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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겨울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  설피(雪皮)에 묻힌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골 산길
▲  백사골(백사실) 산길


묵은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새해의 태양이 천하를 비추기 시작했다. 새해가 뜨기가 무섭게 겨
울의 제국(帝國)은 위세를 요란하게 떨치며 천하를 벌벌 떨게 만들었다. 원자폭탄보다 더 무
서운 자연산 눈폭탄과 영하 10~20도를 넘는 살 떨리는 강추위를 거침없이 투하한 것이다. 제
국의 무차별 눈공습에 천하는 그야말로 벌집이 10번도 뒤집어진 듯, 큰 혼란에 빠졌다. 아무
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을 외람되게 참칭해도 겨울 제국의 공습을 막을 방법은 전혀 없다. 천
하의 핵폭탄도, 이순신(李舜臣)의 천하무적 수군(水軍)도,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무식하게 머
릿수만 많던 수양제(隋煬帝)의 300만 대군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장난감도 안되기
때문이다. 정말 몇년 치의 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듯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그대로 맞
이하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번 폭설은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집중되었는데, 하루 종일 눈폭탄을 뒤집어 쓴 수도
권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이때만큼은 문명의 이기(利己)인 4발 수레와 지하철
, 비행기 등 교통수단은 눈물을 머금고 챗바퀴만 도는 자신의 바퀴를 원망해야 했다.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 모든 것이 살살 기던 그날 저녁, 문득 북악산 백사골이 생각났다. 백
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늘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2005년에 발을 들인 이래 1년
에 2~3번 정도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봄과 여름, 가을과 초겨울의 풍경은 사진과 마음에 듬
뿍 담았지만 유독 눈 풍경을 아직까지 담지 못했다. 제국의 절정인 12월부터 3월까지 그곳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붕을 압박하며 두툼하게 쌓인 눈을 보며 이번에 그곳의 설경(雪景
)을 담아 그 아쉬움을 풀기로 작정하고 다음 날, 등산화로 무장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백사골의 품으로 들어갔다.

집(도봉동)에서 그곳에 가려면 북한산 남쪽 자락인 북악터널을 지나야 된다. 다행히 시내 간
선도로에 대한 제설작업이 이루어져 수레의 통행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허나 도로 가장자
리나 차선에는 여전히 눈들이 포진하고 있어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속도는 그리 빠르진 못했
다.

수유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53번
(우이동↔보라매공원)을 타고 세검정초교에서 내려 육교를 건
너 오른쪽으로 가면 '
28 홍지천길'이란 골목길이 손짓한다. 백사골은 바로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북악산과 북한산(北漢山)에서 반반씩 투자한 홍제천(弘濟川)을 건너면 혜문사(慧門寺)
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 방향으로 쭉 들어가면, 빌라 옆으로 계단이 나온다. 그 계
단을 오르면 혜문사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도심 속의 별천지같은 백사골 산길이 시작
된다. 그 길을 계속 고집하면 백사골 하류에 자리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그 모습을 비춘다.

마치 속세를 접고 신선(神仙)의 세계로 들어온 듯,아래 세상과는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에서 말이다.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의 번뇌(煩惱)로 단단히 꼬인 머리와 마
음은 말끔히 정화된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갯길
저 눈덮힌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이다.


♠  하얗게 분을 칠한 백사골(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폭포인지 하얀 벽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 백사폭포(白沙瀑布)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현통사(玄通寺) 정문 밑에 징그
럽게 쏟아진 눈을 푹 뒤집어 쓴 하얀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
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 폭
포는 아직까지는 정식 이름이 없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내가 지어준 것으
로 공식 이름으로 삼아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백사골의 아름다운 경치에 제대로 시샘을 한 심술쟁이 겨울제국은 그의 작품인 눈으로서 백사폭
포와 담(潭)을 몇겹이나 모조리 가려버렸다. 눈이 저렇게 쌓여있지만 폭포에서는 여전히 티끌없
이 맑은 백사골의 냇물이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흘러간다. 다만 겨울제국이 눈치챌라 광
복군(光復軍)의 비밀스런 독립활동처럼 흘러가는 소리도 완전히 죽여가며 숨죽여 흐를 뿐이다.


▲  눈으로 기와지붕을 입힌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
다. 백사골에 포근히 둥지를 튼 이곳은 차갑게 불어오는 백사골의 산바람이 풍경물고기를 건드
리면서 그윽한 풍경소리가 이곳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대웅전 남쪽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대웅전 뜰에 3층석탑과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浮
屠)가 밋밋한 뜨락을 적게나마 채워준다.


▲  백사골 숲길

백설에 덮힌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내음
으로 가득한 백사골 숲이다. 신선이나 선녀 누님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백사골의 아름다운
풍경, 그 풍경에 겨울의 제국은 잔뜩 적지 않은 시샘을 보내며 백사골을 눈덩어리로 두텁게 가
려버렸다. 허나 하얗게 몸을 꾸민 백사골의 은빛 설경도 꽤 신비롭고 아름다워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백사골의 풍경, 한낱 인간의 단어로 억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
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탄성만 연거푸 지를 따름
이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나그네의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
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지금은 겨울 제국의 서슬 시퍼런 압제를 피해 죄다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자고 있지만,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과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서울
에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지도 모른다.


▲  무겁고 차디찬 눈옷을 벗으려는 백사골 나무들의 가녀린 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눈길의 끝에는 비밀의 옛 정원, 백석동천이 숨어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겨울에 잠긴 계곡은 찾는 이로 하여금 시정(詩情)에 젖게 한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한 백사골(백사실) 계곡
어디가 계곡이고 어디가 흙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며
하얀 소복을 뒤집어 쓴 채, 숨을 죽인 계곡은 소쩍새가 울 때면
눈을 번쩍 뜨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눈 속에 잠긴 백사골
이곳의 풍경을 집으로 가져와 혼자서만 볼 수는 없을까?
남에게 보여주기에는 정말로 아까운 곳이다.

▲  아래서 어렴풋이 보이는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유적을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을 바라보면 언덕 정상으로 눈에 대부분이 가려진
커다란 바위가 어렴풋이 눈에 띌 것이다. 그 바위에 바로 달의 바위를 뜻하는 월암 바위글씨가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을 새
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
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않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 가
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태반은 저 바위글씨의 존재를 몰라 만나지 못하고
내려간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높은 곳에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여름과 가을에는 무성한 숲
에 가려 바위는 보일지언정 글씨까지는 보이지 않으나 겨울에는 시야를 방해하는 것들이 적어서
글씨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허나 명필에 가까운 글씨에 샘을 낸 겨울은 그 글씨를 눈으로 가려
그것마저도 온전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백사골에 들어올 때는 늘 저곳까지 올라가는 편인
데, 이번에는 눈 때문에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냥 밑에서 그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  북악산에 숨겨진 옛 별서,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산간마을이나 고산지대의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가 진하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이나 별서(別
墅)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 무계정사(武
溪精舍)를 비롯하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유흥의 장소로 만들어진 세검
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들었다는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골(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
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
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
예로운 이름이다>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
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가
있으며,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는데,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
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
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
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
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집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
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
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라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별서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
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야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는 별서터 일대를 죄다 뒤집어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이때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고.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
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
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
어도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속세에 강하게 어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도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괜히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모두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
  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북
  악스카이웨이 경유)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하다. 단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아직은
  변변치 못해 초행이거나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동네 사람들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44번 백석동길 골목이 있다. (백
   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가파른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44번 홍지천길'로 쭈욱 올라간다 → 혜문사 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에서 하차
③ 창의문(자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스카이웨이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
   퉁이 방면)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지만
   오른쪽이 더 빠름)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석동천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
 
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계곡에는 마땅한 먹거리를 파는 곳과 약수터
  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별서 주인의 정취가 담긴 백석동천 사랑채 터

▲  사랑채터 서쪽

▲  사랑채터 동쪽

월암을 뒤로하고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온다. 계단 역시 눈에 완전히 가려
간신히 형태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주춧돌만이 앙상한 옛 별서의 사랑
채터가 나오는데,
연못과 정자가 잘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 'ㄱ'자형 구조의 사랑채를 만들었
다. 사랑채는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는 별서 주인이 연
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
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
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
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인 석축이 여럿 남아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측면에 본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 주춧돌


▲  사랑채터 동쪽 주춧돌
새하얀 대지에서 볼록 솟은 것이 사랑채터의 주춧돌이다. 아무리 겨울의 제국이
눈으로 천하를 가리려고 한들, 주춧돌까지는 완전하게 가리질 못한다.

▲  눈에 가려진 주춧돌
겨울은 강제로 따뜻하지도 않은 하얀 이불을 뒤집어 씌워 햇님도 못보게 만들었다.
저항의 능력이 없는 주춧돌은 그저 개구리가 개굴거릴 봄을 기다리며
제국의 핍박에서 벗어나길 고대한다.

▲  사랑채터 북쪽의 안채터와 북악산 숲
안채터의 흔적과 주춧돌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겨울의 제국이 흩날린 눈들이 가득 보듬어 준다.


♠  물 대신 눈으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사랑채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물 대신 집채만큼이나
쌓인 눈이 연못을 이루고 있다. 저 눈이 다 녹아 물이 된다면 연못의 모습을 잠시나마 찾을 수
는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이곳을 찾은 이의 말을 들으면 한겨울에 연못에 물이 고여 얼면 스
케이트와 썰매를 탔다고 한다. 눈이 좀 사그라들고 얼음이 얼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옛날에는 백사골의 물을 끌여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다. 지나가던 달님과 햇님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봤을 것이요. 보름달은 자신과
똑같은 둥그런 연못에 같은 달인줄 알고 친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별서 주인은 사랑채에서 곡
차 한잔 걸치며 흘러가던 달을 막아 달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던 그 현장,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선사하여 정자가 파괴되
고 연못 또한 고자가 되면서 저 지경이 되어 버렸다. 땅을 파고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
의 주춧돌이 이곳이 예전 연못임을 희미하게 알려줄 뿐이다.


▲  정자터에서 바라본 연못 동쪽 부분
연못 동쪽 산자락에 석축을 쌓고 연못 주변을 나무와 꽃, 풀로 채워
자연과 어우러진 동천(洞天)으로 꾸몄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 되면 비가 많이 쏟아져 죽어있던 연못에 잠시 생명을 불어넣기도 한다. 자
연의 위대한 힘에 예전과 비슷한 모습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것이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조그만
조각배 하나 띄우고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으며,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나뭇잎 하나 마
련하여 곡차 1병 챙기고 뱃놀이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또한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연못티
를 풍기며,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아직까지 자신
의 건재함을 과시한다.

연못의 둘레는 대략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빛이 닿기가 힘
들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속인(俗人)들에게 감동을 먹이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 시골에 있었
다면, 그 감동은 그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고 시
대나 위치, 부모(건물은 그것을 지은 사람의 신분)를 잘 타고 나야 된다.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령(樹齡)은
약 150 ~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  주춧돌과 신발을 벗던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  정면에서 본 6각형 정자터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들, 그러나 6.25때 정자
가 사라지면서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주
춧돌의 머리를 눈이 두텁게 자리를 잡아 허전함을 어루만져준다. 하지만 쌓인 눈이 너무 두터워
자칫 기둥에 금이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  백석동천의 중심인 6각형 정자터와 연못
연못 너머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과 사랑채 주춧돌이 보인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
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기생(妓生)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생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  겨울에 잠긴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눈에 두텁게 가려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의 나이만큼이나 쌓인 눈때문에 어디가 계곡이고 어디가 암반인지
분간이 쉽지가 않다.

▲  백사골은 그야말로 겨울의 제국이 빚은 은빛의 세계이다. ▼


▲  겨울의 정령이 깃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1)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눈에 하얗게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의 시련을 말없이 견디는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길을 걷다가 혹 미모
를 간직한 겨울의 정령이나 선녀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 뛴다.


▲  겨울의 정령이 깃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2)

백석동천 연못터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넓은 반석이 나온다. 눈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눈 밑에 반석과 계곡이 깔려있다. 아직까지 옛날의 운치와 청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사골은
계류가 맑아서 여러 수중동물들이 살고 있다. 여름에는 동네 애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 및
수중생물의 탄압현장(?), 시민들의 조촐한 피서지가 되는 곳으로 옛 사람들은 반석에 걸터앉아
곡차 한잔 걸치며,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눈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백석동천 바위글씨 ▼

계곡을 버리고 신선이 나올 것 같은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이라 쓰인 커다한 바위
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놀러와 머물다 갈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얀 피부의 바위와 계곡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흰 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天' 4자의 바위글씨는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名筆)임이 틀림없다. 자
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했던 옛 사람들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을 찾아와 그 기념으로 저렇게
낙서를 남겨 놓았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몹시나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  백사골 상류 부분
모든 것을 털어버린 나무가 하늘이 두려운지 감히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계곡 쪽으로 80도 가까이 숙여 자라고 있다.
저 산길을 넘으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뒷골마을이다.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지나 오른쪽 숲길로 2분 가량 가면 속인들의 집이 나온다. 이곳은 백사골
로 들어서는 하림각 코스로 이 루트는 하림각 버스정류장부터 주택가 끝까지 길의 경사가 속세
살이처럼 매우 급하다. 이곳에서 바로 하림각으로 내려가도 되고, 산 허리에 둘러진 산복(山腹)
길을 따라 자하문(紫霞門)으로 가도 된다. 하림각까지는 6~7분 정도 걸리고 자하문은 넉넉잡아
20~25분 걸리는데, 거의 전원(田園) 마을과 같은 부암동의 풍경이 속인의 눈을 제대로 매료시킨
다. 길 중간에는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유명한 산모퉁이 까페가 있으며, 아트포라이프(Art for
life)와 환기미술관 등의 미술 공간이 있다. 북악산길과 만나는 곳에는 서울식 만두로 유명한
자하손만두집이 있으며, 부근에 까페와 찻집이 진한 분위기로 나그네를 유혹한다.
또한 백석동천에서 백사골 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비닐하우스와 밭을 지닌 한가로운 마을
이 나온다.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뒷골마을(능금마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인
종로구 한복판이 맞는지 두 눈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산골마을로 백사골 상류에 자리해 있다. 마
을의 이름인 뒷골은 북악산 뒤쪽에 들어앉아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악산 앞쪽인 청
와대 쪽을 앞골이라 불렀음)
여기서 마을 남쪽의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악스카이웨이와 만나게 되며, 그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김신조투르(북악산 북쪽 능선), 성북동(城北洞) 방면으로, 서쪽으로는 부암
동과 창의문, 인왕산 쪽으로 이어진다. (뒷골마을, 창의문 관련 글 ☞ 보러가기)

이렇게 하여 눈 때문에 조금 고생을 했던 북악산 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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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2년 2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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