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정의 수탈과 착취의 쓰라린 흔적 ~ 발산초등학교에서 만난 문화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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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내에 있는 은적사와 동국사를 둘러보고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발산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곳에는 발산리 석등과 5층석탑을 비롯하여 문화유산 30여 점이 깃들여 있어 군산의 조촐한 보물 창고이자 노천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곳에 이토록 많은 문화유산이 서린 것은 학교 교장이나 선생이 수집하거나 옛 절터가 있어서 가 아니다. 바로 왜정 때 이곳에 대농장을 꾸리며 조선인을 착취한 어느 왜인 지주가 악착같이 수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대한제국 시절, 호남평야(湖南平野)에 잔뜩 눈독을 들인 왜 국은 평야와 가까운 군산을 개항할 것을 대한제국에 요구했다. 개항이 이루어지자 많은 왜인들 이 군산에 몰려와 말뚝을 박았는데, 그중에 시마다니(嶋谷) 야소야(이후 시마다니)도 있었다.
시마다니는 야마구찌(山口)현 구카군 출신으로 주조업(酒造業)으로 어느 정도 돈을 주무르고 있 었다. 군산이 개항되자 호남평야에서 술의 원료인 쌀을 저렴하게 공급 받고자 군산으로 건너와 70,000원의 자금을 쏟아부어 임피면과 개정면 지역의 땅을 사들여 1903년 12월, 486정보의 농장 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의 발산초등학교에 대저택을 지었는데, 1910년 이후 전북과 전남, 충남 에서 적당한 문화유산을 빼돌려 저택의 정원을 채웠다. 또한 동산문화재에도 검은 마음을 품어 막대한 문화유산을 빼돌렸으며, 그것을 안심하게 보관하고자 3층 규모의 거대한 콘크리트 금고 를 만들었다.
군산 지역 농민을 가득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마다니, 그러나 1945년 그들이 신으로 받 들던 왜왕이 미국에게 살려달라고 구차하게 꼬랑지를 내리면서 왜국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38도 이남을 장악한 미국은 조선에 거주하는 왜인들에게 1946년 봄까지 무조건 그들 나라로 꺼 질 것을 명했다. 또한 1인당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1,000엔으로 한정시켰다. 상황이 이러자 조선에서 떵떵거리고 살던 왜인들은 그야말로 쪽박을 차게 생겼다. 그동안 긁어모은 것이 얼만 데 고작 1,000엔이란 말인가? (왜열도에 살던 조선인은 귀국 희망자에 한해 1,000원까지 소지하 고 귀국할 수 있었음) 시마다니 역시 꼴통이 터질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여기서 벌어 들인 막대한 재산을 포기하고 가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것이 한국에 귀화 요청, 귀화를 허락해달라며 미군정에 징징거렸으나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방 2개만을 간신히 지닌 채 1946년 봄, 부산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꼬 랑지를 축내린 늙은 개처럼 통쾌히 추방되고 만다. 결국은 재산의 5%도 건지지 못한 채, 개쫓겨 나듯 돌아감 셈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시마다니의 농장과 문화유산은 미군정이 모두 몰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넘겼다. 동산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으며, 그의 집은 때려부시고 1947년 그 자리에 발산초등학교를 세웠다. 허나 정원을 수식하던 문화유산은 태반이 고향을 알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들을 정성껏 보호하고 관리하여 보존상태가 좋으며 어린이들의 살아있는 역사, 문화유산 공부에도 크게 활용되고 있다.
왜정 때 왜인 농장에서 소작농(小作農)으로 일하던 농민들은 왜인 지주에서 생산량의 무려 50~ 70%를 지세(地稅)로 뜯겨 늘 굶주림에 허덕였다. 쌀과 돈을 꾸더라도 그 이자가 엄청나 갚느라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94A0B4AC4D00302) ▲ 이곳에 말뚝을 박은 욕심꾸러기 왜인의 부질없는 욕심의 현장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금고) - 등록문화재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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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하게 꾸며진 시골학교인 발산초등학교는 석조문화유산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하나 있 다. 바로 시마다니가 귀중품을 보관하던 3층짜리 창고가 그것이다. 다소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이 건물은 밤에는 정말 귀신들이 나와 잔치를 벌일 정도로 음침해 보인다.
이 창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3층 건물로 외벽은 그 당시 흔했던 벽돌 대신 콘크리트 몰탈의 거푸집 공법으로 만들어 내부의 각 층을 구분하는 나무 마루바닥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로 난 창에는 쇠창살을 달고 철문으로 2중의 방범장치를 만들었다. 또한 출입문에는 커다란 미국제 금 고문을 달았다. 이렇게 무식하게 큰 금고까지 둘 정도면 시마다니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렇게나 떵떵거리며 지역 주민들을 쥐어짜던 그는 1945년 왜국의 패망으로 애지중지하던 보물 과 재산을 챙기지도 못하고 거지꼴로 추방되었으니 결국 지나친 욕심이 그런 화를 부른 것이리 라. 그 이후 6.25 때는 군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군산 지역 우익인사들을 이곳에 가두고 괴롭히 기도 했다.
시마다니는 통쾌하게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과 흔적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악명 높은 이름은 이곳을 찾은 이들로부터 두고두고 회자되며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 4자는 참 제대로 떨치고 간 셈이다. 이 금고와 발산초교, 이곳의 문화유산이 있는 이상은 그의 이름은 영원히 묻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1194A0B4AC4D00405) ▲ 초등학교 뒤쪽에 공원처럼 꾸며진 석조문화유산의 보금자리 시마다니 창고와 달리 잠시 발을 쉬고 싶은 아늑한 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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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0484B44500E294C2A) ▲ 어느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을 지켰을 양석(羊石)과 망주석(望柱石),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문인석(文人石)과 귀부(龜趺),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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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초등학교 뜨락을 가득 메운 저들의 고향은 대부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시마다니가 마구잡 이로 빼돌리면서 자신의 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이 어디서 왔는 지를 망각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처지가 비슷한 여러 석물과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초등학 교의 뒤뜰을 가득 메운다. 적어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록이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나라 잃은 문화유산의 얄미운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
![](https://t1.daumcdn.net/cfile/blog/18194A0B4AC4D00709) ▲ 사대부의 무덤에서 가져온 다양한 형태의 장명등(長明燈)들, 그들 사이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발산리 석등의 위엄이 단연 돋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94A0B4AC4D0070B) ▲ 발산리 석등(鉢山里 石燈) - 보물 2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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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 중 단연 으뜸은 발산리 석등이 아닐까 싶다.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아름다운 석등으로 건강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특히 기둥에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 상(飛上)하는 용이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구름 속을 헤엄치는 용을 보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형태의 석등은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여 그만큼 가치가 상당한 보물 이다. 원래는 전주 부근인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鳳林寺)터에 있던 것을 시마다니의 눈에 찍혀 이곳에 끌려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이라 해도 저렇게 섬세하고 수려한 석등에 혹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석등을 받치는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은 같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동그 란 하대를 두었는데, 아래로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8개로 새겨져 있다. 석등의 기둥인 간석( 竿石)은 원통형으로 아래서 위까지 용무늬가 실감나게 새겨져 있다. 화사석을 받치는 상대석(上 臺石)은 8각으로 8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등의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 리를 둥글게 다듬어서 8각을 이루게 했는데, 창 사이로 특이하게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지붕돌은 8각으로 모서리 선이 선명하며, 지붕돌의 위쪽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장식 받침대를 두었으나 보주(寶珠) 등의 머리장식은 없다.
화사석의 사천왕상이나 지붕돌의 양식 등은 보아 신라 후기 양식을 띄고 있지만 받침부분의 기 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하는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석등의 조성 시기는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기로 여겨지며, 높이는 2.5m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9194A0B4AC4D0080C) ▲ 발산리석등의 화사석(火舍石) 화사석 창 사이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보존상태는 그런데로 괜찮지만 저렇게 봐서는 어느 천왕인지는 쉽사리 구별이 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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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산리석등의 기둥(간석)과 하대석
아래로 향해 늘어진 복련의 잎은 마치 고무신을 나란히 얹어놓은 듯 하다. 기둥에는 거대한 용 이 기둥을 휘감으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섬세 하게 표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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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맵시가 일품인 발산리5층석탑 - 보물 276호 |
발산초등학교의 석조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키가 큰 발산리5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탑 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앞의 석등과 더불어 봉림사터에 있던 것 을 석등과 함께 이곳으로 끌려왔다. 5층석탑이긴 하지만 5층 부분은 없어지고 지금은 4층만 남 아 있으며, 탑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만든 것이다. 탑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고 맵시가 고우며, 고려 탑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54E5E36500E294A35) ▲ 6각부도(왼쪽)와 2층과 3층 탑신을 상실한 3층석탑(가운데) 그리고 키 작은 부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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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11194A0B4AC4D00A11) |
◀ 발산리6각부도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5호 흡사 삿갓을 쓴 나그네같은 이 6각부도는 시마 다니가 소재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 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 도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6각형 부도로 균형 잡힌 몸매에 조각 수법도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6각형 불교 조형물이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로 송나라의 6각형 석물을 보고 따라한 것이 그 시 초이다.
바닥돌 위에 6각의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6각 의 중대석을 두었다. 6각의 탑신에는 2개의 문 비를 새겼으며, 탑신 지붕에는 기와를 선명하게 조각했다. 탑의 높이는 1.7m로 작고 단촐하지만 고려 부도(浮屠)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
※ 발산초등학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군산시외/고속터미널 남쪽 팔마광장5거리 농협앞에서 개정, 대야 방면 21, 22, 23, 30번 계열 시내버스를 타고 발산육교에서 하차, 여기서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 개정면사무소 방면으로 7 분 정도 걸으면 발산초교이다. (이정표가 있으므로 찾기는 쉬움) * 군산역에서 발산초교까지는 7km 거리로 가까우나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없다. 버스로 갈 경우 시내로 나가는 버스 아무거나 잡아타고 군산시청이나 시외터미널에서 개정, 발산 방면 시내버 스로 환승해야 된다. 허나 군산역에서 택시로 가면 10분 이내에 도착한다. * 익산역이나 익산터미널, 원광대병원에서 20번 시내버스를 타고 대야4거리에서 21, 22, 23, 30 번 계열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발산 하차 / 대야에서 86, 87번 버스를 탔을 경우에는 발산초교 (개정면사무소)에서 내린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개정면사무소나 학교 주변에 하면 됨) ① 서해안고속도로 → 동군산나들목을 나와서 대야 방면으로 우회전 → 대야 → 발산초교 입구 에서 우회전 → 발산초교 * 발산초등학교는 늘 개방되어 있다. (개방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