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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정동 늦가을 나들이 '

정동 고종의길

▲  정동 고종의길

덕수궁(경운궁) 중명전 구 러시아공사관

▲  덕수궁(경운궁) 중명전

▲  구 러시아공사관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따스한 날, 가까운 후배와
중구 정동을 찾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정동(貞洞)은 내 즐겨찾기의 일원으로 조선 최초의 능인 정릉<
貞 陵, 태조 이성계의 2번째 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 닦여진 곳이라 정동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태종
(太宗)에 의해 1409년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으로 추방되고 만다.

정동에는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으로 바쁘게 살았던 덕수궁(경운궁)과 궁궐 돌담길의 대명
사로 추앙을 받는 덕수궁돌담길이 있으며, 대한제국과 왜정(倭政) 시절에 형성된 근대건축
물을 많이 지니고 있어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시
절 우울한 현장들이 무지 많다 보니 기분을 씁쓸하게 하는 구석도 적지 않으나 이 땅을 거
쳐간 역사의 터라 소홀히 대할 수는 없다.


♠  덕수궁에서 가장 늙은 서양식 건물이자 을사늑약의
우울한 현장, 중명전(重明殿) - 국가 사적

▲  남쪽에서 바라본 중명전

정동 나들이는 시청역(1,2호선)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5호선 서대문역 5번 출구
나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시작해도 됨)
시청역에서 덕수궁돌담길(덕수궁길)로 들어서 정동길(정동교회~정동4거리)로 접어들면 정동극
장이 마중을 나온다. 극장 서쪽에는 중명전을 알리는 갈색 피부의 이정표가 살짝 손짓을 하는
데, 그 손짓에 따라 극장 옆 골목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붉은 피부결을 지닌 덕수궁<德壽
宮, 경운궁(慶運宮)> 중명전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덕수궁과 떨어져 있고, 덕수궁돌담길과도 100여m(직선거리) 거리를 두고 있어 '이곳이
왜 덕수궁 중명전을 칭하고 있지?' 고개가 갸우뚱할 것이다. 허나 이곳도 염연한 덕수궁의 영
역으로 고종(高宗)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덕수궁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중심 궁궐로 키우면
서 왕년에는 지금보다 3배 이상의 덩치를 지녔다. (덕수궁 북쪽과 서쪽, 남쪽, 정동 대부분이
덕수궁 영역이었음)
그렇게 덕수궁을 불리는 과정에서 중명전과 정관헌(靜觀軒), 석조전(石造殿), 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 건물도 여럿 지어졌다.

▲  중명전 현관

▲  중명전 현판의 위엄

중명전은 고종이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고자 장만한 것으로
1897년에 짓기 시작해 1899년 완성을 보았다. 이 땅 최초의 신식 도서관이자 덕수궁에서 가장
늙은 서양식 건물로 한성부(漢城府)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 사람 다이(J.H Dye)의 설계로 1
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1901년 10월 화재로 무너지자 1902년 회랑을 지닌 2층 건물로 크게 지어졌으며, 1906년 이후
'중명전'으로 슬쩍 이름이 갈린다. 건물 이름인 '중명(重明)'은 '일월(日月)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에 겹친다'는 의미로 이는 '제왕과 신하가 각각 제자리에 나란히 서서 직분을 다한
다'는 뜻이라고 한다.

1904년 대화재로 덕수궁 대부분이 주저앉자 고종은 이곳을 편전(便殿) 겸 폐현(陛見) 장소로
삼아 머물렀으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왜국(倭國)이 운 좋게 승리하자 고종은 심히 불안에
잠겨 미국대사관 영역인 중명전 뒤쪽을 매일 산책하며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이는 고종이
미국공사인 알렌의 배려 하에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그렇게 했다고 하니 우리의 장대한
역사와 영토를 싹 말아먹은 조선의 암울한 현실에 실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또한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그해 중명전은 영 좋지 못한 사건의 현장으로 휘말리게 되니 그 악
명 높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여기서 강제로 체결되었다.


▲  중명전 1층에 재현된 을사늑약의 현장

1905년 11월 9일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왜왕(倭王)의 친서를 들고 서울로 들어와 손탁호
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런 다음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을 초청해 조약 체결을 요
구했고 11월 10일과 15일 중명전(당시 수옥헌)을 찾아가 고종을 알현하여 조약을 요구하는 등
선을 넘는 행위를 마구 일삼았다.
허나 고종이 의연한 태도로 거절하자 11월 16일 자신이 머무는 손탁호텔로 조선 대신들을 초
청해 16시부터 19시 반까지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그리고 11월 17일 새벽, 왜군을 도성으
로 불러들여 덕수궁 대한문과 돌담 주변을 둘러싸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하야시 왜국공사
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5개 조약안을 요구했다. 또한 이토는 그를 구워삶아 각 대신
들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들여 연금시키고 조약 찬성을 강요했다.
그렇게 한규설을 비롯한 8명의 대신(大臣)과 이토가 중명전 서측 휴게실에 모였고, 15시에 고
종이 참석하여 어전회의가 열렸다. 허나 회의는 영 좋지 않은 쪽으로 선을 넘었고 이에 발끈
한 고종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조약을 반대한 한규설을 서측 휴게실에 감금하
고 학부대신(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外部
大臣) 박제순,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제 등
이른바 을사5적(乙巳五賊) 쓰레기들이 이토와 짜고 그날 20시 중명전 2층에서 을사늑약을 체
결하고 만다.

뜻을 이룬 이토는 11월 18일 0시 20분 덕수궁을 나갔고, 10시에 하야시 공사와 박제순이 최종
조인을 맺었다.

▲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던 을사늑약
체결 문서 (복제품)

▲  1907년 헤이그특사파견의 주인공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6년 황태자(순종)가 윤씨와 가례(嘉禮)를 올리자 외국 사신들을 이곳에 초청해 연회를 열
었으며, 1907년 7월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천하에 알리고자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
卨), 이위종(李瑋鍾)을 불러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했는데, 그것을 추진했던 곳이 중명전이다.
이에 발작한 왜정은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켜 이곳에 유폐했으며, 순종(純
宗)은 황태자 시절부터 제위에 오를 때까지 여기서 주로 지냈다.

1907년 7월 24일 통감 이토히로부미는 이완용, 송병준(宋秉畯)과 짜고 눈에 가시와 같던 조선
군대를 해산시키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했는데 그 현장이 이곳 중명전이었다.


▲  1925년 3월 중명전 화재 사건과 그 시절 사진

1910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 서울클럽)가
1915년부터 이곳을 빌려 사용했다. 경성구락부는 1888년 서울에 살던 서양 애들이 사교를 위
해 만든 조직으로 미국대사관 앞에 있다가 중명전을 임대 방식으로 차지하면서 1960년대까지
외국 애들의 놀고 먹는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중명전의 끝없는 추락에 화마(火魔)도 뚜껑이 폭발했는지 1925년 3월 12일 큰 화재가 발생했
다. 2층 전기실에서 시작된 불이 전체로 번져 외벽과 내부 복도만 남기고 싹 타버렸는데, 피
해 금액은 3만원에 이르렀다. 하여 서울클럽에서 공사비 일부를 분담해 중수했으나 지붕과 목
조바닥을 고치고 1층 입구의 포차 형태를 변경하면서 제모습을 크게 잃고 만다.

1945년 이후 오제도 검사가 공산당 패거리를 검거해 이곳에서 취조했다고 하며, 이승만 정권
이 조선 황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국유화하면서 중명전은 국가 소유가 된다. 그러다가 박정
희 대통령이 왜열도에 있던 영친왕(英親王)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1963년 11월 중명전 건물과
대지를 조선 황실에 돌려주었는데 이때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소유하게 된
다.
허나 의친왕(義親王)의 아들인 이수길과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가 사업을 제대로 말아먹으면서
대출을 갚지 못해 은행에 차압되었으며, 1977년 4월 개인에게 팔려 다시 황실의 품을 떠나게
된다. 이때 중명전 매각 대금의 일부가 이방자에게 넘어갔다.

이후 서울시에서 매입을 했다가 문화재청에서 2009년까지 복원공사를 벌여 세월이 잡아간 우
물터를 복원하고 건물의 원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그리고 2010년 개방되어 자유의 공간으
로 해방되기에 이른다.


▲  중명전 1층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명전은 1층과 2층을 중심으로 3층 다락방과 지하실을 지닌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다. 크기가
아담하여 지체 높은 궁궐 건축물보다는 민간이 주거용이나 상업용으로 지은 건물 같은데, 붉
은 벽돌로 지어져 고색의 향기와 고즈넉함을 더한다. 1983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
정되었으나 2007년 2월 덕수궁 영역에 포함되면서 국가 사적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국가
사적
인 덕수궁의 일원임)

중명전 내부는 계단이 딸린 현관으로 들어서면 된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
어서면 되는데, 보통 1층만 개방을 하며, 2층은 특별전 전용으로 특별전이 열릴 때만 잠깐씩
열어둔다. 허나 3층 다락방과 지하실, 1층과 2층 회랑은 통제구역으로 묶여 발을 들일 수 없
다. (1층 회랑은 종종 열어두는 경우도 있음)

1층에는 중명전의 내력과 을사늑약과 정미칠약조, 헤이그특사파견, 1925년 대화재, 외국인 구
락부 전락 등 이곳을 거쳐간 우울한 역사들이 정리되어 있어 시름과 한숨에 젖게 한다. 서울
과 정동에서 이곳만큼 암울한 역사를 많이 지닌 곳도 없을 것이며, 특히 왜정의 개짓거리를
알리는 몇 안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보기만 해도 피가 꺼꾸로 솟는 을사늑약 체결 현장 재현
과 중명전 관련 자료들이 깃들여져 있으나 오래된 유물은 없으며, 마음을 비우고 1바퀴 둘러
보는 것이 좋다.

▲  중명전을 거쳐간 옛날 이야기를 풀어놓은 중명전 1층 방들 ▲

▲  2층으로 오르는 계단

▲  이제는 무늬만 남은 붉은 피부의 벽난로


▲  중명전 1층 동쪽 회랑

중명전은 1층 현관과 동쪽, 서쪽에 회랑 복도를 빙 둘렀다. 2층도 비슷하게 회랑이 둘러져 있
는데, 아쉽게도 회랑은 접근이 통제되어 건물 바깥에서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바라
봐야 된다. (1층 회랑은 종종 개방되는 경우도 있음)

▲  1층 회랑 복도 (현관 서쪽)

▲  1층 회랑 복도 (현관 동쪽)


▲  중명전의 뒷모습

1층 밑에는 지하실이 있고, 3층 다락방이 있는 지붕에는 중명전을 따스하게 대펴주던 붉은 굴
뚝이 여럿 솟아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건물 뒤쪽에는 에어컨 시설
이 있어 전시실로 새롭게 살아가는 중명전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  만희당(晩喜堂)터와 돌담

중명전 뒤쪽이자 북쪽에는 전설이 되어 사라진 만희당터가 있다. 그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귀
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고종이 중명전(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침전으로 사용했다.
만희당은 창덕궁으로 옮겨져 낙선재(樂善齋)의 일부가 되었으며, 중명전 주변에 있던 흠문각
(欽文閣)과 경효전(景孝殿), 환벽정(環壁亭) 등 10동에 가까운 건물들도 창덕궁 복구에 투입
되거나 철거되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중명전이 경성구락부로 추락된 이후 이곳에는 구락부 소속의 수영장까지 생겨났는데, 그 수영
장도 언제 지어지고 없어졌는지 전하는 것이 없으며, 2009년 발굴조사 때 수영장 흔적과 만희
당 기둥 자리가 확인되었다. 이후 그 자리에 잔디를 곱게 덮어두고 만희당터 안내문을 닦아
세월이 잡아먹은 그들을 추억하게 한다.


▲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은 1905년 무렵 중명전과 만희당

▲  중명전 1층 동쪽 회랑

▲  중명전 우물

중명전 앞에는 주둥이가 굳게 닫힌 우물이 있다. 고종이 이곳에 머문 시절(1904~1907년)에 식
수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귀신처럼 사라진 것을 2009년 복원공사 때 발견하여 복원을 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지닌 그는 우물이긴 하나 수맥도 없는 무늬만
우물로 관람객들 안전을 위해 나무 뚜껑을 꽉 닫아두었다.

중명전은 남쪽을 제외하고 모두 막혀있는 궁색한 곳이라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 덕수궁 중명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11 (정동길41-11, ☎ 02-771-9951)
* 덕수궁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중명전 남쪽 석부재(石部材) ▲
2009년 중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되어 복원한 것으로 앞쪽으로 날개처럼
튀어나왔다. 장식용으로 만든 듯 싶은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아관파천의 우울한 현장, 구 러시아공사관 - 국가 사적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전망탑

중명전을 둘러보고 정동길로 나와 서쪽으로 조금 가면 러시아공사관터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
가 손짓을 한다. 그 손짓에 따라 오른쪽(북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언덕에 솟은 러시아공사관
전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덕수궁(경운궁) 서쪽이자 중명전 서북쪽 언덕으로 정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
다. 조선은 아라사(俄羅斯)라 부르던 러시아와 국교를 맺으면서 목이 좋은 이곳에 공사관 자
리를 내주었는데, 1888년에 짓기 시작해 1890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A.I.Seredin Sabatine)이 러시아 르네상스식으로 지었다.

러시아(아라사)공사관은 2자로 크게 줄여 아관(俄館)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만 달랑 남아있어 땅만 쓸데없이 넒은 러시아의 위엄을 제대로 깎고 있다. 한낱 전설이
되어 사라진 공사관의 본관은 'H' 구조로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각 면에 출입문이 있었고, 북동쪽 모서리에 바로 3층 전망탑이
있었다.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으며, 본관 뒤쪽에 호위대 막사가
있었고, 동쪽에 덕수궁과 이어지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이곳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우울감은 중명전 못지
않다. 듣기만 해도 암이 제대로 걸릴 것 같은
이곳의 사연을 끄집어내면 대략 이렇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이 크게
불안을 느끼자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이 이완
용과 이윤용(李允用) 형제, 전 러시아공사 베
베르, 신임 러시아공사 스페이어와 고종의 파
천계획을 짰다.
하여 흥선대원군과 친일파가 왕의 폐위를 꾸미
고 있으니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적극 권했고, 안그래도 무기력하던 고종
은 수락을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 공사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요구했다.
하여 러시아는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 앞바다에 있던 자기네 군함으로부
터 포 1문과 수군 120명을 서울로 소환하였고,

▲  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터 전망탑

2월 11일 새벽에 고종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야음을 틈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
迎秋門)을 빠져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암울한 줄행랑을 쳤다. 고종과 왕실 식구들은 이날부
터(1896년 2월 11일) 1897년 2월 20일까지 무려 1년 동안 이곳에서 샛방살이를 지내니 이 사
건이 그 악명 높은 아관파천으로 제왕이 자신의 궁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도망
쳐 숨어지낸 천하에서 흔치 않은 아주 비루한 사건이다.

고종은 여기서 김홍집(金弘集) 중심의 친일파 내각을 싹 때려잡고 친미와 친러파 인물로 새로
운 내각을 구성했다. 하여 이범진이 법부대신과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게 되었고, 박정양(朴
定陽), 윤치호(尹致昊), 윤용구(尹用求), 이완용 등이 주요 자리를 차지했으며, 친일파를 단
죄하고 갑오개혁(1894년)과 을미개혁(1895년)을 폐지했다. 또한 고종을 등에 업은 러시아는
조선에게 많은 이권을 챙기며 배때기를 불린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보안상의 이유로 서대문은 일시 폐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통
행금지가 되어 백성들의 출입을 막았다.

▲  밑에서 바라본 전망탑

▲  옆에서 바라본 전망탑

고종은 르네상스식으로 장식된 넓은 2층 만찬실을 거실로 사용했다. 그때 만찬실에는 꽃무늬
융단이 벽에 장식으로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의 촛불 샹들리에가 내부를 환하게 비춰
주었으며,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床)이 있고 그 앞에 호피 1장이 깔려 있었다. 용
상 오른쪽에 찻잔이 놓인 삼각받침대, 왼쪽에 돌사자 조각, 그 뒤에 3층 조선장이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 제왕의 침대가,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제단을
특별히 마련해주어 고종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만찬실 옆 측실에는 왕의 시중을 드는 상궁들이 거처했고, 나머지 궁녀들은 방이 없어 공사관
복도에 칸을 막아 불편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도실은 왕과 대신들이 국사를 살피는 곳
으로 사용해 아관파천으로 한몫 제대로 챙긴 친러파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자리해 있었고, 정문에서 현관
까지 러시아군 100여 명이 수비했으며, 정문 밖에는 조선군이 칼을 차고 길목을 지켰다. 공관
마당에서는 러시아 서관들이 양반 자제로 이루어진 조선군을 훈련시켰는데, 고종은 이들의 훈
련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고 전한다.

▲  잡초만 무성한 공사관 본관터

▲  공사관 본관터 북쪽

1905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개망신을 당하자 왜군이 러시아공사관에 쳐들어와 러시아공사
와 그의 가족, 러시아군 80여 명을 붙잡아 강제로 추방시켰다. 그들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갔으며, 남아있던 공관 직원들은 프랑스공사에게 관리를 맡기고 철수했다.
이후 왜와 러시아가 다시 국교를 맺자 러시아공사관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해방 이후 미,소공
동위원회의가 결렬되면서 1947년 6월 소련 니콜라영사와 그 패거리들은 강제 추방되었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이곳은 6.25 때 제대로 파
괴되어 3층 전망탑과 건물터 일부, 지하통로만
겨우 남게 되었으며, 지하통로는 고종이 덕수
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언제든 줄행랑을 치
고자 만들었다고 전한다.
러시아공사관터 주변은 정동공원이 상큼하게
닦여져 이곳에 서린 우울했던 역사를 조금이나
마 덮어주고 있다. 전망탑 주변 건물터와 지하
통로는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접근을 통제하
고 있으며, 공사관 남쪽 밑에 있는 하얀 정자
주변이 정동공원의 중심 역할을 한다.

▲  전망탑 옆 본관터

이곳은 정동의 대표적인 축제인 정동야행(夜行) 때 음악회 장소로 주로 쓰이며, 공원 동쪽 기
와돌담 너머로 2019년에 열린 고종의길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동남쪽 돌담 너머는 미국대
사관저가 들어앉아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키다리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재 러시아공사관은 정동제일교회 남쪽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이곳에서 거의 정남쪽이다. 러
시아는 구 공사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여전한지 2000년 이후 이곳 일대를 달라고 징징거린 적
이 있었다. 허나 그 요구는 보기 좋게 거절되었으며, 서울시가 계속 이곳을 소유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의 옛 땅인 녹둔도(鹿屯島)와 연해주(沿海州) 일대를 모두 돌려주고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러시아공사관 동쪽 돌담과 고종의길 서문


♠  정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통로, 고종의길

▲  고종의길 서문

고종의 길은 2019년에 열린 정동의 새로운 명소이다. 구러시아공사관(정동공원)에서 덕수궁돌
담길 구세군 서울제일교회까지 이어지는 200m 남짓의 짧은 돌담길로 1892년 미국공사에 의해
미국공사관의 이면도로로 개설되었다. 당시 중명전 북쪽과 고종의길 남쪽은 미국공사관 영역
이었다.

1897년 이후, 덕수궁(경운궁)에서 러시아공사관과 미국공사관 등 정동에 흩어진 여러 외국 공
사관을 잇는 작은 길이 닦였다. 러시아공사관과 미국공사관 마당 사이에도 담장길이 둘러졌는
데, 이들 길은 궁궐과 외국 공사관을 잇는 역할을 하나 고종이 비상시에 외국 공사관으로 도
망을 치는 비밀 통로로 닦여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길과 그 주변도 엄연한 덕수궁의 영역이나 미국대사관이 북쪽으로 마구 덩치를 불려 덕
수궁 선원전터까지 잡아먹으면서 이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땅으로 묶였다. 그러다가 2011년
미국과 토지 교환을 통해 미국대사관저 북쪽을 모두 되찾았고, 이후 미국공사관에서 작성한
1896년 도면과 1900년대 초 사진, 실업교통사가 1925년에 인쇄한 '경성시가지도, 최신 색인부
영업안내'를 통해 돌담길을 조성해 속세에 해방되기에 이른다.

고종이 이 돌담길을 통해 공사관을 오갔다는 사연으로 인해 '고종의 길'이란 간판을 내걸었는
데, 기분 우울하게 고종의길을 칭하는 것보다는 다른 이름이 좋을 듯 싶다. (딱히 좋은 이름
은 생각나지 않음) 어쨌든 고종의길 개설로 길 주변에 잠자고 있던 옛 덕수궁 건물터와 근대
건물터가 여럿 들춰졌으며, 지금은 비록 황량하게 돌담길 밖에는 없으나 숨겨진 유적 발굴과
정비 등을 통해 앞으로 크게 될 싹수가 충분하다.
허나 길 남쪽에 아직까지 미국대사관저가 들어앉아 있는 등 예민한 구석이 있어 길 관람시간
을 9~18시로 제한하고 있으며, 경찰이 서문과 동문 주변을 지키고 있다.


▲  고종의길을 닦으면서 수습된 건물터
왜정 때 사라진 덕수궁 건물터로 여겨진다.

▲  새로 열린 고종의길 서쪽 구간 (동문 방향)
이곳도 덕수궁의 옛 영역이니 덕수궁돌담길의 확장판이라 봐도 무방하다.

▲  고종의길 서쪽 구간 (서문 방향)

▲  돌담길이 2중으로 둘러진 고종의길 중간 구간 (동문 방향)

▲  고종의길 중간 구간과 배수로 (동문 방향)

▲  고종의길 중간 구간과 배수로 (서문 방향)

▲  고종의길 동쪽 구간 (동문 방향)
돌담길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바로 동쪽 종점이 코 앞이다. 길이
너무 짧은 것이 좀 아쉬울 따름..

▲  고종의길 동쪽 구간 (서문 방향)

▲  덕수궁 선원전(璿源殿) 구역

선원전은 태조를 비롯한 역대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건물로 1897년에 지었다. 1900년
10월 불의의 화재로 태조를 비롯한 선왕의 어진들과 선원전이 화마의 먹이로 사라지자 1901년
덕수궁 서북쪽(고종의길 북쪽)에 6~7천 평 규모로 크게 지었다.

1920년 왜정에 의해 철거되어 창경궁으로 강제 이전되었으며, 많은 건물로 들어찼던 선원전
구역을 민간에 싸게 팔아먹어 온갖 건물이 난립하게 된다. 이후 미국대사관이 이 일대를 통째
로 먹어 빈 공간으로 있었다가 2011년에 환수되어 늦게나마 이렇게 속세에 해방되었다. 선원
전 구역을 다른 세력에게 강제로 뜯기고 우리 땅임에도 오랜 세월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땅으로 있다가 해방이 되어 이렇게 발을 들일 수 있게 되니 기분이 정말 짠하다.


▲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1938년)
왜인이 세운 조선저축은행은 선원전 구역에 중역사택을 닦아
망국의 궁궐을 욕보였다.

▲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2층 식당 (1938년)

▲  고종의길 동쪽 끝 구간

고종의길 돌담길은 언덕 위쪽에서 마무리가 되고 비탈길을 따라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길 주변에는 선원전 구역 건물터,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터 등의 유적들이 있어 한참 조사를
받고 있다. 지금은 공사 현장처럼 다소 어수선해 보이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잘 익은 모습이 될 것이다.


▲  고종의길 동쪽 끝 구간

▲  고종의길 동문
마치 비밀의 공간으로 이어질 것 같은 저 문을 나서면 덕수궁돌담길 서쪽 길과
구세군서울제일교회가 모습을 비춘다. 궁궐 돌담길의 정감이 느껴지는
서문과 달리 동문은 아직 어수선하다.

▲  선원전 구역을 홀로 지키는 회화나무

인간들이 지은 선원전과 주변 건물은 영 좋지 않은 손에 의해 사라지고 지금은 회화나무만 홀
로 남아 그들의 빈 자리를 지킨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미국대사관 영역으로 잡혀있던 시절에는 나무 접근은 커녕
사진에 담는 것까지 통제를 했다. (회화나무 주변은 접근 통제구역이었음) 하여 뻔히 보임에
도 먼 발치로 그냥 지나쳐야 했다.
오랫동안 나무 홀로 있는 공터로 있었는데, 미국대사관 애들이 이곳에 건물을 짓는다고 개난
리를 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2011년에 반환을 받아 해방되기에 이른다. 고종의길을 계
기로 선원전터 조사가 활기를 띄고 있어 이곳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많이 풀릴 것으로 기
대가 되며 조사가 끝나면 선원전 구역 복원이나 사적공원 조성 등의 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되면 허전한 회화나무 주변도 다소 채워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울한 곳을 중심으로 둘러본 정동 근대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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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5년 5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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