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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

정동길과 덕수궁길(덕수궁돌담길)이 만나는 곳에 이 땅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가 있다. 고색의 기

운이 깊은 이 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으로 1887년 10월에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했던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서양식 예배당

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서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에 있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자와 

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

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들로 

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 윤

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이 여기서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만

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양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그로 인해 건물 모양도 직사

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

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

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는 벽돌이 풍화되고 문

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와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

수 있게 되었다.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유럽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한 교

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비록 나와는 완전히 맞지 않은 종교의 현장

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

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린다.

 

2. 정동교회의 정면 모습

정면에 보이는 하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된다.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았음)

 

3. 정동교회의 뒷모습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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