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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하마을, 봉화산


'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 초여름 나들이 '

봉하마을 노무현 전대통령 생가
▲  노무현 대통령 생가

봉화산 마애여래좌상

봉하마을 노무현대통령 묘역

▲  봉화산 마애여래좌상

▲  노무현 대통령 묘역

 


김해 봉하마을은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인생의 말년을 보내
고 또한 묻힌 그의 영원한 고향 마을이다. 그를 좋아하고 추억하는 사람들로 봉하마을
이 매일 북적거린다는 풍문을 전해 듣고 비록 그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으나 꼭 1번은
가보고 싶었다.
하여 그곳을 오랫동안 목말라 하다가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시작되던 6월의 한복
판에 머나먼 그곳으로 훌쩍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부산으로 가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동대구역
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진주(晋州)로 가는 ITX-새마을호 열차에 나
를 담아 진영역으로 내려 보냈다.

진영역에서 봉하마을까지는 2km 정도로 매우 가깝다. 게다가 도보길도 닦여져 있어 그
길을 따라가면 30여 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허나 날씨도 덥고 그곳까지 걸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서 김해시내버스 10번(진영역↔봉하)을 타고 그곳으로 접근했다. (김해 10번
외에 김해 300번도 운행하고 있음)

김해 10번 버스는 시내버스의 성격에 아주 충실하게 진영읍내와 진영신도시, 본산공단
을 구석구석 투어를 시켜주고 봉하마을로 나를 가져다 주었다. 직선거리로 1.8km 거리
를 무려 11km나 돌아서 간 것이다. (30분 정도 걸렸음)


♠  봉하마을 둘러보기 (노무현 대통령 생가와 묘역)

▲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현대사(現代史)의 주요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봉하
마을은 진영읍 동북쪽에 자리해 있다. 봉화산 봉수대 밑에 있다고 해서 '봉하(烽下)'란 단순
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마을 북쪽과 동쪽에는 봉화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고, 마을 앞
(봉하로 남쪽)에는 봉하들녘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들녘 남쪽에는 뱀산이 있으며, 그 남쪽
에 바로 진영역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뒤쪽에 자리한 봉화산이 봉황, 마을 앞쪽 뱀산이 용의 형상이라고 한다.
화포천과 봉하들녘은 용의 서식지인 승지 형태를 하고 있고 뱀산 앞쪽에는 뱀의 먹이인 개구
리산이 있다. 하여 봉하는 용의 서식지로 적합하며, 먹이(개구리산)도 풍부해 용을 상징하는
제왕이 태어나거나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땅의 기운을 받아 노무현이 태어
나고 대통령까지 올랐다는 것인데, 퇴임 이후 겨우 1년 만에 여기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으
니 땅의 기운도 30%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명당 자리는 없음)

어쨌든 노무현이란 마르지 않는 든든한 후광(後光)을 지닌 봉하마을은 이 땅에 흔한 시골 마
을로 50가구의 120여 명이 살고 있다. 진영(進永)의 명물인 진영단감과 노무현의 주도로 친환
경농법으로 재배한 봉하쌀(봉하오리쌀, 봉하우렁이쌀)을 생산하고 있으며, 봉하쌀로 만든 봉
하쌀먹걸리와 봉하찰보리빵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또한 노무현을 추억하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그가 퇴임하여 돌아온 2008년 2월 25일
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불과 2달 만에 23만 명이 찾았다. 이후도로 매일 수천 명에서 최대 1
만 명까지 그를 보러 왔으며, 그가 서거한 이후에는 다소 줄긴 했으나 최소 수백에서 1,000명
대는 거뜬하게 온다. 내가 찾은 날도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꽤 보였는데, 가족 단위 관광객과
20~40대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노인들도 제법 보였다.
이렇듯 이 땅에 전하는 대통령 고향마을과 생가 중 가장 많은 팬을 지니고 있으며 김해의 대
표 관광지이자 국제적인 명소로 10여 년 이상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봉하마을 종점에서 평화로운 풍경의 마을을 등지며 동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노무현의 생가가
마중을 하는데, 이곳을 시작으로 노무현 관련 유적이 펼쳐진다.

* 봉하마을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로)

▲  노무현 생가 서쪽 출입구

▲  창고로 쓰이는 아래채

노무현 생가(生家)는 노무현이 1946년 9월 1일에 태어나 8살까지 살던 집이다. 그의 형이 대
학교에 진학하자 학비 마련을 위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는 1975년까지
마을 안에서 여러 번 이사를 하다가 부산으로 넘어갔으며, 기존 생가는 새 주인이 양옥으로
개조하면서 옛 모습을 크게 상실하고 말았다.

2008년 2월, 노무현이 대통령에서 퇴임하여 봉하마을로 돌아오자 김해시에서 그 기념으로 대
통령 생가를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허나 매입비가 비싸 난항을 겪다가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
창 친구가 매입하여 김해시에 흔쾌히 기부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생가 복원 사업이 추진되
었다.
노무현은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되 생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여 꼼꼼한 고증과 자문을 통해 설계를 마무리 지었으며, 2009년 2월에 기존의 양옥을 부시
고 공사에 들어가 9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생일인 9월 24일(음력 8월 6일)에 생가
쉼터 행사를 열고 속세에 개방했다.

기존 양옥을 부시면서 2개의 상량문(上樑文)이 나왔는데, 그들은 생가를 복원하면서 다시 사
용했으며, 생가는 전통적인 시골 초가 형태로 방 2칸과 부엌을 지닌 11평(36㎡)의 본채와 창
고와 재래식 화장실을 지닌 4.5평(14㎡)의 아래채를 두고 있다.
생가 복원이 끝날 즈음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문화재 전문가들과 함께 생가에 둘 소품을
엄선해 당시 생활상에 가까운 것들을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가구 등의 소품은 노무현과는 아
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의 빛바랜 사진들이 여럿 배치되어 그의 생가 값을 그런데로 내고 있
다.

▲  노무현의 옛 사진이 걸린 본채 안방

▲  그럴싸하게 재현된 본채 부엌


▲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장독대와 초가 돌담

노무현의 바램대로 완전한 쉼터로 열리지는 않았으나 툇마루 정도는 잠시 앉을 수 있다. 허나
마루 안쪽과 방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생가 관람은 9~18시)

생가 북쪽에는 노무현이 말년을 보냈던 사저(대통령의 집)가 있다. 이 땅의 대통령 중 퇴임하
고 최초로 고향마을로 돌아온 그가 지은 집으로 생태 건축의 대가인 정기용이 흙과 나무 등
자연 재료를 이용해 설계했으며, 주변 산세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지붕을 낮고 평평하게
지어 '지붕 낮은 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이곳이 그와 가족들의 영원한 집이 아닌 언젠가는 국민들에게 돌려주어야 될 집이라 여
겼다. 하여 그의 뜻에 따라 2018년 5월에 속세에 문을 열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 공간
은 아니며, 인터넷으로 관람 예약을 하거나 선착순 현장 접수로 들어가야 된다.
현재 권양숙 여사 등 노무현 일가는 이곳에 살지 않으며, 노무현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예약과 관람 방법은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하여 참조하기 바란다.

* 노무현 대통령 생가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 (봉하로 129, ☎ 055-346-
  0660)


▲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과 사자바위(뒤에 보이는 벼랑)

봉하마을 동쪽 끝이자 사자바위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노무현 묘역이 닦여져 있다. 그는 다른
대통령과 달리 국립서울현충원에 들어가지 않고 고향에 묻혔는데, 그 흔한 동그란 봉분(封墳)
도, 석물도 없으며,
'화장한 유골은 안장을 하되 봉분을 만들지 말라','아주 작은 비석만 남겨라'
는 그의 유언에
따라 남방식 고인돌 형태의 너럭바위를 봉분으로 올린 것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묘역의 구조는 서쪽에 수반(水盤)이란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못을 지나면 헌화대(참배공간)가
있으며, 그곳을 지나면 무덤인 너럭바위가 있고, 묘역 뒤쪽으로 곡장을 둘렀다. 곡장은 돌로
닦지 않고 일정 기간 녹이 슬면 보호막이 형성되어 부식을 막아주는 내후성(耐朽性) 강판으로
제작했다.

노무현 묘역은 2010년 4월에 완성되었다. 묘역은 크게 세모 모양을 띄고 있는데, 묘역 바닥에
는 그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메세지를 담은 박석 15,000개를 깔았다. 국민들의 신청을 받아
닦은 것으로 순식간에 동이 났으며, 나중에 대통령이 된 문재인 이사장이 박석 공사를 담당했
다. 일반 시민 외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유시민, 이해찬 등 유명 정
치인이 쓴 박석도 적지 않다.

이 땅의 대통령 묘역 중 가장 팬이 많은 묘역으로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묘역은 거의 장년
층 일색이나 이곳은 10대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특히 젊은층이 많음)
묘역은 8시부터 19시까지(겨울은 18시까지) 개방하며, 사상이 영 좋지 못한 작자들의 테러 위
험이 있어 경찰들이 매의 눈으로 지키고 있다.

▲  헌화대에 가득 올려진 국화들

▲  노무현이 묻힌 너럭바위 주변


▲  옆에서 바라본 너럭바위

너럭바위 앞에는 그의 어록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가 쓰
여 있어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한다. 바위 피부에는 '대통령 노무현' 6자가
쓰여 있는데, 이는 승려 지관이 쓴 것으로 그것이 묘비 대신이다.
너럭바위 속 석함(石函)에는 화장된 노무현의 유골을 비롯해 노무현의 일대기와 그의 참여정
부 5년의 기록을 5부작으로 다룬 DVD, 백성들의 추모영상 DVD가 들어있어 일종의 타임캡슐의
역할도 한다.

               ◀  잔디동산
노무현 묘역 북쪽이자 부엉이바위 그늘에 닦여
진 너른 잔디밭으로 노무현 관련 행사나 야외
공연장으로 많이 쓰인다. 여기서 북쪽으로 더
들어가면 봉화산의 물을 모아둔 봉하소류지가
있는데, 그곳은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다.

◀  부엉이바위 밑에 자리한 거울못
부엉이바위와 봉화산, 그리고 여름 하늘이
잔잔한 거울못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잔디동산에서 바라본 부엉이바위

봉하마을의 노무현 유적 중, 가장 안타까운 현장이 부엉이바위가 아닐까 싶다. 사자바위와 함
께 봉화산의 명물 바위로 옛날에 부엉이들이 서식했다고 해서 부엉이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높이는 30여m, 경사 80도 이상의 매서운 벼랑으로 2009년 5월 23일 아침, 노무현이
그의 마지막 행적을 남겼던 우울한 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자살 장소로 악명이 대단하여 자살바위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김해시에서 2013년
에 바위 윗쪽에 철책과 목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노무현의 부엉이바위 투신 자살에 대해서는 타살설도 있으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의
견이 분분하다.


▲  봉화산의 양대 바위,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오른쪽)

▲  봉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장군차밭)

노무현 묘역과 잔디동산 사이에는 봉화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있다. 봉하마
을을 찾은 사람들 상당수는 마을과 노무현 묘역만 보고 돌아가기 일쑤인데, 봉하마을과 봉화
산은 서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와 같으므로 봉화산을 빼면 거의 6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
다. 그러니 봉화산을 꼭 챙겨 여로(旅路)를 크게 살찌우기 바란다.

봉화산은 해발 140m의 낮은 뫼로 원래 이름은 자암산(子庵山)이다. 가야의 일원인 가락국(駕
洛國) 시절에 왕실과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 이곳에 태자암(太子庵)을 세웠다고 해서 그런 이
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후 봉오산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다가 1962년 정부에서 전국에 걸
쳐 측량조사를 벌이자 정토원을 일구었던 선진규(宣晋圭)가 마을 사람들이 봉화산이라 많이
부른다며 그 이름을 적극 건의해 봉화산이 정식 이름이 되었다. (봉화산의 이름 유래는 사자
바위에 있는 자암봉수대에서 비롯되었음)
노무현이 사랑하고 늘 거닐었던 뫼로 그 뫼를 두고 '낮지만 높은 산'이라 말했다. 평범해 보
이는 겉모습과 달리 볼거리도 많고 조망도 우수하다. 기본적으로 봉화산 마애불과 봉화산정토
원, 사자바위, 산 정상부에 깃든 호미든 관세음보살상을 보면 되며, 시간과 체력이 되면 편백
나무숲길과 장방리 갈대집까지 싹 돌아봐도 된다.


▲  푸르게 익어가는 장군차(將軍茶)밭

거울못 동쪽 산자락에는 장군차밭이 넓게 푸른 빛을 드러내고 있다. 장군차는 인도대륙 남방
계통의 잎이 큰 차나무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이 김해 금강곡에서 자라는 차
나무를 가리켜 '장군차'라 한 것이 유래가 되어 장군차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에서 추진한 '아름답고 살기좋은 농촌마을 만들기'의 일환으로 조성되었
는데, 그가 직접 총대를 메어 차밭을 닦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동네 사람들과 자원봉사자
들이 애지중지 재배하고 있다.


♠  봉화산(烽火山) 마애불과 봉화산 정토원

▲  봉화산 마애불 주변 바위 군락

장군차밭을 지나 정토원으로 조금 오르다 보면 바위가 유난히 우거진 곳이 나온다. 큰 바위들
이 서로 몸을 기대며 겹쳐 있는데, 바위 남쪽에 너른 공터가 있고 바위 사이로 마애불과 산신
에게 기도를 올린 흔적들이 서려 있다. 바로 저 바위 속에 봉화산의 오랜 은자(隱者)인 마애
불이 숨겨져 있다.


▲  봉화산 마애여래좌상 - 경남 유형문화유산 40호

부엉이바위 남쪽 바위 군락 속에 숨겨진 봉화산 마애불은 옆으로 넘어진 바위에 진하게 깃들
여져 있다. 원래는 하늘을 향해 서 있었으나 대자연의 괴롭힘으로 바위가 쓰러지면서 마애불
또한 강제로 엎어진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높이 2.45m, 무릎 높이 1.7m 규모의 작은 마애불이다. 봉하마을+
봉화산 구역의 유일한 늙은 문화유산으로 바위가 엎어지면서 오랫동안 바위 속에서 뜻하지 않
게 숨바꼭질을 벌이다가 20세기 이후에 딱 걸려버렸는데, 바위가 마애불을 지키려고 애를 썼
는지 그를 품은 듯 조금 앞쪽으로 기울어진 탓에 비와 바람 등의 괴롭힘을 덜 받아 양손과 왼
쪽 어깨 부분, 얼굴 일부가 조금 망가진 것을 빼면 거의 무탈한 모습이다.

머리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우뚝 솟은 민머리이며 얼굴은 둥근 넓적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듯 하다. 코와 입은 다소 마모가 되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
가 그어져 있고 양쪽 어깨에 걸쳐진 통견의는 'U'자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
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허리춤에서 손가락을 아래로 향해 펴고 있다.
신체 균형도 괜찮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건강 상태도 양호하여 적어도 700~800살 이상 먹었음
에도 제법 정정하고 젊어보인다. 사람이야 젊어보이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반대로 늙어보이는
것이 더 좋은데, 점점 늙어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그의 건강 상태가 부러울 따름이다.


▲  누워있는 봉화산 마애불을 반듯하게 세워보다

이렇게 보면 마애불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것 같다. 허나 이는 내가 카메라로 장난을 친 것
일 뿐, 누워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그를 벌떡 일으켜 세우면 좋겠지만 산속에다가 나무와 바
위가 많고 바위 또한 무거워 쉽지가 않으니 괜히 무리해서 일으키는 것보다는 이대로 두는 것
도 나쁘지 않다. 2007년에 발견된 경주(慶州) 열암곡(새갓골) 마애불상도 일으킬 방법이 없어
서 엎어진 채로 그냥 두고 있지 않던가.

* 봉화산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13


▲  부엉이바위 윗쪽

봉화산 마애불에서 정토원으로 조금 올라가면 부엉이바위 윗쪽이다. 2009년 5월 23일 이른 아
침,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생의 마지막 행적을 남긴 곳으로 여기서 추락한 직후, 병원으로 옮
겨졌으나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워낙 각이 시퍼런 벼랑이라 추락 위험도 크고 자살 장소로 악명이 대단해 김해시에서 바위 윗
도리에 철책과 목책을 둘러 접근을 막고 있으니 괜히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  정토원 배롱나무와 뒷쪽에 자리한 수광전(壽光殿)

봉화산 마애불에서 부엉이바위 윗쪽을 거쳐 7~8분 정도 오르면 봉화산 정토원(淨土苑)이 모습
을 비춘다.
정토원은 봉화산 정상 남쪽에 깃든 조촐한 산사로 1920년에 인근 한림면에 살던 지방 유지 이
진일이 세웠다. 처음 이름은 자암사(子庵寺)로 1953년에 이진일의 호를 따서 '화일사'로 간판
을 갈았는데, 1958년 동국대 총학생회장이던 선진규(1934~2020)가 백성욱 동국대 총장에게 봉
화산을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봉화산 북쪽인 한림면
장방마을이 고향으로 어린 시절 화일사에 할머니를 따라 자주 찾은 인연이 있었다.
불심이 깊은 그의 열의에 감동을 먹은 총장은 화일사 등 35,000평에 대한 계약금 35만원을 흔
쾌히 지원해 주었고, 그 지원금으로 진영읍 신용리에 있던 신용사(新龍寺)를 합쳐 절 이름을
봉화사로 갈았다.

1959년 4월 5일, 선진규를 중심으로 한 불교학도 31명은 봉화산 정상에 개발을 상징하는 호미
든 관세음보살상을 세우고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식목과 개간 등의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어려
운 상황에도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5번에 걸쳐 주변 산 24만 평을 확보했으며, 1967년에
는 사명대사(四溟大師)상과 만해 한용운(韓龍雲)상까지 마련했다.
1972년 선진규는 조계종(曹溪宗)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되어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게 되었
다. 그러다 보니 봉화사 관리가 어려워져 1975년에 다른 승려에게 봉화사를 맡겼으나 2번이나
화재를 만나 절이 몽땅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선진규는 1983년 이곳으로 내려와 폐허가 절에
천막을 설치하여 석가여래상을 봉안했으며, 1984년에 조립식 건물을 세워 청소년회관으로 사
용하면서 절 이름을 '봉화산 정토원'으로 갈았다. 그때부터 정토신행에 근거해 포교활동에 전
념했으며, 선진규 법사가 직접 절을 꾸렸다.

1989년 새 법당과 청소년수련원 공사를 시작해 1992년 완성을 보았으며, 노무현 일가의 원찰(
願刹)로 그의 부모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노무현의 마지막 날 아침. 이곳에 들려 부모
의 위패를 향해 하직인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2009년 5월 29일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된 노무현의 유골이 이곳에 잠시 봉안되었다가 49재를
마치고 장지에 안장되었으며 수광전에 노무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 인연으로 노무현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봉하마을 종점에서 이곳까지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며, 여기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사자바위,
북쪽으로 올라가면 호미든 관세음보살상이 있는 정상으로 이어진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이자 아미타불의 거처인 수광전을 비롯해 요사(寮舍), 선방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법등(法燈)의 역사가 짧다 보니 문화유산은 없다. 점심시간에는 절을 찾은 중
생들에게 공양밥을 제공하고 있으며, 점심시간 이후에는 공양간 앞 쉼터 탁자에 물과 간식거
리, 믹스커피 등을 두어 나그네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봉화산 정토원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3 (장방로 136-200, ☎ 055-342-
  2991~2)
* 봉화산 정토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수광전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위엄
늠름하게 생긴 아미타불이 애기처럼 작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로 아미타후불탱이 걸려있으며,
그 좌우로 금동 피부의 원불(願佛)이 가득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  호법신들로 가득한 수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나무가 무성한 정토원 경내

◀  정토원 요사와 공양간(1층)


▲  정토원의 넉넉한 마음

공양간 앞 쉼터에는 나그네들을 위해 감자튀김과 토마토, 물과 믹스커피 등이 넉넉하게 차려
져 있었다. 나는 점심도 들지 못한 상태라 시장기가 크게 폭발하여 감자튀김을 거의 1/5이나
폭풍 섭취했는데, 거기에 믹스커피까지 들이키니 포만감의 행복에 기절할 정도이다.
초여름이라 초파리 등이 꼬이는 것에 대비하여 음식을 비닐로 감쌌으며, 이들과 별도로 냉장
고에는 음료수와 생수가 들어있으나 이들은 유료라 돈을 내고 가져가야 된다.


♠  봉화산 마무리

▲  사자바위에 닦여진 자암봉수대(子庵烽燧臺)

정토원에서 제공한 간식거리로 지친 몸을 제대로 달랜 다음, 봉화산 남쪽 봉우리인 사자바위
로 올라갔다.
노무현이 봉화산 제일의 명소로 찬양을 했던 사자바위는 해발 134.8m의 바위 봉우리로 북쪽을
제외하고 모두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옛날에는 지역 사람들이 여기서 하늘에 제를
지냈으며, 주변 바위에 구멍이 좀 뚫려있는데 이들은 제사 때 제물을 담아두던 곳으로 평상시
에는 물을 모아두었다고 전한다.
일품 조망 덕분에 고려 때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닦여져 바쁘게 불을 지폈는데, 동남쪽으로 10
km 떨어진 분산성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15km 떨어진 밀양(密陽) 남산봉수로 전달
했다. (봉수대의 이름인 '자암'은 봉화산의 옛 이름)
자연 암반을 이용해 층층이 돌을 쌓은 것으로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동그란 원형과 네모난 방
형이 합쳐진 형태이며, 주축 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높이 1~3m, 직경은 동서 8.5m, 남북 10.
5m, 하부 둘레 31.5m 사이즈로 정토원과 이어진 서쪽은 경사가 완만하나 나머지는 경사가 각
박해 연대(煙臺) 외에는 다른 시설은 두지 않았다.

근래 복원되었으나 봉수대라기보다는 그냥 석축을 쌓아놓은 모양새 같다. 조망은 좋으나 부엉
이바위보다 높고 날카로운 벼랑이라 사고 방지를 위해 벼랑 쪽에 높게 유리난간을 둘렀다.

▲  서쪽에서 바라본 자암봉수대

▲  자암봉수대의 윗부분

동그랗게 다져진 봉수대 윗쪽 한복판에 네모나게 패인 부분이 있어 마치 상평통보(常平通寶)
같은 엽전처럼 생겼다. 저 패인 부분에서 연기를 피워 밀양 남산봉수로 신호를 보냈는데, 비
가 오거나 안개가 자욱한 경우 봉수지기가 직접 밀양 남산봉수까지 달려가 연락을 취했다.


▲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봉하마을과 진영읍 방향
바로 밑에 보이는 삼각형 지대가 노무현 대통령 묘역이다.

▲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한림면 지역과 화포천습지생태공원
봉하들녘과 화포천 사이로 경전선 열차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간다.

▲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한림면 지역과 화포천
사진 왼쪽에 보이는 산지가 모두 봉화산이다. 봉화산도 생각보다 제법 넓다.

  봉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돌계단길


▲  호미든 관세음보살상(관세음개발성상)

봉화산 정상에는 정토원의 상징으로 꼽히는 호미든 관세음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키가 24척
에 이르는 그는 왼손에 그의 필수품인 정병을 쥐어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특이하게도 호미를
쥐고 있는데, 농기구를 손에 든 불상/보살상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해 눈길을 끈다. 그의 정
식 이름은 '호미든 관세음개발성상(開發聖像)'이다.
정토원을 일군 선진규가 31명의 불교학도와 함께 1959년 4월 5일에 만든 것으로 4대 개발(신
심 개발, 사회 개발, 경제 개발, 사상 개발)을 장려하고자 농촌 사람들이 많이 쓰는 호미를
관세음보살 누님 오른손에 쥐게 했다.

관세음성상이 봉안된 이후, 진영중학교에서 봉화산을 찾아가 식목행사를 가졌는데, 당시 중1
이던 노무현은 관세음성상 주변에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  옆에서 바라본 호미든 관세음보살상

▲  봉화산 정상 전망대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관세음보살 누님은 4단으로 된 석단(石壇
) 위에 닦여진 연화대(蓮花臺)에 서서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처음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대좌(臺座)에 있었으나 지금의 단과 연화대를 갖추면서 더욱 장엄한 모습을 보이
게 되었다.

이곳은 봉화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높이는 140m로 낮으나 주변에 키가 큰 뫼들이
없다 보니 조망은 국보급으로 사방 30리 일대가 두 눈에 들어온다. 심지어 낙동강까지 시야에
잡힌다. 낙동강이 이렇게 가까웠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살펴보니 굵은 강줄기가 낙동강이
맞다. 이래서 노무현이 봉화산을 두고 '낮지만 높은 산'이라고 그렇게 칭송을 했던 모양이다.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봉화산 남쪽 자락 (정토원 방향)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봉하마을과 봉하들녘, 뱀산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진영읍과 창원 대산면 지역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림면과 낙동강
사진 가운데 쯤 보이는 좌우로 길쭉한 푸른 존재가 바로 낙동강이다.
(여기서 낙동강까지 직선으로 3km 거리)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림면과 생림면, 낙동강
(낙동강 너머는 밀양시 지역)

▲  봉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림면과 화포천

▲  지상 출현 부처 (석가여래의 머리와 정병, 연꽃)

봉화산 정상에서 물러나 정토원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지상 출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아리
땁게 생긴 석가여래의 머리와 연꽃과 정병을 든 두 손으로 이루어진 석상이 있다. 몸통도 아
닌 머리와 두 손이 전부로 이들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종지용출품(終止聳出品) 제15에 나
오는 말씀에 따라 만든 것이다.
그 내용은 8개의 간디스강 모래수와 같이 많은 보살들이 대중에게 일어나 합장하여 말하기를
'세존(世尊, 석가여래)님, 세존께서 멸하신 후 이 사바세계의 중생제도를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세존이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시방세계에서는 6만 항하사와 같은 보살이 있고 그 보살 하나하나에
또 6만 항하사의 권속이 있으니 그대들이 걱정할 바가 아니오'
하였다. 그랬더니 삼천대천세
계가 진동하며 천만억보살마하살이 솟아났다.
이 내용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부처이자 보살이라는 뜻이다. 하여 이를 상징하고자 
이 형상을 세운 것이다.

정토원에서 잠깐 두 다리를 쉬다가 봉화산 마애불을 거쳐 다시 봉하마을로 내려왔다. 2~3시간
이면 다 볼 듯 싶었는데, 무려 4~5시간 이상을 소비했다. 내려와서도 3만 평에 이르는 생태문
화공원과 노무현의 삶과 자취를 기록한 사진과 내용을 머금은 야외전시장도 둘러보았으나 그
곳에서 담은 사진들이 변변치 못해 본글에서는 쿨하게 빼도록 하겠다.

이렇게 직접 노무현 유적과 봉화산을 둘러보니 왜 사람들이 이곳과 노무현을 그렇게 찬양하고
추억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나보내기에는 무척 아까
운 인물이었고, 지금까지도 살아있었다면 이 땅의 농촌이 조금은 좋게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고로 이 땅의 하늘은 샘이 나거나 좋은 인물들은 빨리 잡아가고 지옥으로 빨리 가야되거나
악한 것들은 안잡아가니 이래서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이 정도만 보고 깨끗하게 물러가지만 다음에 다시 인연을 만들어 이때 놓친 대통령
의 집과 봉화산 편백나무숲,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꼽힌 화포천 습지길도 꼭 둘러
보고 싶다. 굳이 노무현에 관심이 없어도 아름다운 산천에 볼거리와 조망이 풍년이라 가볼만
하다.

봉하마을 종점에서 잠시 쉬다가 진영읍으로 나가는 김해시내버스 10번을 타고 바깥 세상으로
나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여름맞이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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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6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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