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듯 여름인듯 날씨가 무척이나 포근했던 5월의 한복판에 구의동(九宜洞)에 있는 아차
산 영화사를 찾았다.
영화사는 10번 넘게 인연을 지은 절로 한강 남쪽에 있는 봉은사(奉恩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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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가까운 곳의 적당한 후식 메뉴를 물색하다
가 이곳을 택했다.
♠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입문
▲ 영화사 일주문(一柱門)
아차산(峨嵯山) 남쪽 끝에 둥지를 튼 영화사는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지역에서 제일 큰 절이
다. 동시에 아차산의 대표 사찰이자 가장 큰 절집이기도 하다.
영화사는 672년에 그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용마봉(龍馬峰,
용마산) 밑에 절을 짓고 화양사(華陽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자료
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그 시절 의상은 부석사(浮石寺)와 옥천사(玉泉寺) 등 자신이
키우던 화엄종(華嚴宗) 사찰 10개-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를 짓고 관리하느라 바쁜 나
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사는 그의 화엄십찰이 아님)
그러니 의상의 창건설은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영화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경내에 조
선 초에 조성된 미륵석불이 있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에 있던 시절, 절 등불이 무려 8km 이상 떨어진 한양도성까지 비쳤다고 한다. 그 정도
면 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등불이 궁성(宮城, 도성)까지 비추
는 것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명을 내려 1395년 절을 군자동(君子洞)
어딘가로 강제 이전시켰다고 한다.
이후 중곡동(中谷洞) 산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07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영화사로
이름
을 갈았다. 1909년 도암(道庵)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 월주(月珠)가 중창하면
서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미륵전, 선불장, 요사채, 유치원 등 7~8동의 건
물이 있으며, 4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와 하얀 피부의 늙은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느티나무
는 영화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기 이전부터 있던 것이고 미륵석불입상은 중곡동에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힘들게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20세기 초에 조성된 독성탱과 산신탱이 전하며, 1909년에 지어진 삼성각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허나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이렇다할 지정
문화유산은 없는 실정이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넓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학생들의 법회활동이 매우 활발해 제법 젊
은 절이다. 아차산 밑에 있기는 하나 아차산과 이어지는 산길은 절에서 모두 끊어버렸다. 하
여 절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가고자 한다면 일주문으로 다시 나와서 절 서쪽이나 동의초교
동쪽에서 산길을 이용해야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주차장이 나오고 그 뒤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느티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높이 19.5m, 둘레 4.1m의 덩치로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82년 10월) 추정 나이가
약 37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여 년이 덧없이 얹혀져 410살 이상이 된다. 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로 늘 좋은 질감의 그늘을 드리워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
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주차장의 차들은 뜨거운 햇살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 영화사 선불장(選佛場)
대웅전에 못지 않은 우람한 규모로 선방 및 요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장대한 규모의 영화사 대웅전(大雄殿)
1992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대웅전 석가삼존상과 붉은 기와지붕이 켜켜이 이루어진 닫집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
사월초파일)이 1주 정도
남은 상태라 대웅전 뜨락 허공을 벌써부터
오색연등으로 물들였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공을 접수한 그들로 인해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인데, 옛날 이야기를 보면 태초(太初)에는 하늘과 땅이 붙어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저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구름보다 훨씬 높은 뫼에 올라가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색연등이 허공의 빈틈도 없이 깔려 낮은 하늘을 이룬다.
▲ 오색연등이 영롱하게 허공을 뒤덮은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밑은 밤처럼 어둡고, 연등 위는 구름 위의 세상처럼 무척 환하다.
▲ 영화사에서 제일 늙은 집,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옆에는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09년에 도암이 지은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현판은 물론 겉모습까
지
고색의 흔적이 꽤 자욱하여 이제 120년 정도 되었건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지방문화
재의 자격이 충분해 서울시에 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하면 100% 통과될 듯 싶은데 절에서는 아
직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매우 젊은 칠성탱
▲ 20세기 초에 조성된 늙은 독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탱
산신탱은 독성탱과 비슷한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와 어린 비서인 동자(童子), 그리고 산신(山神)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아
차산 자락이니 저 산신은 자연히 아차산 산신이 될 것이다.
거의 고양이처럼 그려진 호랑이는 산신 뒤에 자리해 있는데 얼굴은 산신의 왼쪽, 꼬랑지는 오
른쪽에서 살랑살랑거린다. 그림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술과 간식, 음식들로 가득해 초파일 특
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 하얀 연등이 하늘을 훔친 삼성각 뜨락
죽은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푸른 하늘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우울한 느낌이다. 반면 대웅
전
뜨락에는 오색 연등이 펄럭이고 있어 활력도 넘치고 보기에도 좋다.
(역시 색이 있어야 보
기에도 좋음)
♠
영화사 마무리 (미륵석불입상)
▲ 경내에서 미륵전으로 인도하는 숲길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구석진 동쪽 산자락에 미륵석불의 거처인 미륵전이
있다.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엮어진 숲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미륵전이 모습을 비추는데
느긋한
경사의 계단길로 이루어져 있어 누구든 오르기 쉽다.
▲ 숲속에 묻혀있는 미륵석불의 거처, 미륵전(彌勒殿)
영화사에 왔다면 대웅전
주변만 살피지 말고 미륵전에 깃든 미륵석불입상도 꼭
친견하기
바란
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영험하다고 소문난 석불이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홀로 떨어진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팔작지붕 건물로 미륵석불 덩치에
맞게 짜여졌다. 석불의 키가 3.5m라 건물 높이는 5m 정도 되며 건물의 겉모습에서 고색이 제
법 느껴져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전 앞에는 가건물을 길쭉하게 다져 예불
공간으로 삼았는데 새벽부터 19~20시까지 개방해 그를 친견할 수 있게 했다.
미륵전 현판은 불교학자이자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가
쓴 것이다. 영화사도 생각이 있다면 그 현판을 떼어내 장작으로 땠으면 좋겠는데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듯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까지 친일매국노의 흔적이 더럽게 깔려있
어 천하의 정의구현을
소망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적지 않게 희롱한다.
▲ 미륵전의 주인, 미륵석불입상
영화사의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석불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에 대한 정성이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떡칠을 하는 바람에 원래 모습을 다소
잃었
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를 측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조각 수법도 그저
그런 수
준이라 늙은 석불임에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그의 몸에 짙게 깔린 하얀 때를 싹 제
거하여 인근 광나루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불입상처럼 제대로 된 재평가를 받았으면 좋겠
다.
불교에 관심이 지대했던
세조(世祖)가 그를 찾
아와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곡동에
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워낙 키다리에 거구
로 콧대가 높은 그를 옮기고자 여러 대의 우마
차를 동원해 며칠 동안 낑낑대며 옮겼다고
한
다. 그런데 하필이면 경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를 두었으니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불의 머리는 지나치게 큰 편으로 머리부터
눈, 코, 입, 귀, 검은 수염, 삼도가 그어진 목
까지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가슴 앞부분
을 드러낸 법의(法衣)를 걸쳤다.
왼손은 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린
여원인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현재 절에서는 그를 미륵불로 애지중지하고 있
으나 원래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다.
▲ 옆에서 바라본 미륵석불입상
▲ 미륵전 주변 숲길
미륵전 뒤쪽이 바로 아차산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끊겨있어 이곳은
사실상 영화사의
막다른 곳이 되었다. 여기서 아차산둘레길과 등산로가 뻔히
보이지만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처럼 바라봐야 된다.
▲ 무엇이 쓰던 물건인고? 미륵전 옆에 놓인 돌덩어리
미륵전 옆 바위에 인공이 가해진 동그란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생김새를 보아하
니 석불의 모자(갓) 같은데 이곳 미륵석불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형편없이 작다.
이 돌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고색의 때가 별로
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영화사가 이곳에 안착된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대한 세월에게 저
것을 지녔을 본체를 빼앗겨 저것만 겨우 남아있으며 정체성까지 상실되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
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일은 없다.
▲ 오색연등이 길을 비추는 경내~미륵전 숲길 ①
▲ 오색연등이 길을 비추는 경내~미륵전 숲길 ②
미륵석불을 끝으로 오랜만에 발을 들인 영화사 나들이는 상큼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이미 10
번 넘게 가본 곳이나 좋은 곳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우려먹는 법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
울 하늘 밑에 있고 내 즐겨찾기의 일원인 아차산에 있으니 비록 자주는 아니더라도 그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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