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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박힌 로마네스크 양식의
근대 건축물
성공회서울성당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호
▲ 서남쪽 양이재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의 위엄
하얀색과 주황색(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며 고풍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덕수궁(경운궁)
북쪽에는 마치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 분위기를 풍기는 고풍스러운 모습
의
성공회서울성당(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하 성공회성당)이 크게 자리해 있다. 이곳
은 이 땅의 유일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건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성공회(聖公會)는 카톨릭 계열의 하나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
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집어넣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으로 있던
코프(C.J. Corfe)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는데,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
프, 워너 두 신부를 이끌고 1890년 9월 인천에 발을 내렸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선교 영업을 벌이며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와
시약소(施藥所)를 열었고, 그해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오로
지 양이(洋夷)들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것들 뭐하는건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
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
다. 이듬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양이(洋
夷)와 왜인(倭人) 중심으로 미사를 했을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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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조선 이름은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
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
년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 땅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의 수가 많아지자 한국어, 영어, 왜어 등 3개 언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미사를 봤다.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 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하여 191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해 10월
병사하고 말았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던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
서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
에 도움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
변에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덕수궁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입하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
자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도 안되는 14,000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
의 절반 정도만 지었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우선 마무리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나머지 부분도
속히 닦고자 왜열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
당은 절반이 모자른 모습으로 한참의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다. |
▲ 동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① |
그 이후
1993년 나머지 부분을 닦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문화재위원회로
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오!' 설득했으나, 문화재위원회는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로 안되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
도가 없는
한 증축은 어림도 없소' 답을 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이 맞는 말임)
허나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에 놀러온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
도면이 있다는 낭보를 전했다. 하여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넘어가 런던 부근 렉싱통
도서관에 처박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나 문화재위원들은
쿨하게 증축 허가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
▲ 동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② |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기초부와 뒷면 일부는 화강석을 사
용하고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으며, 성당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
게 하여 일종의 율동감을 선사한다. 종탑(鐘塔)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으며, 성당 지하에는 트롤로프가 묻힌 지하묘지가 있다. (그곳 마루
바닥 중앙에 안장되었음)
이곳 성당은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작
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하여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를 알리는
표석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
▲ 성공회성당 내부 (북쪽 예배실)
성당 음악회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한 독특한 근대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내부 분위기는 뜨거웠다.
▲ 성공회성당 예배실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모자이크 제단화(祭壇畵) |
처음으로 들어선
성공회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나는 카톨릭교, 개신교
등
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있지만, 이곳은 엄연한 근대문화유산이라 종교와 상관없이 호기심 어
린 침침한
두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내부를 살폈다.
예배 공간 제일 안쪽 돔에는 모자이크 그림이 아주 장엄하게 깃들여져 있다. 전체 높이 8.6m
(제단화 높이 5.4m, 기단 부분 높이 3.2m, 곡면 길이 약 8m)의 모자이크 벽화로 조명의 후광
(後光)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 성당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이들은 조지잭(George Jack, 1855-1932)의 디자인을 모방해 1927년~1938년 사이에 제작된 것
으로 예수가 들고 있는 책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Ego Sum Lux Mund)'란 문구가 적혀 있고
예수 밑에는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왼편에 사도 요한과 성스테파노, 오른편으로 이사야 선지
자와 니콜라스가 그려져 있다.
이곳 제단화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란 긴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유
산 67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 성공회서울성당 서쪽 예배실
예배 공간은 성공회 신부가 의식을 치르고 주관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펼쳐져 있다. (중심 공간은 북쪽 예배실)
▲ 성공회성당 2층에 자리한 파이프오르간의 위엄 |
성당 음악회의 주인공은 바로 파이프오르간(Pipe organ)이다. 여러 길이의 관을 음계적(音階
的)으로 배열하여 바람을 보내 소리를 내는 건반 악기로 성당과 교회에서 많이 쓰인다. 악기
의 덩치가 워낙 크고 소리의 장엄함을 짙게 하고자 윗층에 두었는데 마치 신이 들린 듯 파이
프 연주소리에 성당 내부가 쩌렁쩌렁 울린다.
관람객들은 목이 아프게 그가 있는 2층을 바라보며 도심 속의 음악 삼매경을 즐긴다. (파이프
연주 장면은 예배실 앞 부분에 마련된 모니터로 확인 가능함) |
▲ 1996년 5월 2일, 성당 완성을 기념하여 세운 성수(聖水) 석물
▲ 성공회성당 머릿돌
1996년 5월, 성당이 최종 완성되면서 이를 기리고자 성당 귀퉁이에
머릿돌을 심었다.
▲ 트롤로프가 묻힌 지하묘지 예배당 (성당 지하) |
성당회성당 지하에는 트롤로프의 지하묘지가 있다.
이곳은 워낙 구석이고 성당 사람들을 빼면
거의 모를 정도로 숨바꼭질의 정석을 보이고 있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1층 예배실과 완전 대
조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서 겨우 그와의 술래 신세를 면했다.
돌로 다진 마루 바닥 한복판에 그의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성공회성당의 축소판을 든 그의
모습을 새겼으며 그 주위를 예배 공간으로 만들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그저 평범한 지하
예배당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을 알면 다소 기분을
오싹하게 한다.
카톨릭 성당은 성당 지
하나 내부에 성당을 세운 사람과 성당을 발전시킨 성직자, 그리고 군주, 귀족, 고위관료의 시
신을 묻는 무지하게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명동성당에도 지하묘지가 있음)
트롤로프는 1930년 왜열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허무하
게 사망했다. 왜정은 서울에 살던 서양 사람들이 죽으면 무조건 양화진묘지나 그들 나라에 묻
히게 했으나 그는 예외로 인정해 서울 한복판에 묻히게 해주었다. 제아무리 권력자나 부자라
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 무덤을 쓰기가 어려운데 트롤로프는 그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이곳은 꽤 구석이라 찾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으니 괜히 숨바꼭질로 고생하지 말고 성당 관계
자나 신도들에게 꼭 길을 문의하기 바란다. 다행히 일반인에게도 쿨하게 공개하고 있으며
사
진 촬영도 가능하다. 단 토/일을 제외하고 공개를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성당이 바쁘게 움직이
는 주말이나 정동야행 기간을 이용하기 바란다. |
▲ 드디어 찾은 지하묘지 - 저 안에 트롤로프가 묻혀있다고? |
그저 말로만 듣던
성당의 지하묘지를 이곳에서 처음 접해본다. 무늬가 새겨진 저 돌바닥 밑에
트롤로프의 관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만약 이곳을 밝히는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면 염통이 적지
않게 쫄깃해졌을 것이다. 저 돌바닥을 박차고 그의 시신이 쓱 일어나
'어서와~ 이런 곳은 처음이지?'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 지하묘지 바닥에 새겨진 트롤로프의 윗모습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그의 유작인 성공회성당이다.
▲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 국가 등록문화유산 267호 |
성당 서쪽에는 2채의
기와집이 있다. 이들은 원래 덕수궁(경운궁) 건물로 왜정이 망국의 궁궐
을 욕보이고자 덕수궁의 적지 않은 건물과 땅을 민간에게 팔아먹었는데 이때 대한성공회가 양
이재와 그것에 딸린 건물 2동을 물어왔다. 지금은 성공회 땅이지만 이곳 역시 옛 덕수궁의 영
역이었다.
양이재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큼직한 팔작지붕 집으로 1904~1906년 사이에 지어졌다. 황족(
皇族)과 귀족 등 금수저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하던 수학원(修學院)으로 세월을 예민하게 타
면서 건물이 좀 변형되긴 했으나 2008년 복원공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상당히 회복했다.
현재는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무리해서 들어가지 않도
록 한다. 서양식 근대 건축물과 전통 한옥이 어우러진<한편으로는 조금 어색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 현장으로 건물 뒤쪽에 장미꽃이 탐스럽게 열려있으니 5~6월에 왔다면 숨겨진 뒷쪽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세종대로21길 15 ☎ 02-730-
6611)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성공회서울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장미꽃의 즐거운 향연이 펼쳐진 양이재
뒷뜨락
붉은 장미와 하얀 장미가
주렁주렁 열려 그늘진 뒷뜨락을 곱게 물들인다.
▲ 덕수궁(경운궁) 수학원 출신의 한옥 (주교관)
등록문화유산의 지위를 누리며 옛 모습도 되찾고 조금은 한가해진 양이재와 달리
이들은 적지 않게 변형된 모습을 보이며 주교관 등으로 바쁘게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