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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성공회서울성당

▲  성공회서울성당

구세군중앙회관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고개)

▲  구세군중앙회관

▲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고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근대문화유산의 성지(聖地)
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정동(貞洞)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현재 성북구 정릉동(貞陵洞) 골짜기에 있는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 관련글 보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된 정동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근대건축이 무지하게 많은데, 매년 5월과 10월에는 그들을 주제로 내세운 '정동
야행(貞洞夜行)'이란 축제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정동의 인기에 크게 불을 붙였다.
(정동야행은 상황에 따라 일정이 변경, 축소될 수 있음)

정동야행이 열리면 덕수궁<德壽宮, 경운궁(慶運宮)>을 비롯해 정동 지역에 있는 근대문
화유산과 미술관, 박물관, 극장 등의 문화시설이 앞다투어 야행에 호응한다. 이때가 되
면 입장료가 쿨하게 깎이거나 무료로 해방이 되며, 관람시간이 연장되고 다채로운 음악
회와 공연이 풍성하게 열려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즐겁게 어루만진
다.

정동야행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 오후 늦게 덕수궁(경운궁) 대한문(大漢門)에서 후배 여
인네를 만났다.
정동야행 안내도를 보며 메뉴를 고르다가 덕수궁 바로 북쪽에 자리한 성공회서울성당에
크게 목마름이 생겨 그곳을 찾았다. 그곳 역시 정동야행에 흔쾌히 호응하여 파이프오르
간을 겯드린 음악회를 열고 있었는데, 성당 정문부터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다행히 성당 내부는 자리가 넉넉해 관람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으며 그동안 성당 바깥
만 구경했지 내부 구경은 이번이 처음이다.


♠  서울 도심에 박힌 로마네스크 양식의 근대 건축물
성공회서울성당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호

▲  서남쪽 양이재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의 위엄
하얀색과 주황색(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며 고풍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덕수궁(경운궁) 북쪽에는 마치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 분위기를 풍기는 고풍스러운 모습
의 성공회서울성당(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이하 성공회성당)이 크게 자리해 있다. 이곳
은 이 땅의 유일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건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성공회(聖公會)는 카톨릭 계열의 하나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
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집어넣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으로 있던
코프(C.J. Corfe)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는데,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
프, 워너 두 신부를 이끌고 1890년 9월 인천에 발을 내렸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선교 영업을 벌이며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와
시약소(施藥所)를 열었고, 그해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오로
지 양이(洋夷)들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것들 뭐하는건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
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
다. 이듬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양이(洋
夷)와 왜인(倭人) 중심으로 미사를 했을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열렸다.


▲  서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조선 이름은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
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
년회 회장이 되었으며, 이 땅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의 수가 많아지자 한국어, 영어, 왜어 등 3개 언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미사를 봤다.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 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하여 191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해 10월
병사하고 말았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던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
서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
에 도움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
변에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덕수궁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입하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
자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도 안되는 14,000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
의 절반 정도만 지었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우선 마무리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나머지 부분도
속히 닦고자 왜열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
당은 절반이 모자른 모습으로 한참의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다.


▲  동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①

그 이후 1993년 나머지 부분을 닦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문화재위원회로
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오!'
설득했으나, 문화재위원회는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로 안되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
도가 없는 한 증축은 어림도 없소'
답을 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이 맞는 말임)

허나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에 놀러온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
도면이 있다는 낭보를 전했다. 하여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넘어가 런던 부근 렉싱통
도서관에 처박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위원회에 제출하나 문화재위원들은
쿨하게 증축 허가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성공회성당 ②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기초부와 뒷면 일부는 화강석을 사
용하고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으며, 성당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
게 하여 일종의 율동감을 선사한다. 종탑(鐘塔)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으며, 성당 지하에는 트롤로프가 묻힌 지하묘지가 있다. (그곳 마루
바닥 중앙에 안장되었음)

이곳 성당은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작
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하여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를 알리는
표석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  성공회성당 내부 (북쪽 예배실)
성당 음악회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한 독특한 근대
건축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내부 분위기는 뜨거웠다.

▲  성공회성당 예배실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모자이크 제단화(祭壇畵)

처음으로 들어선 성공회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나는 카톨릭교, 개신교 등
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있지만, 이곳은 엄연한 근대문화유산이라 종교와 상관없이 호기심 어
린 침침한 두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내부를 살폈다.

예배 공간 제일 안쪽 돔에는 모자이크 그림이 아주 장엄하게 깃들여져 있다. 전체 높이 8.6m
(제단화 높이 5.4m, 기단 부분 높이 3.2m, 곡면 길이 약 8m)의 모자이크 벽화로 조명의 후광
(後光)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 성당의 위엄을 더욱 높여준다.
이들은 조지잭(George Jack, 1855-1932)의 디자인을 모방해 1927년~1938년 사이에 제작된 것
으로 예수가 들고 있는 책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Ego Sum Lux Mund)'란 문구가 적혀 있고
예수 밑에는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왼편에 사도 요한과 성스테파노, 오른편으로 이사야 선지
자와 니콜라스가 그려져 있다.

이곳 제단화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모자이크 제단화'란 긴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유
산 676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성공회서울성당 서쪽 예배실
예배 공간은 성공회 신부가 의식을 치르고 주관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 펼쳐져 있다. (중심 공간은 북쪽 예배실)

▲  성공회성당 2층에 자리한 파이프오르간의 위엄

성당 음악회의 주인공은 바로 파이프오르간(Pipe organ)이다. 여러 길이의 관을 음계적(音階
的)으로 배열하여 바람을 보내 소리를 내는 건반 악기로 성당과 교회에서 많이 쓰인다. 악기
의 덩치가 워낙 크고 소리의 장엄함을 짙게 하고자 윗층에 두었는데 마치 신이 들린 듯 파이
프 연주소리에 성당 내부가 쩌렁쩌렁 울린다.
관람객들은 목이 아프게 그가 있는 2층을 바라보며 도심 속의 음악 삼매경을 즐긴다. (파이프
연주 장면은 예배실 앞 부분에 마련된 모니터로 확인 가능함)


▲  1996년 5월 2일, 성당 완성을 기념하여 세운 성수(聖水) 석물

▲  성공회성당 머릿돌
1996년 5월, 성당이 최종 완성되면서 이를 기리고자 성당 귀퉁이에
머릿돌을 심었다.


▲  트롤로프가 묻힌 지하묘지 예배당 (성당 지하)

성당회성당 지하에는 트롤로프의 지하묘지가 있다. 이곳은 워낙 구석이고 성당 사람들을 빼면
거의 모를 정도로 숨바꼭질의 정석을 보이고 있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1층 예배실과 완전 대
조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서 겨우 그와의 술래 신세를 면했다.

돌로 다진 마루 바닥 한복판에 그의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성공회성당의 축소판을 든 그의
모습을 새겼으며 그 주위를 예배 공간으로 만들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그저 평범한 지하
예배당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을 알면 다소 기분을 오싹하게 한다. 카톨릭 성당은 성당 지
하나 내부에 성당을 세운 사람과 성당을 발전시킨 성직자, 그리고 군주, 귀족, 고위관료의 시
신을 묻는 무지하게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명동성당에도 지하묘지가 있음)

트롤로프는 1930년 왜열도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허무하
게 사망했다. 왜정은 서울에 살던 서양 사람들이 죽으면 무조건 양화진묘지나 그들 나라에 묻
히게 했으나 그는 예외로 인정해 서울 한복판에 묻히게 해주었다. 제아무리 권력자나 부자라
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 무덤을 쓰기가 어려운데 트롤로프는 그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이곳은 꽤 구석이라 찾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으니 괜히 숨바꼭질로 고생하지 말고 성당 관계
자나 신도들에게 꼭 길을 문의하기 바란다. 다행히 일반인에게도 쿨하게 공개하고 있으며 사
진 촬영도 가능하다. 단 토/일을 제외하고 공개를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성당이 바쁘게 움직이
는 주말이나 정동야행 기간을 이용하기 바란다.


▲  드디어 찾은 지하묘지 - 저 안에 트롤로프가 묻혀있다고?

그저 말로만 듣던 성당의 지하묘지를 이곳에서 처음 접해본다. 무늬가 새겨진 저 돌바닥 밑에
트롤로프의 관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만약 이곳을 밝히는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면 염통이 적지
않게 쫄깃해졌을 것이다. 저 돌바닥을 박차고 그의 시신이 쓱 일어나
'어서와~ 이런 곳은 처음이지?'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지하묘지 바닥에 새겨진 트롤로프의 윗모습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그의 유작인 성공회성당이다.

▲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 국가 등록문화유산 267호

성당 서쪽에는 2채의 기와집이 있다. 이들은 원래 덕수궁(경운궁) 건물로 왜정이 망국의 궁궐
을 욕보이고자 덕수궁의 적지 않은 건물과 땅을 민간에게 팔아먹었는데 이때 대한성공회가 양
이재와 그것에 딸린 건물 2동을 물어왔다. 지금은 성공회 땅이지만 이곳 역시 옛 덕수궁의 영
역이었다.

양이재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큼직한 팔작지붕 집으로 1904~1906년 사이에 지어졌다. 황족(
皇族)과 귀족 등 금수저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하던 수학원(修學院)으로 세월을 예민하게 타
면서 건물이 좀 변형되긴 했으나 2008년 복원공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상당히 회복했다.
현재는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무리해서 들어가지 않도
록 한다. 서양식 근대 건축물과 전통 한옥이 어우러진<한편으로는 조금 어색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 현장으로 건물 뒤쪽에 장미꽃이 탐스럽게 열려있으니 5~6월에 왔다면 숨겨진 뒷쪽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세종대로21길 15 ☎ 02-730-
  6611)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성공회서울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꽃의 즐거운 향연이 펼쳐진 양이재 뒷뜨락
붉은 장미와 하얀 장미가 주렁주렁 열려 그늘진 뒷뜨락을 곱게 물들인다.

▲  덕수궁(경운궁) 수학원 출신의 한옥 (주교관)
등록문화유산의 지위를 누리며 옛 모습도 되찾고 조금은 한가해진 양이재와 달리
이들은 적지 않게 변형된 모습을 보이며 주교관 등으로 바쁘게 쓰이고 있다.


♠  덕수궁돌담길

▲  덕수궁 서쪽 돌담길 (영성문고개)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 옆구리를 거쳐 덕수초교로 넘어가는 덕수궁(경운궁) 서쪽 돌담길
중간에는 영성문(永成門)고개라 불리는 야트막한 고개가 솟아있다.
영성문은 덕수궁 북쪽 구역 문으로 새문안길(서대문~광화문을 잇는 도로) 부근에 있었다. 대
한문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문이었는데, 덕수궁에서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 영국공
사관과 이어져 '외교의 문'으로 통하기도 했다.
하지만 악질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이 왜정(倭政)과 짜고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왜인(倭人)
에게 팔아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 사건에 크게 뚜껑이 열려 1919년 11월
22일에 적은 그의 일기(윤치호일기)에서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랬던 윤치호도 나중에 친일파 떨거지가 되었음)

고종이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왜정은 1920년 2월 영성문과 선원전 일대를 철거했다. 이때 영
성문에서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언덕을 깎으면서 서쪽 돌담길이 뚫렸는데, 이를 영성문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 그저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로 묻혀있다.


▲  호젓하게 펼쳐진 덕수궁 서쪽 돌담길 (평성문 앞)

동쪽의 덕수궁 돌담과 서쪽의 미국대사관저의 높다란 담장 사이로 놓여진 서쪽 돌담길, 좌우
쪽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로 경쟁에 들어간 듯, 앞다투어 담장 밖으로 울창한 가지를 내뻗
어 그야말로 숲길을 이룬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인적도 적고 차분하며 고즈넉한 궁궐 돌담길
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정말 100점짜리 산책로이다.

고갯길이 뚫린 1920년대 이후 이곳은 젊은 남녀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던 곳으
로 '사랑의 언덕길'로 통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그 명칭도 슬쩍 사라졌으나 여전히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사랑의 언덕길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항간에서는 돌담길을 거닐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1973년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
담길'이란 노래<한산도 작곡, 정두수 작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전하는 바로는
작사자인 정두수가 실연을 당하고 비오는 날,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집에 돌아와 자기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법원이 돌담길 남쪽인 현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 있어서 부부가 이혼하러 오는 길
이라 하여 연인들이 발길을 꺼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세상풍파를 타면서 헤어지는 길로 오
해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니 돌담길이 섭하지 않도록 그런 속설은 신뢰하지 말자~~!

이렇게 호젓하고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길 곳곳에 전/의경들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과 차
량을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나라 땅임에도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없는 미국대사관저의 건방지
게 높은 담장은 이곳의 진한 옥의 티로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이 여실히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
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위엄을 날렸던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건만 지금은 왕년의 ⅓ 이
하로 크게 줄어들었으며, 반면 세계에서 그 영향력이 무지하게 큰 미국의 관할인 미국대사관
저는 덕수궁 담장보다 더 높아 망국의 황궁을 짓누른다. 게다가 그것들이 들어앉은 곳도 덕수
궁의 잃어버린 옛 땅이다. 반드시 되찾아 복원시켜야 될 그런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옥의
티는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아마도 지우기 힘들 것 같다. 그 티를 간직하며 자존심을 접고 산
책로를 거니는 수 밖에는...

돌담길을 사진에 담을 때는 미국대사관저 방향은 너무 대놓고 찍지 말기 바란다. (찍으면 제
지를 당할 수 있음) 단 덕수궁 쪽이나 돌담길의 한복판은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평성문(平成門)

평성문은 덕수궁 중심지(중화전, 함녕전)에서 궁궐 외곽인 중명전 구역과 선원전(璿源殿) 구
역을 이어주던 문이다. 허나 그 구역이 모두 아작나면서<중명전은 남아있음> 이제는 덕수궁의
서쪽 문이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뒷문 신세가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관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관람객은 대한문으로 출입해야 됨>


▲  덕수궁돌담길 남쪽 구간, 운교(雲橋)터

남쪽 돌담길이 크게 구부러지는 구간(서울시청 서소문청사와 정동교회 사이)에는 덕수궁의 운
교(구름다리)가 있었다. 고종이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키우면서 정
동 대부분을 먹어치울 정도로 궁궐 영역이 넓어지자 백성들이 다니는 길 위에 운교를 놓아 궁
궐의 각 영역을 연결시켰다.
허나 왜정 이후 파괴되어 지금은 돌로 다진 교대(橋臺) 등의 흔적만 진하게 남아있으며, 다리
건너편 서울시립미술관 일대도 원래 덕수궁의 영역이다.


▲  늦가을에 진하게 잠긴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이렇게 하여 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덕수궁돌담길 부분은
늦가을에 담은 사진을 사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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