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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사랑채

이 한옥은 순종의 장인이자 순정효황후의 부친인 친일파 윤택영이 지었다.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위인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윤택
영과 순종은 장인, 사위 관계이나 순종보다 2살이 어렸으며, 황후에 오른 딸도 순종과 무려 20살
이나 차이가 났다.

윤택영은 1910년까지는 그런데로 우국충정의 모습을 보였으나 1910년 이후 안면을 싹 바꾸고 친
일파로 악명을 떨쳤다. 낭비벽과 경제관념이 꽝인 작자라 돈을 펑펑 써댔고 사치가 대단하여 주변
으로부터 빌린 돈이 상당했다. 하여 '채무왕' , '차금대왕(借金大王)'이란 별명까지 지녔다.

 

그의 빚은 고종이 일부 갚아주기도 했으나 그래도 빚은 여전했으며, 순종과 친형인 윤덕영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심지어 왜국 조정에도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까지 했다. (왜정이
지원금을 주었으나 그마저도 다 날려처먹음)

 

이 집은 일반 주택이 아닌 재실로 지어진 것으로 순종이 모후(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을 찾을 때 홍
릉 제사 및 제왕의 숙식 편의용으로 지어졌다. 홍릉 부근인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안암5거리 동
쪽)에 있었는데, 윤택영이 빚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는 엄청난 빚을 다 해결하지 못해 결
국 중원대륙으로 도망쳤으며, 결국 상해에서 골로 갔다고 전한다.

 

건물 배치는 전체적으로 '元'자 모양으로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ㅡ' 자형 모습의 사당을 두었다. 사
당은 1960년 4.19혁명 때 소실되었는데, 재실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기면서 다시 지었으며, 사당
남쪽 한 단 낮은 곳에 '元'에서 위에 '一'을 뺀 모습의 몸채를 두었다.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이어져 '一 '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동서로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으
며,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데,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사랑채 영역으로 남녀 공간이 구분되
어 있다. 집 한복판에는 가운데 마당과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 있으며, 집에 쓰인 목재와 벽면, 창호,
장식 등도 고급지게 닦여져 구한말 상류층 한옥에 건축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2. 윤택영 재실의 사랑채 방

사랑채에 있는 가구와 물건, 그림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 남산골한옥마을 수식용으로 근
래 갖다놓은 것들이다. 주변에서 구입한 옛날 스타일의 생활용품과 그림, 물건들로 방을 채워넣었
는데, 사랑채와 안채, 재실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이는 남산골한옥마을을 이루고 있는 한옥 5형제
(도편수 이승업 가옥, 오위장 김춘영가옥, 관훈동 민씨가옥,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씨가옥)들도 마
찬가지이다.

 

3. 달달하게 꾸며진 윤택영 재실 화단과 수석

4. 윤택영 재실 사랑채의 뒷모습과 사당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사당)

5. 윤택영 재실 사당

재실 가장 뒷쪽에 자리한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1960년 4.19혁명 시절에
불에 타서 사라진 것을 1998년 윤택영 재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지었는데, 사당 앞에 석축
을 쌓아 일종의 꽃계단(화계)을 닦았다.

6. 윤택영 재실 사당(가묘) 내부

제사상에 차려진 과일과 음식은 모두 모조품이다. 그러니 괜히 손을 대는 일이 없도록 한다.

7. 윤택영 재실 사당 주변

주둥이가 닫힌 죽은 우물과 김치광이 있고, 그 주변으로 나무와 수풀이 적당히 자리해 늦가을 정
취를 돋군다.

8. 뻘겋게 익은 단풍나무 (윤택영 재실 옆)

9. 윤택영 재실 안채 뒷쪽과 사당(왼쪽 건물)

10. 윤택영 재실 사당

11. 윤택영 재실 몸채(사랑채, 안채)의 바깥쪽

사랑채와 안채로 인도하는 문과 몸채 가운데 마당으로 인도하는 기와문이 달려있다.

12. 문을 통해 바라본 윤택영 재실 몸채 안쪽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안쪽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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