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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문, 수어장대, 서문, 북문, 고골)


'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성

▲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  수어장대

▲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차디찬 겨울이 저물고 봄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던 3월의 끝 무렵, 그 이름도 유명한 남
한산성을 찾았다.
점심 쯤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로 거의 1시간 반을 이동, 갈아타기도 무려 3
번<1호선→경의중앙선→수인분당선→8호선;>씩이나 하여 남한산성에서 가까운 산성역에
서 비로소 어두컴컴한 땅굴에서 벗어났다.

산성역(8호선)은 남한산성을 품은 청량산의 서남쪽 끝자락 100m 고지에 자리해 있어 깊
이가 제법 된다. 그러다 보니 역을 빠져나오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밖으로 나와서 광주
시내버스 9번(사송동↔남한산성)을 타고 성남시(城南市) 산성동과 양지동 지역을 1바퀴
돌고 가늘게 이어진 청량산의 서남쪽 고갯길과 남문터널을 지나 남한산성 안으로 진입,
남문터널 정류장(해발 350m)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남한산성 남문 주변

▲  남문 동쪽에 자리한 남한산성 비석군(碑石群)

광주시(廣州市) 서북쪽 끝자락에 높이 자리하여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시와 경계를 긋고 있는
남한산성은 거의 1년 만에 방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지금까지 10여 번
인연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남문에서 시작하여 수어장대와 동문, 국청사를 돌아 북문을 거쳐
하남시 고골(상사창동)로 내려가기로 했다.

남문터널 정류장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남쪽 길을 오르면 비석들의 모임 현장이 발길을 붙잡
는다. 남문 안쪽에 있던 19기와 행궁(行宮)터 주변에서 서성이던 11기를 보태 30기로 이루어
져 있는데, 마치 가족회의를 벌이듯 'ㄷ'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 윗쪽에도 8기가 더 있어
총 38기가 있는 것인데, 남한산성에 조선 후기(18~20세기) 비석이 39기 정도 있다고 하니 거
진 이곳에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 상당수는 기와 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지니고 있는데 이수(螭首)를 지닌 것과 머리장식이
없는 비석도 섞여있다. 광주를 다스렸던 광주유수(廣州留守)와 광주부윤<廣州府尹, 광주유수
와 같음, 지금의 광주시장>, 수어사(守禦使) 등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로 정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비석을 받은 이도 있겠지만 마땅한 선정이나 치적도 없음에도 비석
만 챙긴 작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비석 건립을 내세워 돈까지 뜯은 관리도 있었음) 저 중에
과연 비석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물음에 비석들도 부끄러운지 침
묵으로 일관한다.

▲  뒤쪽에서 바라본 남한산성 비석군

▲  회장석(?)을 차지한 비석 4기

▲  남문 직전에 자리한 또 다른 비석 8형제

▲  남문 남쪽 성곽 (남옹성, 검단산 방향)


▲  남한산성 남문<지화문(至和門)>

해발 370m 고지에 자리한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큰데 선조(宣祖) 시절에 남문과 동문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문이 있
었음을 알려준다.

병자호란 때는 무능했던 인조(仁祖)가 서울과 백성들을 내버리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
산성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이 문으로 들어섰으며 1779년에 성곽을 개축하고 새로 문루를
달면서 지화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성문 높이는 약 4.75m, 폭 3.35m, 길이 8.6m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虹霓石)을 쌓아
만들었으며 홍예문 좌우 성벽은 자연석을 수평줄로 맞추어 막돌 쌓기로 다졌다. 1976년 문루
를 복원했으며, 남문터널이 생기기 전까지 차량들이 이 문을 통해 산성으로 오갔다. 하지만
문 폭이 좁다 보니 차량 교행이 어려워 자주 정체가 발생했으며, 밑에 남문터널이 뚫리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차들이 다녔던 남문 주변 길은 산책로로 탈바꿈되어 뚜벅
이들의 공간으로 해방되었다.

여기서 남문을 벗어나면 바로 성남시 땅으로 성남과 광주 경계선이 산성을 따라 조용히 이어
지며 북쪽 성곽길이나 산책로로 가면 서문, 북문으로 이어지고, 남쪽 성곽길은 신남성, 남옹
성, 동문, 검단산으로 이어진다.


▲  남문 북쪽 성곽 (서문, 북문, 수어장대 방향)

남문 주변 쉼터에서 속세에서 가져온 김밥과 캔커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성곽길을 따라 북
쪽으로 움직였다. 성곽길은 영춘정 부근까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동쪽에 있는 산책로는 느긋
한 숲길이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된다.
남한산성은 이 땅의 오래된 산성 중 보존 상태가 제일 좋은 편에 속하며 조망도 일품이고 볼
거리 또한 넉넉하여 성곽길을 거니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한산성에 대
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성곽길 동쪽 산책로 (남문에서 서암문 방향)
성곽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서암문에서 합쳐진다.

▲  유연한 곡선으로 흘러가는 남한산성 (남문 주변)
남문 너머 능선에 3개의 남옹성(南甕城)과 남장대(南將臺)터가 있고 그 남쪽 검단산
정상에 남한산성의 외성(外城)인 신남성(新南城) 돈대(墩臺)가 있다.
(신남성 돈대는 군부대 안에 있어 접근 불가임)
 

※ 병자호란(丙子胡亂)의 한 맺힌 현장으로 유명한 남한산성(南漢山城) - 사적 57호
서울 북쪽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다면 동남쪽에는 그와 대칭되는 남한산성이 있다. (북한
산성은 북한에 있고, 남한산성은 남한에 있는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님)
해양대국 백제(百濟)의 초창기 도읍이었던 위례성(慰禮城)의 위치가 크게 아리송하던 시절(물
론 지금도 여전히 아리송하다)에는 남한산성이 위례성 자리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다가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松坡區) 지역이 위례성<한산(漢山)> 자리로 의심을 받으면서(물론 이들 지역
도 정답은 아니다) 남한산성 위례성설은 쏙 들어간 상태이다.
게다가 산성 안에서 백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 2곳과 저장용 구덩이 8곳이 나왔을 뿐, 정작
성곽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위례성은커녕 백제의 어떠한 도시나 요새도 없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약간의 집터가 나온 것으로 보아 조그만 마을이 있었던 모양임)

673년 신라는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그것을 남한산성
의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북문과 동장대(東將臺) 사이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에서
8세기 중반 성곽 흔적이 나왔고 행궁터 일대에서 신라시대 대규모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하지
만 이 역시 정답은 아니다. 왜정(倭政) 때 왜열도 원숭이들과 식민사관 쓰레기들이 백제와 신
라의 역사를 크게 축소 왜곡시키면서 한산주를 경기도 일대로 멋대로 비정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중반 몽고(원)가 징그럽게 침공하여 한강을 넘자 관리와 군사, 백성들이 광주성(廣州
城)으로 들어가 그들과 싸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광주성이 이곳인지는 역시나 불투명하며
, 고려 때 건물터가 여럿 나온 것이 고작이다. <그 시절 광주 고을의 중심지는 남한산성 북쪽
밑인 하남시 춘궁동(春宮洞) 지역으로 여겨짐>

조선 초에는 '일장산성'이라 불렸는데 성 둘레는 3,993보였으며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 7곳, 논밭 124결이 있어 형편도 넉넉했다.


▲  성곽길 속으로 빠져들다 (남문~영춘정 구간)
그에게 한없이 빠져들다가 저 속으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남한산성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드러낸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만주
족)이 만주에서 후금(後金)을 세웠는데 광해군(光海君)이 중립외교 정책으로 그들을 다독거리
며 좋게 길들였다. 허나 1623년 서인(西人) 패거리가 반란<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
해군을 폐위하고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왕위에 올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들은
광해군의 후금 정책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로지 명나라에 대한 친분을 강화했다.

조선의 무시를 받은 후금이 속칭 뚜껑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혹시 모를 그들의 공격에
대비코자 1624년 남한산성을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쌓았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1580~1637)에게 축성을 명해 2년에 공사 끝에 둘레 6,297보, 여장
(女牆) 1,897개, 옹성(甕城) 3개, 성랑(城廊) 115개, 문 4곳, 암문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을 다지거나 마련했으며, 광주부의 관청을 산성 안으로 옮겨 광주의 중심지로 삼는 한편 행궁
과 관청 건물을 여럿 지어 만약에 대비했다. 또한 축성 공사에는 승군(僧軍)도 적지 않게 동
원했는데 그들의 거처와 무기 보관을 위해 장경사(長慶寺) 등 7개의 절을 지었다.

1636년 12월, 청 태종(太宗)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명나라만 찾는 조선을 혼내주고자 20만 대
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다. 그 사건이 그 유명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서둘러 강화도(江華島)로 줄행랑을 치려고 했으나 청이 그 길을 미리 차단하자 남한산
성으로 도망쳤다. 청태종은 남한산성과 가까운 송파 삼전도(三田渡)에 군영을 설치하고 산성
을 포위했는데 죽자 살자 덤비지는 않고 소수의 군사로 살짝 찌르기만 했다. 산성 내의 열악
한 사정을 이미 파악하여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청군은 여유롭게 주변을 공
격하거나 약탈하면서 산성을 도우러 전국에서 달려온 원군들을 쫓아내며 항복을 기다렸다. (
남한산성을 도우러 온 구원군은 모두 패하거나 도중에 회군함)
그해 유난히도 극성인 겨울 추위, 식량 부족, 군사들의 사기 부족, 거기에 원군까지 끊기면서
항전 40여 일만에 인조는 항복을 했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가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
을 치르게 된다.


▲  남문과 저만치 멀어지다

병자호란을 호되게 겪은 이후 남한산성은 비상 피난처로 그 가치가 커졌다. 숙종(肅宗) 시절
에 봉암성(峰岩城)과 한봉성(漢峰城) 등의 외성(外城)을 쌓았으며 영조(英祖) 때인 1744년에
는 남장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정조(正祖) 때인 1779년 벽돌로 성곽과 여장을 수축하고 성문
을 중수하고 성 안에 행궁과 관청, 창고, 여러 방어시설을 만들어 북한산성에 버금가는 단단
한 성으로 다져놓았다.

1905년 이후에는 왜군이 남한산성 사찰에 보관중인 무기를 압수하거나 파괴했는데 그 과정에
서 화약이 폭발해 장경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절이 소실되어 쓰러지고 만다. 또한 고약한 왜정
이 행궁과 관청 다수를 파괴하면서 현절사와 숭렬전, 수어장대 등 조선 후기 건물 일부와 성
곽, 성문만 남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 정상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단단하게 성곽을 쌓았다. 성곽 바깥쪽은 경사
가 급하나 안쪽은 완만해 방어에 꽤 유리하며 거기에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외성 3개와
5개의 옹성까지 지어놓아 방어력을 가득 높였다.
성문은 동/서/남/북 4개가 있고 암문은 봉암성에 4곳, 한봉성에 1곳을 포함하여 모두 16개가
있어 이 땅의 산성 중 가장 많은 암문을 지니고 있다. 성벽에는 중심 성에 4곳, 봉암성과 한
봉성에 1개씩 치(雉)를 설치했다.
그리고 제1남옹성에 8곳, 제2남옹성에 9곳, 제3남옹성에 5곳, 장경사 부근 2곳, 신지옹성 2곳
, 연주봉옹성과 봉암성 2곳에 포루(砲樓)를 설치했으며, 장대(將臺)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설치했으나 지금은 서장대(수어장대)만 남았다. 또한 125곳의 군포(軍鋪, 초소)를 두었는데,
이들은 2~3칸 규모이며 소금을 묻던 매염처(埋鹽處)와 숯을 묻던 매탄처(埋炭處)가 있었다.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7,545m로 외성과 옹성을 포함하면 무려 12,356m에 달한다. 성곽 높이는
최대 7.3m로 고된 세월을 겪었음에도 산성이 잘 남아있고 부속 시설들이 많이 남아있어 이 땅
의 산성 중 가장 상태가 좋다. 그로 인해 2014년 6월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의 지
위까지 얻는 등, 그 명성과 위엄이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천하 굴지의 명소로
성장했다.

* 남한산성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일대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 031-
  8008-5155)
*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문과 영춘정 사이에서 바라본 성남시내(분당 포함)
이 땅의 푸른 하늘을 앗아간 중공 미세먼지의 내습으로 시야가 꽤 흐리다.

▲  남한산성 영춘정~남문 성곽 능선과 검단산(鈐丹山, 534m)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신남성을 품은 검단산이다.

       ◀  8각형 모습의 영춘정(迎春亭)
청량산의 일원인 천주봉 정상(天柱峰, 462m)에
둥지를 튼 정자로 간단히 팔각정이라 불리기도
한다. 1957년에 세워진 20세기 중반 정자로
1972년 현 자리로 이전되었다.


♠  청량산의 지붕 주변 (서암문, 청량당, 수어장대)

▲  영춘정 주변 성곽길

▲  영춘정 주변에서 바라본 위례신도시
서울 송파구와 성남시(창곡동), 하남시(학암동) 경계에 닦여진 탓에 하나의
신도시에 무려 3개의 시(市)가 정립된 이상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  성 밑에 작게 뚫린 서암문(西暗門, 제6암문)

영춘정에서 5분 정도 가면 성곽이 작게 입을 벌린 곳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의 제6암문인 서
암문이다.
암문(暗門)이란 비상용 문으로 이 서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해
작게 자리하여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게끔 했다. 게다가 북동쪽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문의 모습은 홍예식이 아닌 평거식(平据式)으로 높이는 성인 남자 키 정도이며 폭은 거의 성
인 1인분 수준으로 딱 암문 사이즈에 맞다. 병자호란이 끝나가던 1637년 1월 23일 밤에 청군
이 습격하자 이를 크게 때려잡았는데 그 사연으로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破敵地)'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 봐야 겨우 수십 명 죽인 것에 불과함)


▲  속세를 향해 작게 벌린 남한산성의 입, 서암문의 안쪽

▲  청량당(淸凉堂) -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3호

서암문에서 바로 동북쪽 오르막길을 오르면 기와집이 여럿 나타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서
쪽에 돌담을 두른 집이 청량당, 그 동쪽 높은 곳에 수어장대가 있다.

청량산의 이름을 딴 청량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사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이회(李晦)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가 봉
안되어 있는데 그들의 영정은 6.25전쟁 때 모두 분실되어 이후에 다시 그려 넣었다.

사당의 주인공인 이회는 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남쪽 부분을 담당했던 관리였다. 그는 열심
히 공사를 진행했으나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자 공사비를 탕진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
며 사형대에 강제로 오르게 되었다.
이회는 죽음을 앞두고 침착하게 입을 떼며
'내가 죽을 때 매 1마리가 날라올 것이오. 만약 매가 날라오지 않는다면 내 죽어 마땅하나 매
가 날라온다면 나에게 죄가 없는 줄 아시오!'
유언을 남겼다.

이회가 죽자 어디선가 매 1마리가 날라왔는데 부근 매바위(수어장대 옆에 있음)에 앉아 슬프
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회의 죄과를 다시 살펴보자는 여론이 일어나 조사해보니 다
른 구간보다 더 튼튼하고 완벽하게 성을 지었으며 공사비를 탕진하거나 빼돌린 것도 전혀 없
었다. 즉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한편 이회의 부인은 행상을 하면서 축성 공사비를 마련했다. (또는 경상/전라/충청도를 돌면
서 축성비를 마련했다고 함) 공사비를 들고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남편이 처단되었다는 아주
기가 막힌 소식을 듣고는 그 충격에 한강으로 달려가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역시나 무능했던
인조와 쓰레기 같은 서인패거리의 천박한 클래스가 제 역할 잘하던 멀쩡한 사람들을 아주 비
참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많이 미안했는지 수어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들의 넋을 달래주었고 이회 부부의 억
울한 넋에 동정심을 느낀 백성들이 찾아와 굿을 하고 절을 하면서 자연스레 민간신앙의 현장
까지 도맡게 되었다. 그래서 제사일에는 무당들이 찾아와 도당굿을 벌인다.
지금은 제사일 외에는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어려우나 바로 옆 수어장대에서 건물 내부
를 제외하고 거의 다 보인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 보물 2,153호

청량당 동쪽 높은 곳에는 남한산성의 상징이자 대표 모델인 수어장대가 있다. 남한산성에 전
하는 늙은 건물 중 제일 규모가 크며(성문 제외)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으로 원
래 이름은 서장대(西將臺)이다. <서대(西臺)라 불리기도 했음>
이곳은 청량산 정상으로 산성 내부와 주변(서울 송파, 강동 지역이 잘 보임)이 훤히 바라보여
자리 하나는 아주 좋다. 하여 이곳에 장대를 세웠고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守禦廳
)의 본부 역할도 종종 하게 되어 수어장대라 불리게 되었다.

1624년에 단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여기서 군사를 지휘했으며 1751년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영조의 명으로 1층을 덧씌워 2층으로 늘렸다. 그리고 1896년 광주유수 박
기수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수어장대 1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2층 4
면의 바깥 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2층 접근이 금지되어 있으
며, 1층 마루도 바깥 부분에 한해 잠깐 엉덩이를 걸칠 수 있다. (마루로 들어가는 것은 안됨)

▲  수어장대 1층 마루
드러누워 한숨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마루이다.

▲  1층 천정에 그려진 구름무늬들
구름 모습이 마치 대변에서 막 나온
물건들(?) 같다.

▲  굵직하게 쓰인 수어장대 현판의 위엄

▲  키는 작지만 옆으로 적당히 퍼진
수어장대 소나무


▲  정면에서 바라본 수어장대의 위엄 돋는 모습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 모습이 꽤 장관이다.

▲  수어장대의 옆 모습과 땅바닥에 바짝 붙은 돌기둥
(탁지부측량소 삼각점)

▲  탁지부측량소 삼각점(度支部測量所 三角點)
-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7호


수어장대 서쪽을 가만히 살펴보면 땅바닥에 바짝 붙은 작은 기둥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는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으로 만약 안내문이 없었다면 별 의미도 없는 조그만 돌로 여기고 지
나치기 쉽다.
기둥 머리에는 '+'가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 '度支部'(탁지부)라 쓰여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
고 있는데, 난쟁이 반바지보다 작은 그는 겉보기와 달리 제법 의미가 깊은 존재로 순종 시절
에 탁지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지적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경기도와 경북 일부 지
역에 설치했다. 그중 하나가 이곳 삼각점이다. 1910년 이후 왜정이 전국에 삼각점을 새로 심
으면서 이와 구별하고자 탁지부에서 심은 삼각점을 구소(舊小)삼각점이라 하였다.

현재 순종 때 설치된 삼각점이 10여 곳 남아있는데 그중 최초로 이곳 삼각점이 기초 지방자치
단체 문화재 등급인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허나 이런 소중한 현장을 고작 향토유적에 두
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지방문화재나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빛바랜 안내
문도 정비하여 세상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  무망루(無忘樓) 현판을 머금은 1칸짜리 기와집과
이승만 전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은 전나무


수어장대의 별칭으로는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의 '무망루'도 있다. 이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했던 개망신, 그리고 효종(孝宗)이 청에게 받은 치욕을 갚고자 대륙 정벌을 추
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나? 결국 정신을 못 차리고 외세에 징하게도 털려 땅도 잃고 나
라도 잃고 정신과 역사까지 잃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천하 제일의 호구 국가, 조선의 한계였
다.

무망루 현판은 원래 수어장대 2층 안쪽에 걸려있었는데 그 2층을 보통 무망루라 하였다. 그러
다가 1989년 1칸짜리 건물을 마련해 따로 보관하고 있다. 현판 밑에는 무망루의 사연을 머금
은 표석을 두었으며, 그 옆에는 1953년 9월 6일, 이승만 전대통령이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기
념으로 심은 전나무가 높이 자라나 무망루 현판 건물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무 옆에는 '리(
이승만)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라 쓰인 비석이 멋대가리 없이 서 있음>

▲  영조가 남긴 무망루 현판

▲  매바위와 수어서대(守禦西臺) 바위글씨

수어장대 동남쪽 구석에는 '수어서대' 바위글씨를 품은 매바위가 있다. 수어서대는 수어장대
를 뜻하는 것으로 '수어청의 본부인 서장대'를 줄인 말이라고 보면 된다.
매바위는 이회가 처형되었을 때 매가 날라와 앉았다는 그 바위로 과연 매가 앉았는지는 모르
지만 오랜 세월 청량당을 수식하는 바위로 사람들이 막걸리와 과일, 고기 등을 가져와 예를
올린다. 내가 갔을 때도 50대 아지매가 바위 앞에 과일과 고기육포를 진열하고 막걸리를 그에
게 부었다. 그래서일까 바위의 아랫도리가 다소 붉게 보인다.

수어장대 정동쪽으로 1리 거리에 남한산성 행궁이 있는데 그곳을 이어주는 길은 막혀있다. 하
여 수어장대는 막다른 곳이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성곽길로 나가 남문이나 서문 방
향으로 이동해야 된다.

* 청량당, 수어장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815-1, 815-2


♠  남한산성 서문, 국청사

▲  남한산성 수어장대입구~서문 구간

남한산성 수어장대입구에서 서문 구간은 느긋한 성곽길의 연속이다. 여장 너머로 위례신도시
와 서울 송파구 지역이 바라보이는데, 중원대륙에서 개념 없이 날라온 미세먼지로 시야가 꼬
질꼬질해 바로 밑 위례신도시도 흐릿하게 보인다.
서문까지는 8분 정도 걸리는데 그 중간에 산성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바위 비석인 병암남성
신수비가 있다.


▲  바위를 비석으로 삼은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 新修碑)

병암남성신수비는 병풍처럼 둘러진 큰 바위와 작은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일종의 마애비(磨
崖碑)이다. 두 바위 피부에 네모난 홈을 다지고 그 안에 글씨를 넣었는데 '병암'은 바위의 이
름으로 그들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남성은 남한산성, 신수는 새로 고쳤다
는 뜻이다.

바위 피부에는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이 1779년 6월 18일까지 약 50여 일 동안 남한산성을 보
수한 사실을 적어 놓았는데 비문은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글을 썼다. 성곽을 증
축하는데 돈 1만 냥, 쌀 900석이 소요되었으며,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 아래 벽돌
과 석회를 구워 운반하는 관리자와 보수 영역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牌將)의 이
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바위 동쪽 구석에는 '병암(屛岩)' 2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그 부근에 작게 '李民
夏 十歲己未書(이민하 십세기미서)'라 쓰여 있는데, 이는 병암(屛岩) 이민하가 10살이던 1859
년(기미년)에 쓴 것이다. 이들 글씨 덕에 자칫 이름도 없이 흘러갈 뻔했던 이 바위는 이름 두
자를 남기게 되었고 이렇게 나의 관찰을 받게 되었다.


▲  남한산성의 서문, 우익문(右翼門)

서문(우익문)은 남한산성 서북쪽 끝에 자리해 있다. 병자호란이 막바지에 이르던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송파 삼전도로 내려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는데 그때
이 문을 나섰다. 서문이 서울과 송파로 나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허나 길이 좀 각박하여
내려갈 때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 길을 힘들게 내려가며 송파로 향했을 인조의 심정은
정말 지옥으로 끌려가는 기분 그 이상이었겠지. 하지만 어찌하랴 지네들이 모두 자초한 것을.
그런 꼴통 같은 위정자들 때문에 백성과 병사들의 고통은 실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1799년 성문을 수리해 우익문이라 했으며 성
문을 나서면 하남 학암동과 서울 마천동으로
바로 이어진다.
성문 높이는 2.5m, 폭 2.1m로 성곽 덩치에 비
하여 성문의 규모가 작아 거의 암문처럼 보인
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
로 근래 손질되었다.

◀  서문의 안쪽 모습

▲  서문 주변 성곽 (북쪽 방향)

▲  서문 주변 성곽 (남쪽 방향)

▲  국청사의 명물인 약수터

▲  국청사 일주문(一柱門)

서문에서 잠시 성곽길을 버리고 산성리 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조그만 절, 국청사가 마중
을 나온다.
국청사(國淸寺)는 1624년 도총섭(都摠攝)이던 각성대사(覺性大師)가 세운 것으로 남한산성 내
에 세운 7개 절의 일원이다. (이전부터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를 포함해 9개의 절이 있었음)
병자호란 이후, 만약을 대비하여 무기와 화약, 군량미를 이들 절에 비밀리에 보관했으며, 국
청사에서는 겹처마 지붕 천정 안에서 화약을 제조했는데 1895년 이후에는 의병들이 무기창고
로 사용하기도 했다.
허나 1907년 8월, 이들 무기창고의 존재를 파악한 왜군이 무기를 압수하고 제거했는데 그 과
정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면서 절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는 망월사, 개원사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터만 남아오던 것을 1968년 보운(普運)이 중건했으며 1986년 최계순이 땅 1,003평을 기
증하여 절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하여 주지 선건(禪杰)이 그 땅에 삼
성각, 요사채를 새로 지었고, 1998년 대웅전을 중건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천불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보물로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넘어왔다는 신라 후기 불상이 있는데 원래 천불(千佛) 중 하나였다고 한
다. (심원사 출신 불상과 보살상이 서울과 경기도의 많은 절에 흩어져 있음) 허나 그의 존재
를 알지 못해 친견하지 못했으며,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 적힌 병풍과 송
시열(宋時烈)의 친필로 된 책 3권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국청사는 예로부터 우물이 유명한데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금닭이 홰
를 치며 울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효자가 이 약수로 아버지의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대충 내용을 풀어보면 현재 서울 강동구에 살던 둔촌 이집(李集)이 큰 병에 걸린 아버지의 병
을 치료하고자 남한산성에서 100일 기도를 했는데 어느 날 산신이 꿈에 나타나 그의 지시대로
우측 벽에 쌓인 나뭇잎을 긁으니 글쎄 맑은 샘물이 나왔다고 한다. 하여 그 물을 가져다 부친
에게 먹이니 병이 나았고 <또는 우물에서 잉어(또는 금붕어)를 잡아서 병을 치료했다고 함>
그 사연으로 '효자우물'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특히 피부병에 좋다고 해서 피부병 환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고 하며, 그 우물은 정비되어 절
부근에 있으나 어리석게도 그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 물을 다시 받아 경내 동북쪽 산길에 약
수터를 닦으니 그것이 '국청사 약수터'이다. 그 약수터는 다행히 내 눈에 띄어 졸고 있는 바
가지를 깨워 몇 모금 들이켰는데 맛이 시원하여 국청사는 정말 약수(샘물)의 절이라 칭할 만
하다.

* 국청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803 (남한산성로780번길 105 ☎ 031-743
  -6801)


▲  국청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8년에 중건되었다.

▲  국청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과
천불전(千佛殿, 중간에 보이는 건물)


▲  다시 성곽길로 (서문~북문 성곽길)
남한산성 구간 중에서 서문~북문 구간이 가장 느긋하고 상큼하다. 사극에도
많이 나왔던 현장으로 성곽 탐방로가 광장처럼 넓고 질감이 좋다.

▲  서문~북문 구간에서 바라본 하남시 상사창동(고골) 지역
중공산 미세먼지로 시야가 무지하게 탁하다.

▲  오늘도 구불구불 흘러가는 남한산성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1636,12~1637,1월 당시에는 병자호란의 눈물겨운 현장이었다.
그 당시 흔적은 장대한 세월에 거의 씻겨 내려가 실감이 덜하다. 하긴 앞만 보고
질주하는 세월에게 있어 병자호란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잠깐의 먼지에 불과하다.

▲  동쪽을 향해 흘러가는 남한산성

▲  북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  남한산성 마무리 (북문, 상사창동 연자마)

▲  남한산성 북문, 전승문(全勝門)

북문은 해발 365m 지점에 자리해 있다. 1624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1779년 성문을 손
질하면서 '전승문'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북문 밖은 바로 하남시 땅으로 남한산성에 필요한 세곡(稅穀)과 군수품을 북문으로 운반을 했
다. 즉 남한산성의 목구멍인 셈이다. 북문이 동,서,남문에 비해 한강과 가깝고 접근성도 괜찮
으며, 북문 밑 고골에 상사창, 하사창 등의 보관창고가 있어 운반하기도 수월하다.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석을 쌓은 홍예문으로 높이 3.65m, 폭 3.25m이며 성벽 두께는 7.1
m에 이른다. 문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성문의 이름을 알려주는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  북문 문루의 옆 모습

▲  북문의 바깥 모습

북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더 들어가면 벌봉과 한봉성, 동문으로 이어진다. 허나 거기
까지 돌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하고 북문에서 고골로 내려가기로 이미 작심한 상태라 여기서
남한산성과 쿨하게 작별을 고하며 북문을 나섰다.

북문에서 고골로 내려가는 길은 초반에 경사가 좀 있을 뿐, 이후는 완만하다. 게다가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나무데크길까지 깔아놓아 이동하기도 편하다. 길 옆에는 '고골'이라 불리는 계곡
이 있는데 그는 '덕풍천'의 상류로 상사창동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흘러간다. 여름 제국(帝國)
시절에는 피서지로 사람들이 몰리기도 하나 지금은 모든 것이 겨울에 잠겨 황량하기만 하다.

▲  북문 주변 성곽의 바깥 모습

▲  북문에서 고골로 내려가는 길


▲  나무데크가 닦여진 고골 산길

▲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는 고골

고골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세미(稅米)길이라 불렀다. 이 길을 통해 남한산성에 필요
한 군량미와 세곡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천하 각지에서 징수한 군량미와 세곡은 한강을 통해
둔지나루와 창모루까지 수송하여 거기서 보관했다가 사람이나 마차, 소를 통해 고골에 자리한
상사창(上司倉)과 하사창(下司倉)까지 운반했고 거기서 사람을 통해 산성으로 운반했다.


▲  흙길에서 포장길로 바뀐 고골로

▲  상사창동 연자방아를 품고 있는 투박한 모습의 방앗간

북문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흙길이 끝나고 1차선 크기의 포장길이 나타난다. 민가와 식당들
이 하나 둘 모습을 비추어 속세에 다 내려왔음을 느끼게 하는데 법화천을 건너면 제법 집들이
모인 법화골 마을이 있다. 여기서 잠시 앞을 버리고 동쪽 길로 꺾어 마을로 들어가보기 바란
다. 그렇다고 깊숙하게 들어갈 필요도 없다. 1분 정도면 충분하며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
곳의 오랜 유물인 상사창동 연자방아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상사창동 연자방아(연자마) -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82호

연자방아는 방아틀에 연결된 동그란 모양의 돌로 말과 소가 방아틀을 돌려 곡물 껍데기를 벗
기거나 밀을 빻았던 농기구이다. '연자마(硏子磨)', '연자매', '돌매방아'라 불리기도 하며,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은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아래위가 잘 맞닿도록 하여 뱅
뱅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
밑돌을 '알돌','알착','바닥돌'이라 부르고, 그 위의 굴리는 돌을 '웃돌','웃착','방엣돌','
맷돌'이라 부른다. 뜨는 받침돌은 '암돌', 굴리는 돌은 '숫돌'이라 한다.

이곳 연자방아는 화강암으로 다져진 숫돌과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암맷돌은 직경 120cm,
숫맷돌은 직경 100cm, 두께 43cm 크기이며 숫돌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네모난 방아틀이 있다.
보기와 달리 그리 오래되지 않은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법화골 마을에서 공동
으로 사용했으나 그를 대체할 기계들이 생겨나면서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그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보존해 마을의 유산으로 삼았고 이제 100년 남짓 묵었지만 수도권에
서 거의 흔치 않은 늙은 연자방아라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연자방아를 머금고 있는 집은 방앗간으로 원래 8개의 기둥에 볏집으로 지붕을 한 8각형의 정
자형 건물이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조금 손질되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빼곡히 난간을 둘
러 사람들의 손길을 막고 있지만 100년도 되지 않은 옛 민속유물인 만큼 손으로 만지게 해주
었으면 좋겠다.

* 상사창동 연자방아 소재지 : 경기도 하남시 상사창동 346-2

▲  북쪽에서 바라본 금지된 방앗간

▲  옆에서 본 상사창동 연자방아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 쓸쓸해 보인다. 한참 움직여
야될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마을의 문화유산으로 한가롭고 갑갑한 삶
을 사니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 할까?
이렇게 방앗간에 가둬둘 것이 아니라 연자방아 체험 행사 등을 마련해 그가 다시 몸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죽은 민속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유물로 말이다.

연자방아가 있는 상사창동(고골, 법화골)은 동,서,남이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
있는 막다른 곳이다. 남쪽은 남한산성 북문과 연결되어 일찌기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며, 산으
로 3면이 막혀있다 보니 바깥 세상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상사창동 연자방아를 끝으로 남한산성 3월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막을 내린다. 너무 많은 곳을
복습하고 둘러봤더니 가히 배가 터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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