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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양사 귀부
삼성산(481m) 남쪽 자락이자 안양예술공원 북쪽 숲에 안양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안양시
의 지명 유래가 된 안양사는 삼성산 윗도리에 깃든 삼막사와 더불어 안양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역사는 중초사에서 시작된다.
중초사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시절인 826년에 창건된 절로 안양예술공원 서쪽 초입인 김
중업건축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되는데, 안양사의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
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왕건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산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해보니 서로 뜻이 잘 통
하여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를 만난 자리에 절을 세워주니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
이다.
하지만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작 송악 일대가 전부였고, 왕건도 아직 20대 초에 불과했
다. 게다가 그 시절은 승려 출신인 궁예가 한반도와 산동반도, 중원대륙의 너른 땅을 지녔던 신라
의 북쪽 부분을 거의 먹어 치운 상태였다. 그러니 태조 왕건의 900년 설은 전혀 맞지가 않는다.
다만 10세기 이후 왕건 또는 고려 황실의 지원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이며, 절을 크게 불리면서 극
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사로 이름을 갈게 된다. 인구 70만을 지닌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안양사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이 잠시 들려 능정의 진영에 참배했다고 전하며, 고
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1314~1388)장군과도 인연이 깊었다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고려 초에 세웠다는 큰 전탑을 바라보며 '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우왕(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의 재물과 신도
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 안렴사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를 감액하여 경
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친히 내시 박
원계를 보내어 향을 하사했으며,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
(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식하
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 남쪽 벽에는 석가열반회, 서쪽에는
미타극락회, 북쪽에는 금경신중회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
천(人天)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이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
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필에 이르렀으며,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은 자신의 도은
집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 때는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이 충청도 온양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듯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
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
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양사 재건
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인 현재 자리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
지는 부도(승탑)와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2. 안양사 귀부의 옆모습
대웅전 뜨락에 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로 비석의 일부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
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된 유물로 보고 있다. 비석의 성격
은 그 중요한 비신이 사라져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
겨지며,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는 치아가 빠진 모양처럼 무
척 허전해 보인다. 엉금엉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
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 않
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돌난간과 석주를 둘렀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록된 경
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유림) - 석비
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방에 석곽
(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3. 안양사 귀부의 앞모습

4. 안양사 부도
대웅전 뜨락에 귀부와 나란히 자리한 부도는 윗도리가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 탑이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인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부도탑의 알맹이인 탑신은
오래전에 상실되어 머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부도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이 부도탑은 안양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됨)



5. 안양사 미륵불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
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
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6. 바위에 새겨진 선각마애불
안양사는 오랜만에 방문으로 예전에는 없던 선각마애불이 미륵불 옆 바위에 새로 닦여져 있었다. 선
각마애불은 바위에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로 하얀색 선으로 선정에 잠긴 석가여래를 표현했다.
이번 안양사 나들이는 햇님의 퇴근시간 임박과 귀차니즘으로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유산)와 부도(안양
시 향토유산), 미륵불, 선각마애불만 고물 폰카에 살짝 담고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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