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산간마을이나 고산지대의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가 진하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이나 별서(別
墅)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 무계정사(武
溪精舍)를 비롯하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유흥의 장소로 만들어진 세검
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들었다는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골(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
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
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
예로운 이름이다>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
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가
있으며,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는데,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
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
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
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
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집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
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
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라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별서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
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야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는 별서터 일대를 죄다 뒤집어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이때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고.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
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
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
어도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속세에 강하게 어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도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괜히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
※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모두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
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북
악스카이웨이 경유)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하다. 단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아직은
변변치 못해 초행이거나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동네 사람들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44번 백석동길 골목이 있다. (백
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가파른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44번 홍지천길'로 쭈욱 올라간다 → 혜문사 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에서 하차
③ 창의문(자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
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스카이웨이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
퉁이 방면)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지만
오른쪽이 더 빠름)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