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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늦가을 산책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홍지문과 탕춘대성

▲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세검정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세검정

 



 

종로구 북부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포
근히 감싸인 산골 분지이다. 전원(田園) 분위기가 진하여 여기가 과연 서울 한복판이 맞
는지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늙은 경승지(세검정, 홍지문. 백
석동천 등)는 물론 미술관 등의 문화공간(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등)도 풍
부하여 나들이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한참 전인 20대의 한복판에 부암동과 백석동천(백사실계곡)에 퐁
당퐁당 빠져버렸고, 이후 1년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늦가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던 11월 한복판에
어느 볕 좋은 날, 늦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자연산 망막에 하나라도 더 담고자 간
만에 부암동을 찾았다. 이때가 지나면 가을 단풍은 90% 이상 지게 된다. 하여 후회가 없
도록 열심히 늦가을의 바퀴자국을 남겨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늦가을 풍경은 4계절 가운데 으뜸이다.



 

♠  서인 패거리들이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도성 밖
경승지이자 서울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던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동3거리에서 상명대,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큰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弘濟
川)을 바라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나온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
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前
身)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
)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
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
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
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
생긴 바위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
러다보니 도성 밖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와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구한말(舊韓末)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나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
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
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
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
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
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
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
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
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
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
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
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
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  세검정 동쪽 산책로(세검정성당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 너머로 상명대와 탕춘대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세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한옥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세검정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너편으
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집이 석파정별당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馨, 1903~1981)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6.25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
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냈으
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글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전의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닌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온 것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동(玉仁洞) 집을 1958년에 매입하여 가져왔다. 이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이자 바로 근처에 자리한 석파정(石坡亭)에서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과 덕수궁(경운궁)에서도 돌담과 한옥을 사들였으니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았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해방되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
소로 성장하여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나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답사와 출사를 한답시고 별당 등 건물 내부로 마구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석파랑 본채 북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서로 소유자가 달라서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
이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은 석파랑 소유>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석파
랑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 옆구리에는 홍지동 산신당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당
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이곳에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진쟁이와 답사객들에게 석파정 별당과 뜨락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다. 허나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던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
양한 석물, 꽃,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랑 본채 뒤쪽에 숨겨진 붉은 장독대들
저들 속살에는 무엇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한번 들춰보고 싶다.
한정식당이니 고추장이나 김치, 간장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  석파랑 뒤쪽에 자리한 홍지동(弘智洞) 산신당

석파랑 뒤쪽이자 스톤힐 옆에는 붉은 피부 벽에 푸른 기와를 지닌 조그만 집이 있다. 얼핏보
면 창고처럼 보여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 위에 걸린 '산신당' 현판이
보여주듯 홍지동의 안녕을 오랫동안 지켜주던 산신당이다.

세검정 주변 동네(신영동, 홍지동, 부암동)에는 4개의 산신당이 전하고 있다. 그중 석파랑 뒤
쪽 산신당은 홍지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8월 1일 동네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나머지 산신당도 같은 날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당집 안에는 산신 부
부가 그려진 그림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로지 제사날과 일부 날(청소하는 날 정도)에만 잠깐
씩 열어두고 있어 평소에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산신당 주변은 나무와 풀만 있었으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랑이 산신당 바로 옆에 스
톤힐을 지으면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한때는 동네 성지(聖地)나 다름 없던 산신당의 존
재감이 크게 하락한 지금의 세태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허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
다고 스톤힐 덕분에 계단이 닦이면서 접근성 하나는 좋아졌다.

* 석파정별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2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
  2500)


▲  세월 속으로 사라진 부침바위를 추억하는 표석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한때 북새통을 이루
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 땅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
시화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으
니 실로 안따깝기 그지없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
(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
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 신완(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
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
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
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
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
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
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
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의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
에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그래서 홍
지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
대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  홍지문의 당당한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탕춘대능
선에 있는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
데, 200년 이상 별탈 없이 살아왔으나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
하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겨우 남아오다가 1977년
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향 성곽 300m
정도가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
고 문 남쪽으로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잠깐 단절되어 있으나 그 길을 넘으면 성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변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
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의 뒷모습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  오간대수문 북쪽 끝 홍예문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두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근래 홍제천 산책로
가 닦이면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보니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
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를 가면 홍제
천변 커다란 바위에 깃들여진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普渡
閣 白佛)'로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
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인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작은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
운 현장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자리
한다.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늙은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
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한 고려 후기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
(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
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고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완전히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보도교에서 바라본 보도각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보도교 끝에 자리한 맞배지붕 일주문


백불의 높이는 5m 정도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동전은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
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앞에는 나무데크로 지어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
어지면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칠했고,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바뀌었음) 오른손에 걸린 팔
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
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
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 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다소
맞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
을 접수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
하며 소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

백불 동쪽에는 그를 후광으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히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남해 보리
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부심
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을 뜻하는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
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 일대에 있었음)가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 이성계의 도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
(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인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닦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붙어있고 뒤쪽(북쪽)과 서쪽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옥천암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백불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인연을 지었던 곳이고 경내는 백불 외에는 딱히 나를 흥분시킬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끝으로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늦가을 만행(漫行)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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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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