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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광주 환벽당

▲  환벽당

광주 취가정 담양 식영정

▲  취가정

▲  식영정

 



 

겨울 제국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새해의 첫 무렵, 덜 추운 날을 가려서 호남 가사문학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누정(樓亭) 문화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 환벽당과 취가정, 식영정
을 찾았다.
이들은 증암천(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光州) 땅인 서쪽에 환벽당과 취가정, 그리고
전남 담양(潭陽) 땅인 동쪽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행정구역만 무심히 다를 뿐, 서
로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다.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는 충효동 지역은 원래 담양 땅이었
음) 게다가 서로 거리도 가까워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좋다. <소쇄원(瀟灑園)도 가
까운 곳에 있음>



 

♠  사촌 김윤제의 별서로 송강 정철이 그의 후광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던 곳
광주 환벽당(環碧堂)- 국가 명승 107호

▲  충효교에서 환벽당, 취가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벽당길)

광주호의 동쪽 끝이자 광주와 담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충효교 남쪽 언덕에 환벽당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환벽당을 품은 언덕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아주 그윽한데 창계천(증암천) 너머 식영
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옛 무덤처럼 동그랗고 두툼한 모습이다. 하여 혹시 고분(古
墳)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하였지만 생김새가 그러할 뿐, 그냥 자연산 언덕이다. 만약 그가
진짜로 고분이었다면 진작에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옛 무덤을 좋아하다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모양임;;)

충효교에서 환벽당 정문까지 창계천을 따라 담백한 운치를 지닌 오솔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다. 그 길을 거닐며 창계천을 살짝 훔쳐보면 반석(盤石)들이 펼쳐진 예사롭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곳이 '조대', 그 앞 창계천이 '용소'로 환벽당을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들이
다.


▲  식영정 앞 도로(887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환벽당 언덕
장대한 고분처럼 생긴 저 언덕 정상부에 환벽당이 살포시 안겨져 있다. 창계천
수면에 환벽당 언덕이 진하게 비춰지고 있어 마치 언덕 2개가 반대꼴의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 같다.

▲  창계천 조대(釣臺), 용소(龍沼)

용소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우연한 물놀이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
1572)를 만났던 현장이다.
정철은 서울 청운동(淸雲洞)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와 양재역(良
才驛) 벽서사건(1547년)에 나란히 연루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 정유침(鄭
惟沈)은 유배형을 당해 유배살이에 정신이 없었고 정철은 양육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꼬마 시절부터 유배살이의 혹독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다가 1551년 명종(明宗)이 원자(元子)를 얻은 기쁨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지긋지긋
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와 적적하게 살던 정철은 어느 여름 날, 순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친형을 만나고
자 길을 떠났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날씨도 무덥고, 마침 지나는 길에 풍경도 괜찮은 곳이 있
어서 피서본능에 따라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쳤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이곳 용소였다.
바로 그 시각, 용소 위쪽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용소
에서 용 1마리가 나타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청룡 1마리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함)
꿈에서 깨어나자 뭔가 찜찜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를 살펴보게 하니 마침 잘생긴 소년(정철)이
혼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꿈에 나타난 용이 아닌가 싶어 그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특함
에 흠뻑 반하여 순천(順天)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 머물러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가 17세가 되자 자기 외손녀까지 짝지어주어 외손녀사위로 삼았으며 그의 뒷바라지도
넉넉히 해주어 정철의 앞날을 닦아주었다.

정철은 그렇게 사촌의 흔쾌한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닦았고 27세에 과거에 급
제하면서 비로소 환벽당을 나오게 된다. 용소에서 잠시 물놀이를 한 인연 덕에 그의 인생을
크게 일으켜준 스승을 만났고 거기에 부인까지 얻었으며 조선 중기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크
게 달군 문학가로 이름까지 날렸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벼슬이야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처럼 요란하게 이
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용소와 접한 반석(盤石)은 조대라 불리는데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으로 정철을 비롯해 환
벽당을 다녀간 손님들도 낚시를 했다고 전하며 식영정 부근에서 용소까지 창계천 주변은 여름
마다 배롱나무(백일홍)가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姿媚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바로 위에서 바라본 조대와 용소
정철이 여기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흔적은 창밖에 이슬처럼
남아있지 않다. 몇 겁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조대, 그리고 큰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창계천에게 정철은 기억을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많은 인연의 하나일 뿐이다.

▲  늙은 쌍송(雙松)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철이란 탐이 나는 인재를 만난 기쁨이 실로 컸던 것이다.

▲  환벽당 돌담길 (쌍송 주변)
환벽당 주위로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둘러 바깥과의 경계를 그었다.

▲  활짝 열린 환벽당 정문(대문)

▲  환벽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닦여진 언덕 동쪽 부분


▲  수수한 모습의 환벽당

환벽당은 충효동(충효마을) 출신인 사촌 김윤제가 1540년대에 지은 별서(別墅, 별장)이다. 그
는 한참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후학을 길렀는
데, 그를 거쳐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이 있다.

별서의 이름인 환벽(環壁)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어준 것으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
른 듯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별서 주위로 소나무와 배롱나무, 왕벚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적당히 다듬은 호남의 대표적인 별서 원림(園林)이자 누정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환벽당' 시에 환벽당의 초창기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김창흡(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는 환벽당에 심어진 식물과 조경 수종이 나와있으
며,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환벽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부근에 면앙정을 짓고 머물렀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次韻
)하면서 식영정과 환벽당이 형제의 정자라고 했으며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두고 '한 동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원래 같
은 동네였음) 또한 벽간당(碧澗堂)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식영정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이자 광주호 주변의 대표 명소로 답사객의 발길이 꾸준
히 이어지고 있는데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 기
대승(奇大升) 등 16~17세기 사람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신 사납게 걸려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집은 부근 지실마을에 있었음)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
억령(林億齡) 등을 만나 그들에게도 학문과 가사문학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의 대표적
인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은 김윤제의 종손(宗孫)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을 깊게 받
았다.

이곳은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해오다가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鄭守環)이 매입해 그의 후손들(
연일 정씨)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환벽당 옆에 후손들이 사는 집이 있어 관리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다.
환벽당은 처음에 광주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13년에 부근 용소와 조대,
쌍송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명승으로 승진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광주 환벽당 일
원'
)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환벽당

▲  환벽당의 뒷모습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2칸과 마루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정
각(亭閣) 형태였으나 나중에 건물을 손질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네모난 기단
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올린 형태로 섬돌에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방과 마루
에서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는 안됨)

▲  글씨가 몸을 푸는 것 같은
환벽당 현판의 위엄

▲  활짝 열린 방문과 주인이 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  환벽당 연못과 김윤제 집이 있었던 너른 공터

환벽당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 밑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화계(花階)와 네모난 연못이 누워있다
. 보통 별서를 지으면 앞에 연못을 두어 경치를 돋구게 하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허나 연못
밑으로는 나무 몇 그루와 허전한 공터가 전부라 마치 별서를 짓다 만 것 같은데 그 공터에는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못은 본채의 후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본채는 어느 귀신이 떼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자연의 공간으로 남겨
두어 환벽당의 앞뜨락 같은 모습이 되었다.

* 환벽당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 (환벽당길 10)


▲  환벽당에 걸린 어느 검은 피부의 현판 (해석은 알아서)

▲  환벽당 돌담길 (쌍송 방향)

▲  환벽당 돌담길의 끝 부분 (취가정 방향)



 

♠  김덕령 장군의 원통한 넋을 기리고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정자
광주 취가정(醉歌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취가정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담백한 풍경의 환벽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향하는 '환벽당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취가정
을 품은 언덕이 나온다. 환벽당 돌계단에 비해 조금은 흥분이 덜한 돌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
끝자락에 조촐하게 생긴 취가정이 자리해 있다.

취가정은 김윤제의 종손으로 임진왜란 시절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김덕령(
金德齡, 1567~1596)의 넋을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것이다. 그를 기리고
자 세운 정자일 뿐, 정작 김덕령과 관련은 없으며, 충효동과 담양 가사문학면(예전 남면) 지
역에 흩어진 정자와 별서 가운데 제일 막내로 정자의 이름인 취가는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근처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풍암정, 소쇄원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이름인데 반해
이곳은 음주와 관련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취가정이란 이름은 김덕령이 남긴 취시가(醉時
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취시가 -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 아래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는 공훈 세우길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醉時歌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노래 아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어 명군 받들기 원하네


김덕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권필(權韠, 1569~1612)은 어느 날 꿈속에서 김덕령을 만났다.
참고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獄舍)를 당한 것을 호소
하며 취시가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들은 권필이 화답의 시를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
나라를 나와서 그의 시를 활자로 남겼고 그 시의 이름을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취시가 앞에는 서문(序文)이 쓰여 있는데,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으니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로 나도 2~3번 읽어보았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 너무 서글퍼서 그를 위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즉 이 시는 권필이 김덕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꿈나라
에서 시를 접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이 남긴 시집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봐야 되며 그것을
마치 꿈나라에서 받은 양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연이야 어쨌든 권필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강제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로하고자 다음의 시를 덧붙여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分明一曲醉時歌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  취가정의 앞 모습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1칸과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6.25때 파
괴된 것을 1955년에 중건하여 고색의 기운은 덜하며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가 쓴 취가정
현판과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취가정기, 김만식과 최수화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취가정 주위로 굴뚝과 취시가를 머금은 표석, 후손들의 집이 있으며, 동쪽 창계천 너머로 식
영정과 소쇄원 주변이 바라보인다. (방과 마루는 들어갈 수 있으며 섬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
가면됨, 허나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 행위는 자제 바람)

▲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의 위엄

▲  취가정 상량문(上樑文)


▲  김덕령의 취시가와 권필의 화답시를 머금은 현판

▲  적막에 사로 잠긴 취가정 주변
(왼쪽은 굴뚝, 오른쪽은 취시가를 머금은 비석)

▲  취가정 옆구리에 짧게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취가정의 주변 풍경을 화사하게 돋군다.

▲  겨울 제국에게 강제로 봉인을 당한 채, 소쩍새의 울음을 기다리는
충효동 논두렁 - 논두렁 너머로 무등산(無等山)이 바라보인다.


취가정을 둘러보니 벌써 17시 직전이다. 햇님은 무거워진 고개를 자꾸 꺾으려고 하고 달은 그
틈을 타 검은색 물감을 마구 뿌리며 나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허나 그런 것으로 나는 쉽게 무
너지지 않는다.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부근에 있는 식영정을 그날의 마지막 스페셜
메뉴로 정하고 충효교로 나와 다리를 건너 담양 땅으로 넘어갔다.

담양 관할로 넘어가면 바로 한국가사문학관인데 그 서북쪽 언덕에 환벽당과 더불어 호남 지역
가사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식영정이 뉘어져 있다.

* 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6-1 (환벽당길 42-2)



 

♠  석천 임억령의 별서이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
담양 식영정(息影亭) - 국가 명승 57호

▲  식영정과 성산별곡 시비

환벽당과 쌍벽이자 콤비를 이루고 있는 식영정은 1560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
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머물 서하당(棲霞堂)도 옆에 같이 지었다.
그는 정철의 처외재당숙(장모의 6촌 형제)으로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식영정을 거쳐갔
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가르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그 연
유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란 부르기도 했음>
그들은 성산(식영정 주변)의 경치 좋은 명소 20곳을 골라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二十詠)'을 지었는데 정철은 이곳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해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내놓으면서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
어진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아주 문학적인 뜻으로 정철이 자주 놀러온 곳
이다. 환벽당,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철과 깊게 관련된 곳이라 하여 '정송강유적'이라 부
르기도 하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가
운데가 아닌 귀퉁이에 두었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이곳은 전남 지방기념물 1-1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담양 식영정 일원'이란 이
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승급되었다.

식영정 옆 창계천 주변에는 노자암(鸕鹚巖),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자미탄, 견로
암 등의 명소가 있었으나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버렸으며 서하당 등 식영정 주변의 건물도 모두 사라져 식영정 홀로 자리를 지켰다.
예전 2000년에 왔을 때는 식영정과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용당, 장서각 등이 전부였는데 그
새 서하당 등을 다시 지어 주변이 조금은 채워졌다.


▲  부용당(芙蓉堂)과 연지(蓮池)
식영정에 이런 존재가 있었나 싶어 살펴보니 복원된 것이 아닌 단순히 식영정을
수식하고자 1972년에 지은 것들이다. 2칸짜리 부용당이 연못에 두 발을
담구며 혹독한 겨울살이에 지친 몸을 달랜다.

▲  서하당
1560년에 김성원이 자신의 거처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오다가 근래에 복원되어
새롭게 솟아났다.

▲  장서각(藏書閣)과 고직사(庫直舍)
송강집(松江集) 목판을 보존하고자
1973년에 세웠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석
식영정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현장이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성산사 정문(삼문)

▲  성산사(星山祠)

성산사는 석천 임억령, 서창 조흡, 정철의 5대손으로 1721년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
하(簫隱 鄭敏河), 소은의 아들인 계당 정근(溪堂 鄭根) 등 7명을 봉안한 사당이다. 수재(水災
)로 파괴된 것을 1861년 정조원(鄭祚源)이 송씨에게서 환벽당을 다시 인수하면서 그 주변에
복원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2005년 담양군에서
원래 자리였던 식영정 뒤쪽에 복원했다.

성산사 뒤에는 대나무가 두텁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사각사각 풍월을 선사하며 속세에
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청각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숲 사이로 좁게 내려오는 계곡에서는 청
량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겨울이라 그렇지 더울 때는 밀양(密
陽) 얼음골(☞ 관련글 보기)의 차디찬 바람에 못지않다.


▲  성산사를 감싸고 있는 짙은 대나무숲

▲  성산사에서 식영정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  멋지게 잘 늙은 식영정
식영정 툇마루와 방은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비어있는 정자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지체 높은 몸이니 그냥 구경만 하거나 툇마루에
몸을 기대어 쉬기만 하자~~!

▲  글씨가 율동을 부리는 듯한 식영정 현판의 위엄
'정'자는 연이 하늘로 오르거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 같고 '식'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비행물체를 그린 것 같다.

▲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식영정의 뒷모습
요즘도 장작을 떼는지 아궁이 주변 피부가 다소 시커멓다.

▲  식영정 안내문에서 식영정으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길

▲  고직사 밑에 있는 옛 건물터
고직사와 도로 사이에 조금 움푹 들어간 희미한 흔적이 있다. 식영정을
수식하던 건물터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식영정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이다. 더 둘러보고 싶어도 검은 기운이 자욱해지고 찬바
람까지 마치 칼처럼 찔러대니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그날 목적한 것을 모두 보았
고 거기에 식영정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여기서 길을 접어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눈과 다리가
쉴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보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에 찾아간 광주 충효동, 가사문화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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