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付岩洞) 산책 '
석파정 별당
▲  겨울에 잠긴 석파정 별당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어간 분지
(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안겨져 있는데, 서울 도심과
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로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내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부암동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길과 자하문길을 중
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5층을 넘기는 건물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은 정원이 딸린 주택이나 빌라들이며, 농작물이 자라는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
히 병풍처럼 둘러선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에 듬성듬성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방에 시골마을
이나 조그만 읍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서울 도심임에도 녹지 비율이 제법 높은 부암동은 조선시대부터 아름다운 경치로 도성(都城
)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다. 게다가 도성과도 불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무척이나 가까
운 거리로 조선 왕족은 물론이고 양반들의 별장 및 별서(別墅),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
다. 자연과의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의 팔자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명소를 빚
어놓았던 것이다. 개발의 칼질이 무자비하게 춤추는 현대에 와서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개발제한에 묶이면서 가까운 성북동과 마찬가지로 전원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정말 풍성한 볼거리가 도시 생활에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유혹한다.
우선 북악산의 뒤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도심 속의 비밀의 별천지인 백석동천이 약 3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채 누워있으며, 청정함을 간직한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의 두메 산골인 뒷
골마을이 강원도 산간의 분위기를 선사한다. 이곳은 자하문에서 백사골 서쪽을 잇은 부암동
산복(山腹)도로에서 높은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산골로 가까운 곳에 북악산길이 지나간
다. 산복도로를 따라 자하문으로 내려가면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한 산모퉁이 까페
가 있으며, 환기미술관과 아트포라이프(Art for life) 등의 미술공간이 있다.
부암동의 서쪽 부분인 인왕산 동쪽 기슭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
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담긴 무계정사, 20세기 초에 지어진 반계 윤웅렬 별장,흥선대원
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오래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간직한 성불사(成佛寺) 등이 있
다.

부암동 북쪽으로 흐르는 홍제천(弘濟川)은 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
던 곳으로 인조반정이 모의된 세검정(洗劍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름도 유명한
소림사(小林寺),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는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석파정에서
분리된 석파정별당,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별장터, 그리고 도성
(都城)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의 홍지문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조금 더 확장하
면 하얀 관음보살로 유명한 보도각백불과 옥천암(玉泉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이렇듯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많은 명소들이 숨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
은 실정이다. 그러다가 2008년 이후 부암동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답사객과 사진쟁이
, 나들이객의 발길이 제법 늘었다. 근래에는 자하문과 부암동주민센터, 부암동 산복도로 주
변으로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집들이 조금식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서울에서 4대문 안
쪽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명소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곳으로 넉넉잡아 5~6
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자하미술관과 환기미술관을 모두 포함한다면 2시간
정도 추가 / 석파정은 관람불가 / 반계 윤웅렬벌서도 거의 관람 불가(외부만 구경 가능) /
성불사 보현보살은 속인들에게 공개를 꺼려한다고 함>

본글에서는 부암동의 명소를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부암동은 법정동
명 및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을 관할하고 있다.


♠  서울 유일의 당간지주이자 옛 장의사(莊義寺)의 아련한 흔적 ~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 -
보물 235호

▲  별다른 장식이 없이 밋밋하게 솟은 장의사지 당간지주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당간지주는 괘불(掛佛)이나 불기(佛旗) 등을 매는 당간(幢竿)을 설치한 돌
기둥이다. 이 땅에 정말 흔한 불교문화유산이지만 서울에선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는 장의사터 당
간지주가 유일하다.

눈이 두텁게 쌓인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놀이현장을 즐겁게 지켜보는 이
노구(老軀)의 당간지주는 세검정 일대에 둥지를 텄던 옛 장의사(莊義寺)의 하나뿐인 흔적이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이 당간지주는 높이가 3.63m로 기둥을 받치는 기단부(基壇部)와 당간은 세
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사라졌다.

당간지주를 품었던 장의사는 신라 조정에서 황산(黃山, 충남 논산)에서 백제(百濟)와 싸우다 전
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고자 659년(무열왕 5년)에 세웠다고 전하나 확실
하진 않다. 당시 신라는 국도(國都)인 경주(慶州) 지역에만 절이 세워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부
암동 지역은 고구려와 무척이나 가까운 변방이라 요새를 세우면 세웠지 절을 세울 이유가 없었
다. 다만 당간지주를 통해 신라 후기에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신라 왕실이나 그들
의 후손들이 창건한 절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남경(南京, 서울 도심)을 순행(巡行)하던 제왕들이 꼭 들리던 명찰(名刹)로 예종(
睿宗, 재위 1105~1122)과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등이 인근
승가사(僧伽寺)와 함께 들리면서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태조(太祖)의 부
인이자 태종의 생모(生母)인 신의왕후(新懿王后) 한씨의 기신제(忌晨祭)를 지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허나 연산군(燕山君)이 1506년 절 부근에 탕춘대(蕩春臺)를 만들면서 절을 때려부시고, 그 자리
에 꽃을 심어 꽃밭을 만들었다. 그 이후 절은 영영 재건되지 못했으며, 해방 이후 세검정초등학
교가 절터에 뿌리를 내렸다.

장의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한 산증인으로 초등학교 뜰의 장식물이자 어린이들의 벗이 되어 심심
치 않은 노년을 보낸다.

※ 장의사터 당간지주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세검정초교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로 세검정초교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초교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218-2 세검정초등학교 내
* 당간지주 관람은 자유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당간지주

▲  세검정초등학교와 당간지주


▲  콘크리트로 어색하게 정비된 홍제천(弘濟川) (세검정초등학교 건너편)

인간들이 이상하게 건드린 홍제천의 모습이 꽤 보기 흉했는지 겨울의 제국이 눈폭탄으로 하천을
가려버렸다. 별로 믿기지는 않겠지만 이곳은 1960년대까지 서울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피서지이
자 휴식처였다. 2006년까지만 해도 저곳에는 하천을 복개하여 만든 신영상가 건물이 흉물스럽게
서 있었으나 상가를 철거하여 하천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3거리에서 상명대 방면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멋드러진 바위에 홍제천(弘濟川)을 바라보며
단아하게 서 있는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T'형의 정자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정자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
고, 숙종(肅宗) 때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허
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바로 세검정
의 전신(前身)이 아닐까 여겨진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말그대로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가득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여기서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며 칼을 물에 씻었다고 전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도 함)
김유를 중심으로 한 반란파는 역촌동(驛村洞) 별서(別墅)에 머물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자하문)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
양군을 군주로 내세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르게 된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반란파는 칼을
갈던 곳을 반역을 모의한 상징적인 장소로 삼으며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
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영조 24년(1748년)에 약간의 수리가 있었으며, 1941년 불에 타버
려 주춧돌 하나만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의 맑은 계곡과 북
한산의 시원스런 녹림(綠林)이 서로 어우러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서울 근교의 이름난 피
서지 겸 학교 소풍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1899년 5월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여기로 소풍을
왔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하며,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보'에는 이렇
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花
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또한 세검정 주변의 신영동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백사골 상류에
자리한 뒷골마을(능금마을)이 능금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음> 하지만 1970년 이후, 개발의 칼바
람은 자하문고개를 넘어 평화롭던 부암동과 평창동까지 칼질을 자행하면서 피서객의 물놀이 현
장인 홍제천은 물고기도 등을 돌린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해 버리고, 자두와 능금도 완전히 자
취를 감추었다. 세검정을 감싸 흐르는 맑은 계곡은 이제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이나 북한산
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으며, 정자 바로 옆에는 4차선 도로(세검정로)가 뚫리면서 옛날의 운
치는 거의 녹아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검정은 나그네가 잠시 정자에 오를 수 있도록 개방은 되어 있으나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자에 앉아봤자 4발 수레가 내뿜는 고약한 냄새와 하천에서 풍기는 비린내로 예전처럼 몸과 마
음이 상쾌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기에 외딴 섬처럼 갇힌 세검정. 과연 옛날의 운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

참고로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쓰인 화강암은 세검정 주변에서 가져온 것이다.


▲  하얀 지붕을 이룬 세검정과 눈에 완전히 가려진 홍제천과 차일암
눈에 묻힌 홍제천은 소쩍새가 울고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면
슬슬 기지개를 켜고 눈을 뜰 것이다.


눈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세검정 밑에 넓적하게 잘 생긴 하얀 바위가 홍제천에 발을 담구고 있
다. 그 바위가 바로 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세초(洗草)했던 차일암(遮日巖)이다. 세초란 사초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어 지우고 그 종이를 재활용하는 하는 것을 말하며, 세초를 마치
면 일종의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한다.

※ 세검정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로 세검정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 하차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 하차 (세검정에
  정차하지 않는 노선은 세검정초교에서 하차하여 도보 1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세검정에서 도심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어가면 상명대입구 4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 서남쪽에
는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석파랑
(石坡廊)이란 전통 고
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활약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1958년 자하
문고개 남쪽 옥인동(玉仁洞)에 있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 윤씨의 집을 가져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것이다.

소전은 6.25 시절, 북한으로 빼돌려질 뻔한 간송미술관의 문화유산을 뛰어난 재치로 지켜냈으며,
왜국(倭國)에 팔려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부암동에 집터를 닦으면서 순정효황후의 집을 가져왔고, 근처에 있던 흥
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별당(別堂)을 이곳으로 떼가지고 왔는데, 그 연유로 이곳이 석파랑
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소전이 이곳을 등진 이후에는 고급 한정식당으로 변신했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인데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창문 쪽 외벽에는 동그란 창
문을 내고 주변 외벽에는 모조리 벽돌로 도배하여 마치 감옥처럼 폐쇄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중국 건축 양식으로 그 디자인을 모방한 것이다.


▲  고요에 잠긴 석파정 별당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별당은 석파랑 소유로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인다. 대원군 별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의 식사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없이 깨끗히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뭐 봐
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으로 가는 길
이 있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다.


▲  겨울에 잠긴 석파랑
사진 왼쪽에 하늘 높이 솟은 나무는 150년 묵은 감나무로 석파랑의 상징물이다.

▲  석파랑 정문의 위엄
현판에 쓰인 석파랑(石坡廊) 3글자에 마치 생명을 불어넣은 듯
필체의 힘이 거센 파도처럼 넘쳐 흘러 보인다.

▲  양반가의 품격이 돋보이는 석파랑 정원 (왼쪽에 보이는 문은 만세문)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중국식 호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윗 사진의 왼쪽)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
하고자 1898년에 세운 만세문(萬歲門)으로 원래는 경복궁에 있었다고 한다. 궁궐 건축물의 품격
이 고스란히 배인 문으로 지금은 석파랑 손님들이 지나다닌다. 양반가 정원의 고급 품질이 돋보
이는 정원에는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곳곳에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볼거리를 비롯하여 나무와 꽃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저녁 상차림의 하나인 궁중수라상은
13만원, 제일 가격이 싼 수복(壽福)이란 점심 상차림은 4만 5천원이나 한다. (보통 일반적인 한
정식당보다 1.5~2배 정도 비쌈)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비는 별도로 내
야 된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한숨만 짓게하는 그림의 떡 같은 곳이지
만 이 땅에 흔한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일 것이다. 역시 이 땅에서는 수단과 방법 가리
지 말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도 과연 저곳에 당
당히 어깨를 피고 들어가 한정식을 먹을 그날이 있을까? 돈을 몇 달치를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
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 7212번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로 세검정 하차, 도보 1분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 하차, 도보 1분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정원 사진이나 이곳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문을 닫아 걸고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높이가 2m 정도로 바위 곳곳에 뚫린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아들은 원하는 장안의 아
낙네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서울의 명소였다. 하지만 1970년대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
의 칼질은 부암동의 명물인 부침바위를 잔인하게 녹여버려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겨우 표석을
세워 예전 이곳에 부침바위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멋드러지게 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 앞에 없어진 것이 부지기수로 많다. 실례로 이곳에서 멀지 않는 응암동(
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응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으
나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폭파시켜 버렸다.


♠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弘智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의 뒤쪽

상명대입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불리는 성곽
을 만나게 된다. 표백제로도 어림 없는 성벽에 가득 낀 알록달록 세월의 때는 문의 오랜 나이를
가늠케 해주며, 그의 모습을 더욱 중후하게 수식해 준다.

탕춘대성은 세검정 부근에 연산군이 세운 탕춘대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간단하게 2글자로 서성(西
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곽은 도성(都城)에서 인왕산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7km의 성
곽(城郭)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 임금의 머리통이 깨질 정도로 단단히 혼이 난
경험을 바탕으로 혹여 발생할지도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비상시에 행궁(行宮)이 있
는 북한산성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도록 비상대피로 확보 및 부암동과 평창동 일대의 국가시
설<평창(平倉), 선혜청(宣惠廳), 조지서(造紙署)>을 보호하고자 숙종의 명으로 1715년에 축성되
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이때 지어진 것으
로 탄생된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
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가까이 무탈하게 지내온 홍지문은 1921년 1월, 지붕에 쌓여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도 모잘라 같은 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러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
水門) 마저 무책임하게 떠내려가 터만 아련하게 남은 것을 1977년 7월, 홍지문과 함께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
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문루와 오간대수문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문 밖에는 벤치 등이 마련되어 동네 사람과 나그네의
두 발을 쉬어가게 했으며, 성문 앞뒤로 가로수가 조성된 짧은 산책로를 만들어 운치를 더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문을 활짝 열며 오가는 이들의 통행을 묵묵히 굽어보는 홍지문의 앞쪽
옛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북한산과 북악산 백사골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뜬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은 탕춘대성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성으로 상명대 서쪽과 구기터널 위쪽,
비봉을 차례대로 거쳐 북한산성과 이어진다.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관련 글 ☞ 보러 가기
* 부암동 뒷골마을, 창의문 관련 글 ☞ 보러 가기
* 부암동 명소 예전 답사기 ☞ 보러 가기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글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 공개일 - 2012년 2월 23일부터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