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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풍암정, 충효동 지역, 광주호 주변)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옛길 3구간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무등산 옛길 3구간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풍암정

풍암정

 



 

다사다난으로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또다시 밝았다. 새해만 되면 심리
상 긍정적인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제발 만사가 형통(亨通)하기를 염원하며
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불끈 솟는 나의 역마살 기운을 풀고자 예전부터 목말라했던 무등
산의 뒷통수(광주 금곡동, 충효동 지역)를 새해 첫 답사지로 정했다.

그나마 덜 추운 날을 가려 길을 나섰지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1월)이라 추운 것은
여전했다. 아침 일찍 매서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영등포역으로 넘어가 광주로 가는 누리
로<무궁화호 열차와 동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견고한 무쇠덩어리 열차
도 나처럼 추운 날씨가 싫었는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불이 나게 바퀴를 굴려 4시간 만에
광주(光州) 도심에 자리한 광주역에 도착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광주역을 나와 역 동남쪽 정류장에서 무등산(無等山)의 품
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덕흥동↔원효사)을 탔다. 버스 번호인 '1187
'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의 키 높이로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산수5거리를 두루 지나 광주에서 제일 험한 고개로 꼽히는 잣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
를 힘겹게 넘으면 대도시 광주의 모습 대신 무등산에 묻힌 산골 풍경이 싱그럽게 펼쳐져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2차선 도로(무등로)를 따라 옛 무진주(武珍州)의 성곽 유적과 은빛물
결이 출렁이는 제4수원지, 충민사(忠愍祠), 충장사(忠壯祠) 등을 차례로 지나 원효사(元
曉寺) 직전인 풍암정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풍암정 정류장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정류장 표시판이 전부인 완전한 산골
의 한복판이다. 이거 어디로 가야되나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에 무등산옛길 3구간을 알리
는 이정표가 반갑게 손짓을 보낸다.



 

♠  무등산 옛길 3구간과 풍암정

▲  사촌 김윤제 재실(齋室) 입구 비석

무등산 옛길은 광주광역시가 무등산에 닦은 도보길로 무등산 북쪽 자락의 여러 길을 잇고 엮
어서 '무등산 옛길'이란 이름으로 천하에 내놓았다.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3구
간(장원3거리~환벽당, 11.3km)의 신세를 잠깐 졌다. 3구간은 중간에 임진왜란 시절 의병을 일
으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소소한 흔적이 깃든 무등산 의병길과도 만난다.

무등산 옛길로 들어서니 사촌 김윤제의 재실을 알리는 빛바랜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을 받
쳐든 네모난 기단석(基壇石)에는 푸른 이끼로 가득해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알려주는데, 인적
도 없는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숲속에 묻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를 만나게 된다.
그저 나무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런 외딴 곳에 기와집이 묻혀 있으니 마치 전설에 나오는 귀
신의 집이나 폐가를 만난 기분이다.
허나 그 집은 귀신 집도, 버려진 집도 아니며 김윤제의 후손(광산김씨)이 머무는 엄연한 살아
있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귀후재

귀후재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그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스승
으로 충효동 지역에 살면서 이른바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크게 일군 사람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호 남쪽에 사촌의 별장이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어린 정철
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은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매년 음력 3월 3일, 후손들이 귀후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하지만 고색이 깃든 돌담 너머로 내부가 왠만큼 보이며 귀후재 본채는 근래 손질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빠져버렸으나 돌담과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  고색이 깃든 귀후재 대문
지붕은 새로 갈았지만 그 외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이다.

▲  무등산 옛길 3구간 (귀후재 주변)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깔려 산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무등산에서 가장 예민한 곳, 무등산 지진관측소

귀후재를 지나 편백림으로 들어서면 원효계곡 상류에서 내려온 무등산 의병길(제철유적지~치
마바위~풍암제, 3.5km)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느긋한 숲길의 연속으로 편백림을 지나면 기
상청에서 설치한 무등산 지진관측소가 왼쪽(북쪽)에 나타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이 땅에서 지진 관측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굴을 파고 '초광대역지진계
' 등 여러 관측 시설을 닦았는데, 이곳이 얼마나 예민한 곳인지 지구 반대편의 지진도 잡아내
며, 사람의 발소리까지 실시간 관측되어 기상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 (관측소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겨울에 잠긴 무등산 옛길 3구간(무등산 의병길) - 풍암정3거리 부근

▲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대나무 길

풍암정3거리(풍암정 입구)에서 잠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오른쪽(남쪽
)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는 원효계곡의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 풍암정이 있는데, 무
등산 옛길 3구간이나 무등산 의병길에 발을 들였다면 풍암정은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풍암정 옆구리로 흘러가는 청정한 원효계곡

▲  풍암정 앞 징검다리

속세에서 풍암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원효계곡을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큼지막한 돌
이 잘 놓여져 있어 통행에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수심도 얕아 설령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크
게 걱정할 것은 없다.
풍암정 입구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은 풍암정을 거쳐 풍암제 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무등
산 의병길은 좋은 길을 계속 고집하며 풍암제까지 곧게 펼쳐진다.


▲  계곡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楓巖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5호

풍암정은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좌/우 2칸, 총 4칸
의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두텁게 기단(基壇)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 기둥
을 세우고 정자 중앙에는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 한복판에는 1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을 두고 북쪽에 문을 내었으며, 그 주변은 모
두 판자마루로 둘러 여름 별장으로는 아주 좋게 다져 놓았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닦았다.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축소판처럼 탐이 나는 풍경의 풍암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김덕보
(金德普, 1571~1627)가 지었다. 그의 호는 풍암(楓巖), 자는 자룡(子龍)으로 그에게는 애국심
이 매우 높은 형이 둘이나 있었으니 큰 형은 김덕홍(金德弘), 작은 형은 그 유명한 광주 출신
의병장인 김덕령이다.

김덕홍은 1592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나 금산(錦山
) 전투에서 고경명의 어리석음으로 크게 패하면서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2째 형인 김덕령은 직접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몽학(李夢鶴)
의 난(1596년)까지 진압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선조(宣祖) 임금과 그 패거리들이 역적으로 몰
아세우면서 혹독한 고문 휴유증으로 29세의 한참 나이로 옥사(獄死)하고 만다.

큰 형은 전쟁에서 죽고 작은 형은 전공이 큼에도 권력층의 농간으로 맥없이 져버리니 김덕보
의 충격은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썩어빠진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은둔생활에 들어
갔다.

▲  옆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사(楓巖精舍) 현판

뒤늦게 형들의 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달래며 달콤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모두 쿨하게 거
절했다. ('장릉참봉'을 잠시 맡은 것이 전부임) 그리고 고향(충효동) 부근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란 뜻에서 풍암정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 '풍암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내부에는 1614년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와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 등이 쓴 현판이 있으며, 고경명의 '차풍암정액(次楓巖亭額)'이란 시 현판이 있는데, 1614년
이전부터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1590년대)이나 1610년대 초반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  풍암정 옆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들
바위들이 푸른 이끼옷을 걸치며 풍암정의 경치를 한껏 수식해준다.

▲  풍암정의 빛바랜 일기장, 1614년에 정홍명이 쓴 풍암기

풍암정은 '풍암정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김덕보와 친분이 있는 문인(이안눌, 안방준 등
)들이 놀러와 시문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마루가 닳도록 찾아왔다. 현재
김덕보의 후손(광산김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마루에는 앉거나 들어갈 수 있으나 방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 풍암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718 (풍암제길 117)


▲  풍암정의 탄생 시기를 한층 올려주고 있는 고경명의
차풍암정액 현판 (오른쪽 현판)

▲  곧게 뻗은 그림 같은 길, 무등산 의병길 (풍암정3거리 동쪽)

한여름이나 늦봄에 왔더라면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등산 산바람
과 원효계곡 물바람이 사이좋게 무더위를 단죄하여 낮잠 맛이 꿀맛일테니 말이다. 허나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왔으니 마루에서 괜히 잠을 청했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풍암정을 둘러보고 풍암정3거리로 나와 잠시 잊었던 무등산의병길을 마저 걸었다. 겨
울에 잠긴 숲길을 걷다보면 '풍암제'란 너른 호수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풍암정에게 빼앗겼
던 내 마음을 다시금 앗아가는데, 이 호수는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라 아주 청정한 빛깔을
띄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꽁꽁 묶여 있어 호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란 금지된 호수, 풍암제(楓巖堤)

▲  풍암제에서 충효동 도요지로 인도하는 길 (풍암제길)

풍암제를 지나면 무등산국립공원 경계선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 안내문의 서쪽(풍암정
방향)이 무등산국립공원 영역, 동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공간이다.



 

♠  무등산의 흙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빚었던 옛 가마터 유적
광주 충효동 요지(忠孝洞 窯址) - 사적 141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일원인 무등산 분청사기(粉靑沙器)전시실

풍암제에서 동쪽(충효동 방면)으로 10분 정도를 가면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이 마중을 나온다
. 이곳은 충효동 가마터(4기)와 주변 가마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와 백자를 전시하고 이들 유
적을 정리한 곳으로 가마터 자리 위에 터를 다져 199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실
옆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가 보호각에 감싸여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서 많은 분청사기와 백자
들이 무등산이 베푼 양질의 흙을 먹고 태어났다.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충효동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광주의 자
기소(瓷器所) 1곳이 고을 동쪽 이점(梨岾)에 있음>과 출토 유물의 연도를 통해 늦어도 1430년
정도, 빠르면 고려 후기(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충효동 2호 가마의 구조는 길이 20.6m, 폭 1.3m의 땅굴 모습으로 사람이 왕래하는 출입시설과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시설를 갖추고 있으며, 진흙을 중심으로 돌을 섞어서 쌓은 형
태이다. 특히 아궁이(번조실)부터 굴뚝 부분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가마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여기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생산되었는데<상감청자(象嵌靑瓷)도 일부 만들어짐> 처음에는 분
청사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작은 것이 주류를 이루던 백자와 달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제기 등 다양하며, 국화와 나비, 모란
, 물고기, 게, 구름 등이 분청사기 피부에 새겨졌다.
이후 백자까지 손을 대었는데, 분청사기는 박지(剝地)와 조화(彫和) 등 장식과 제작이 간단하
고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쇠퇴를 하게 되었고, 반면 백자는 질이 좋은
탓에 크게 흥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여 분청사기 가마에서 백자 전문 가마로 완전히 바
뀌게 된다. (분청사기는 대체로 16세기부터 생산이 중단됨)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주로 납품되었으며, 제작지를 알리는 내용과 제작
자의 이름, 제작시기, 수량, 관용(官用) 임을 알리는 '공(公)' 등 명문이 새겨진 백자와 분청
사기가 많이 나왔다. <'어존'이라 쓰인 한글 명문도 발견됨>

그렇게나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는 16세기 초 정도에 돌연 폐업을 하여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른 가마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흙이 고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시절부터 광주가마, 무등산가마, 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막연히 명품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허나 딱히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국립중앙박
물관이 가마터의 퇴적층(堆積層) 일부를 들추면서 이곳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2차례에 발굴을 벌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고 높이 3m에 퇴적
층위가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그 4기 중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이 바로 이곳 2호 가마로 그 터를 손질해 특별히 보호각을 씌
우고 속세에 개방했다. 그리고 분청사기 전시실 자리에서 발견된 가마터 등 나머지 3기는 보
존을 위해 땅에 고이 묻었다. (이들 가마터 4기는 '충효동 요지'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충효동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마터가 있으며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효동에서 가까운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역(광주호 주변)에도 가마터가 여럿
전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거대한 분청사기, 백자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허나 이들 가마들은 16세기 이후 거의 버려지면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괴롭
힘 속에 모두 녹아버렸고 그나마 남은 흔적도 속세의 무관심과 도굴, 천박한 개발의 칼질 등
으로 대부분 목이 떨어졌다.


▲  온전하게 남은 분청사기의 고운 맵시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잠깐 유행했던 도기, 자기 양식이다.

▲  분청사기 접시와 깨진 대접들

▲  분청사기 벼루와 하얀 뚜껑

분청사기 전시실은 독립적인 박물관이 아닌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소속의 전시실이다. <광주역
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관으로 보면 됨>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은 편이며, 충효동에서 발견된
유물 상당수는 역사민속박물관이나 광주국립박물관에 가 있고 이곳과 주변에서 나온 도기, 자
기와 복제품 등 200여 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장대한 세월에 의해 헝클어져 겨우 조각만 남은 분청사기 파편

▲  담양군 경상리 저수지 상류에서 발견된 경상리 유적 토기들

▲  화암마을 백자가마터에서 수습된 백자 파편들

▲  분청사기 접시와 제기(祭器, 가운데), 그리고 백자 접시 파편

▲  백자 잔(위쪽)과 깨진 대접

▲  재현된 충효동 가마의 왕년의 모습 (오른쪽이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고 있는 누런 보호각

분청사기 전시실 옆구리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은 가마터 보호각이 있다. 지금이야 누런
피부의 가마터만 남아 실감도 덜하고 여기서 더 이상 도자기를 빚을 일도 없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예사 가마터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가 한낱 황량한 가마터
가 되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상할 따름이다.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과 아궁이 흔적
굴뚝과 아궁이 위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워 땅굴 방식으로 그 속살을 가렸다.

▲  옆에서 바라본 충효동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 아궁이와 누런 퇴적층위

▲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바라본 충효동, 금곡동 지역
오늘도 무등산의 뒷통수 지역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담양군 땅이었음)


*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57 (풍암제길 14,
  ☎ 062-613-5379)



 

♠  충효동 광주호 주변 명소들

▲  충효동 왕버들 군(群) - 천연기념물 539호

충효동 요지를 둘러보고 바로 북쪽에 있는 금곡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 환벽당과 취가정, 왕
버들이 있는 충효동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거리도 2km에 이르고 뚜벅이 길이 닦여져 있지 않
은 2차선 길(송강로)을 따라가야 되므로 차량의 눈치와 위협을 적지 않게 받아야 된다. 이 길
말고도 금곡에서 평촌 방면 매봉로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차량의
왕래는 적지만 역시나 2km 정도를 걸어야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문명의 이기(利己)인 시내버스를 타면 되지만 배차간격이
무려 50~60분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하여 스마트폰 버스어플을 검색해 15분 이내에 차가
오면 충효동으로 넘어가고, 그 이상을 넘거나 시내 방향 버스가 15분 이내에 오면 인연이 아
니라 여기고 쿨하게 광주 시내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6~7분 뒤에 충효동 방향 버스가 온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시간
만큼 길고 지루한 것은 없다. 초고속으로 흘러만 가는 시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
면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거나, 차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
다리거나 등)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테니까. 허나 그 역시 부질없는
시간 장난에 불과하다.
과연 어플의 안내대로 광주시내버스 187번(충효187번, 장등동↔연천리)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를 타니 불과 5분만에 충효동 동쪽 끝인 환벽당에 이르렀는데, 도보로 갔더라면 아무
리 빨라도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조선 중기 가사문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환벽당과 식영정(息影亭), 취가정(醉歌
亭)을 둘러보고 송강로 주변에 주렁주렁 자리한 여러 명소(왕버들군, 정려비각, 광주호 호수
생태원)를 살펴보았다. 환벽당과 식영정, 취가정은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왕버들군과 정려비각, 광주호만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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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포로가 되버린 채, 개골(皆骨)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
왕버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늦봄이나 여름,
가을에 와야 된다. 겨울에는 죄다 처량한
개골 상태라 거의 거기서 거기 같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진입광장 맞은편에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왕버들 3형제가 있다. 이들은 충
효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추정 나이는 약 430~450년에 이르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3m,
둘레 8.9m, 작은 것은 높이 8m, 둘레 7.2m로 키와 둘레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덩치는 다 고
만고만하다.
이들 나무는 '김덕령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김덕령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서 심었다고 전한
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탄생 기념으로 심은 것은 아니며 마을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심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한 식
구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다들 사라지고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자리
를 지킨다.

* 충효동 왕버들군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  충효동 정려비각(旌閭碑閣) - 광주 지방기념물 4호

왕버들 곁에는 기와집으로 된 정려비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 출신인 김덕령과 그의 부인(흥양
이씨), 그의 형제(김덕홍, 김덕보)의 충(忠), 열(列), 효(孝)를 골고루 기리고자 1789년에 정
조 임금이 세운 것으로 정려비(旌閭碑)의 높이는 220cm, 너비 68cm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碑閣) 안에 고이 깃들여져
있는데, 비각 주변에 기와 돌담을 두르고 북쪽으로 문을 냈다.

김덕령과 김덕홍은 앞서 풍암정에서 언급한 그대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고, 김덕보
는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어머니를 잘 봉양했으며, 흥양이씨 부인은 정유재란(1597)때 담
양 추월산(秋月山)으로 피신을 갔으나 왜군의 추격으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래서 충, 효, 열 3가지가 성립되어 뒤늦게나마 정려비를 받은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효,
열을 찬양하며 충효리의 유래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정려비에서 충효동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
다. 비각 안에는 정려비 외에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 충효동 정려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40 (충효샘길 7)


▲  정려비각에 소중히 담긴 김덕령 일가 정려비

▲  정려비의 빛바랜 일기장, 상량문

▲  왕버들 옆에 자리한 상징정원

상징정원은 광주의 대표 명물인 무등산 수박을 상징화하여 닦은 조촐한 공간이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무등산 수박쉼터와 수박을 형상화한 무등산 수박 토피어리, 무등산 수박밭의 고랑
을 묘사한 무등산 수박밭,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꽃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존재 이유는
무등산 수박 찬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주제도 '꽃으로 수박파티'임)


▲  무덤처럼 생긴 충효동 조산(造山) -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
충효동 사람들은 이 조산을 '말무덤'이라 부른다. 비보풍수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달래고자 인공적으로 쌓은 것으로 건너편 입석(조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  푸른 물결 글썽이는 광주호와 그 옆구리에 닦여진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와 전남 담양(潭陽) 경계에 자리한 광주호는 영산강(榮山江)의 주요 지류인 고서천(古西
川)에 광주댐을 닦으면서 조성된 너른 호수이다. 1974년 공사를 시작해 1976년 완성을 보았는
데, 무등산과 하늘이 거울로 삼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변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 충효동 왕버들 등 쟁쟁한 명소도 즐비해 광주 외곽의 주요 명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주호 남쪽 충효동에는 2006년 3월에 닦여진 호수생태원이 있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
찰원<수생식물원, 야생초화원, 암석원, 채원(菜園), 생태연못>, 습지보전지, 버드나무 군락지
, 칠성바위, 자미탄, 전망대, 관찰대, 쉼터 등이 있으며 철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이 잠시 들
리거나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도 훔쳐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이곳 생태환경이 너무 좋다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다. 하
여 일몰 이후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호수생태원 보호 목적도 있음)


▲  호수생태원 탐방로
탐방로 외에는 자연의 공간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겨울 제국의 심술로 누렇게 뜬 호수생태원

▲  호수생태원에서 바라본 담양 쪽 (소쇄원, 식영정 방면)

호수생태원은 햇님 퇴근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간단히 1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를 지었다. 광
주에 발을 내린 것이 정말 1시간 전 같은데 세상은 벌써 타들어가 검은 도화지로 배경이 바뀌
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 제국의 기운도 높아지고 출사도 어려우니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둘러보았으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마침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이 임박하여 광주호 호수생태원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기
서 버스 1대를 놓치면 50~60분을 꼼짝없이 강제 대기를 해야 된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추위를
견디며 1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발을 재촉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광주시내버스 187번이 딱 맞춰서 반갑게 다가선다. 하여 충효동과 무등산에 대한 미련을 흔쾌
히 버리고 차에 올라서니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고적한 충효동에 남기며 광주 시내로 넘
어갔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부터 벌인 광주 무등산 뒷통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광주호호수 생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39-1 (충효샘길7 ☎ 062-613-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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