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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  백석동천 별서 유적


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중순에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백사실)을 찾았다.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처음 찾은 이래 매년 3~5차례 정도 발걸음을
하며 그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비춘다.

백사골의 품으로 들어가고자 수유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53번(우이동↔보라매공원)을 타고
세검정초교에서 내린다. 거기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로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면 빌라 옆으로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 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석동천(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현통사와 백사폭
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현통사 대문 밑에 때깔이
고운 하얀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
랜 세월 빚어놓은 대작품, 백사폭포(백석폭포라 불러도 무관할 듯)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
며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이곳을 찾았
던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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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의 시냇물은 큰 세
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살며시 내
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
향, 북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홍제천을 따라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
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에는 물을 타고 흘러온 누런 낙엽이 가득하
다. 늦가을을 지나 장차 천하를 지배할 겨울 제
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가 털어낸 낙엽들
은 폭포에 모여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
의 모습은 인생무상이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
다.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
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불러일으켜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든다.
폭포를 빚은 하얀 피부의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폭포수 소리가 천
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예전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 및 동네 주민들의 비밀 피서지였으나 백
사골이 속세에 무심히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서 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
며 여름 제국에 대항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잘생긴 폭포와 반석, 시원
한 산바람까지 갖춘 이곳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사폭포를 거친 계류는 다리 아래에 조그만 폭포를 통해 밑의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본격적인 세상나들이를 시작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처
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야욕을 드러낸다.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둥실
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은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급하게 내려가는 백사골 아랫폭포
서쪽 못에서 경사진 바위를 타고 급하게 내려간 백사골은 주택가 사이를
지나 자하주택 북쪽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홍제천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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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폭포 위쪽에서 굽어본 폭포 주변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인 일붕(一鵬)이 머물기도 했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
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유혹할 만한 매력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키면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
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
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
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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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역사 마크가 새겨진 현통사 대문
금강역사의 무시무시한 망나니 칼에 선뜻 들어가기가 겁난다.
괜히 문을 들어섰다가 칼에 맞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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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촐한 모습의 대웅전(大雄殿)

▲  산신각 추녀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돌 대신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대웅
전과 산신각, 칠성각 등을 올렸다. 앞뜰에는 조
그만 3층석탑과 승려의 사리가 담긴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形) 부도 2기가 밋밋한 뜨락을 수식한
다.

백사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 단잠에 기지
개를 키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천하에 흘려 보낸
다. 백사폭포에 앉아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속세의 더러운 말에 오염된 귀가 말끔히 정화될
지도 모른다.


♠  백사골(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서울 도심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청정한 백사골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온갖 내음
들이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의 울창한 숲에 들어서게 된다. 제일 먼저 소나무숲이 솔내음을 풍기
며 이곳을 찾은 중생을 소독시킨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
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조차 어려운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
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
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  자연이 아름답게 채색한 이곳의 풍광은 정말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유적을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
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마땅한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쉽게 시야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
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연못 서쪽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
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오랜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짙게 그늘을 드리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돌다리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으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북악산에 숨겨진 옛 정원,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의 중심인 6각형 정자터와 연못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머나먼 지방이나 산악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
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경승지이자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
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
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조선 중기부터 백사골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
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
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사랑채터

▲  사랑채터 북쪽의 안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
,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
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
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사들여 머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은둔(隱遁)해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
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
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
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
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
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
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
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
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참고로 백석동천은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달
리 표현한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사골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일컬으며, 외나무다리 윗쪽 계곡과 백사골 동쪽 산줄기는 백석동천의 범위에 들어
가진 않는다.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이나 북
  악산길 산책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리하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백석동길이 있다. (백석동천을 알
   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4호선 수유역, 미아3거리역, 길음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바로 남쪽에 홍제천이 있음)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퉁이 방면
   )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
   을 추천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
   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석동천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백사실 동쪽 산줄기 남쪽
  에 하나 숨겨져 있는데, 이곳에 유일한 약수터이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별서 주인의 정취가 담긴 ~ 백석동천 사랑채터 주변

▲  사랑채터 서쪽 - 계단 끝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터가 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흐트려놓을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은 아랫쪽와 윗쪽 2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
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
는 계단은 다듬은 돌만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
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
으나 동쪽 부분이 잡초에 묻혀있던 것을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
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사랑채터 옆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
▲  2010년 발굴조사로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랑채터와 안채터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  돌담의 흔적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다시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볕을 보게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을 한데 수습해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옛 산성
(山城)의 잔해처럼 진하게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연못

▲  남쪽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 등의 기술자를 불러
거처를 만들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
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삥과 양반들의 수탈
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
을 것이다.

별서의 주인이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땅을 파고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
임을 아련하게 알려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던 물 대신 잡초와 조그만 돌이 그 자리
를 메우고 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싹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
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
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여름의 제국이나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
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의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예전에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슬 되
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은 이
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
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들,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
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
못에 심어진 기둥 4개는 높이가 약 2m로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어떻게든 권력층이나 부자가 되야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로 다리 밑에 뚫린
수로는 연못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백석동천 돌탑

서터에서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들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
전처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다만 윗쪽(백사실약수터 입구)에서 조금 내려오는 것
은 괜찮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되는데, 2012년에 별서터 입구 주변 산길
을 손질하고 그 길 좌측에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과 돌탑을 만들어 조촐하게 볼
거리를 선사한다.
백석동천 돌탑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으로 이곳 외에도 백사골 동쪽 산자락에 여럿 심
어져 있는데, 이 탑은 윗쪽에 오리가 달린 나무 솟대를 심어 조금 차별화를 두었다.

산길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
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이어지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아무 산천에나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다.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기가막힌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몹시나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
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너무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푸르름이 가득한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
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들이 줄줄이 나와 탄사를 자아내
게 하며, 때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백사폭포까지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
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
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
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백사실)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
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윗 사진의 바위를 지나 외나무다리까지로 백사폭포부터 계곡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백석동천의 구역으로 보면 된다. 다리를 넘어서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가 나오질
않고, 옛 사람들의 흔적도 전혀 나오질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한 풍경을
진하게 우려낸다. 2개의 나무 줄기로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될까? 허나 다리의 길이도 짧고, 물의 수심도 얕으며, 다리 아랫
쪽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곳이 있어 굳이 다리의 통행을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비닐하우스와 원두막 비슷한 시설, 그리고 여러 경작물이 무럭무럭 자
라는 밭이 길게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에 두 눈이 잠시 방황을 한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내외로 폭이 좁아진다. 여러 번 계곡을 건너야
되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쌓였을 때는 통행하기가 힘들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 부암동 능금마을 보러가기)

이렇게 하여 백석동천 가을 나들이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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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8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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