부견의로 불리
는 옷이 걸쳐지고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늘어졌다. 앞가슴은 U자형 넓게 열려 안에 입은 내의(승각기)가 접혀

사선의 주름을 이루는 것이 잘 드러나고 가부좌한 두 다리를 덮은 옷자락은 오른발을 반쯤 덮고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면

양 무릎 위에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손은 통통하고 손가락 하나하나가 힘 있게 조각되었다.

수인은 설법인으로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가까이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
댈 듯 가까이 하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복장공이 있으나 현재 불상의 바닥에 인위적으로 뚫은 가로 지름 10.2cm, 세로 지름 11c
m의 원형 복장공이 뚫려있고 복장물은 없어진 상태다. 다만 지본묵서의 다라니 2건과 발원자명이 묵서된 목판(13cm x9.1
cm)이 남아있는데, 다라니 2건은 조성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내민 듯한 자세를 비롯해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장신형의 신체 비례와 체구에 비해 작은 얼굴과
이목구비의 표현, 상호 등 세부 표현에서 1606년에 조성된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유사함을 보인다. 특히

으로 표현된 내의가 비스듬히 물결처럼 휘어진 것과 살이 많아 두터운 손과 구부린 손가락의 형태는 동학사 아미타불상과
교될 만하고, 다리를 덮은 옷주름의 표현은 본존 동학사 석가여래좌상과 흡사하다. 하여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각승 석준각민 등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삼불좌상과 많이 유사한 흥천사
목조여래좌상도 이들 조각승 유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른쪽에 자리한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겠음~~

 

9. 서쪽에서 바라본 대방

 

 

 

10. 경내 서쪽 바위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맵시가 고운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이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흥천사 경내를 굽어본다. 그 뒤쪽에는 바위가 있는데, 바

위 피부에 감실을 파서 산신과 호랑이를 두었으며, 유리로 감실을 봉해 답답하게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11. 흥천사 용화전

1967년에 지어진 것으로 미륵불의 거처이다. 원래는 현판이 있는 가운데 칸만 있었으나 나중에 좌우로 1칸씩 넓혔다.

 

12. 용화전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과 관세음보살상(오른쪽), 여래연지내영도(왼쪽)

 

13. 금동 피부를 지닌 용화전 관세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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