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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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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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