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삼선동 남쪽 구석이자 한성대학교 서쪽 밑에 삼선공원이란 동네 공원이 있다. 그 공원에 고색이 짙은 큰 기와집이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이 건물은 1868년에 삼군부 청사로 지어진 것으로 총무당과 청헌당, 덕의당이 삼군부의 핵심 건물이다.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규모가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히 있었으며, 그 사이를 복도각이란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 1870년 4월 화재로 삼군부에 딸린 건물 79칸이 화재로 쓰러져 그해 10월 다시 지었는데, 이때 총무당도 피해를 입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별탈이 없었던듯)1880년 삼군부가 혁파된 이후에는 정치, 군사를 총괄하던 통리기무아문과 시위대 청사로 사용했으며, 고약했던 왜정 시절에는 조선보병사령부 건물로 쓰이기도 했다...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
1. 적조사 정문 흥천사 뒤쪽(서쪽)에는 조그만 산사인 적조사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846년 흥천사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처로 세운 칠성 각에서 비롯되었는데, 1849년 혜암성해가 칠성각을 손질해 적조암을 세우고 염불관선의 수행처로 삼았다. 오랫동안 흥천사의 부속 암자로 있었는데, 1900년대에 소실되어 사라진 것을 1958년 경산희진(학산대종사)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중건했다. 경산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3번이나 지낸 승려로 그의 인생 마지막 날까지 이곳에 머물며 교단 정화와 화합에 나 섰다. 1960년대 가람을 정비했고, 1970년대에 흥천사의 부속 암자에서 벗어나 독립된 사찰이 되면서 적조사로 이름을 갈 았다. 또한 관자재보살의 강림 도량임을 내세워 절을 널리 홍보했다. 경산은 197..
1. 흥천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삼존상과 아미타불회도 가건물로 이루어진 관음전에는 대방에서 옮겨온 탱화와 목조관음보살상이 들어있다. 관음전 불단에 장엄하고 있는 목조 관음보살상은 좌우로 용왕과 선재동자를 거느린 관음삼존상이나 좌우 협시상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보이지 않고 관세 음보살 누님 혼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왕과 선재동자는 절 창고에 있는 듯함) 목조관음보살3존상은 조성발원문을 통해 1701년에 조성되었음이 알려졌는데, 원래 전북 임실에 있는 사자산 적조암에서 만들어 봉안한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흥천사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용왕과 선재동자를 거느린 관음3존상은 수월관음도에 많이 보이나 조각의 경우에는 보은 법주사와 남해 보리암, 고성 운 흥사 목조불감 정도가 전부라 매우..
1. 흥천사 연화대감로도 왜정 말기인 1939년에 그려진 감로도이다. 그 시절 생활모습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 장면까지 그려져 있어 기존 의 감로도와는 많이 다르다. 2. 도량신도 도량을 장엄하고 삼보의 도량을 지키는 신장을 그린 그림이다. 도량신은 화엄경 략찬게에 등장하는 화엄신 중 하나로 도량 의 더러움을 단죄한다고 한다. 도량신은 화면 상단의 삼곡병처럼 각이 진 흰색을 배경으로 하여 정면을 향해 앉아있다. 도량신 뒤쪽 좌우에는 산개와 당번 을 든 동자가 있으며, 정면 좌우에는 2명의 신장이 칼과 원형의 지물을 들고 중앙을 향해 서있다. 도량신은 단령의 붉은 관 복에 가슴과 허리에는 각각 각대를 차고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데, 세필로 얼굴의 입체감과 수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과 눈과 눈썹을..
1. 흥천사 지장시왕도 이 그림은 1867년에 의운자우가 그렸다. 푸른 두광과 연두색 신광을 지닌 지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로 시왕과 명부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19세기 후반 서울 지역 지장시왕도의 새로운 형식을 열었다는 그림으로 지장보살이 두 손으로 보주를 들고 있는 점, 그 밑 에 선악동자 2명이 지장보살의 석장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기존의 지장시왕도와 다르다. 개운사 지장시왕도(1870년), 봉 국사 지장시왕도(1885년) 등이 바로 이것을 참조했으며,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후반 서울, 경기, 경상도에서 널리 유행했다. 안정된 구도와 홍색을 기반으로 녹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구사력, 세부 문양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표현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새로..
1. 흥천사입구에 있는 돈암동 느티나무 약 38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0m, 둘레 2.4m의 덩치를 지녔다. 오랜 세월 흥천사 밑 마을을 지켜준 존재로 나무 그늘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운 장승과 돌탑이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로 흥천사 주변이 강제 성형을 당하면서 장승과 돌탑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나무도 쇠약해져 골로 가기 직전인 것을 동네 주민들과 흥천사 승려가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다행히 생기를 되찾았다. 2014년 정자나무 가꾸기 사업으로 주변이 지금처럼 산뜻하게 정비되었으며, 서울시 보호수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1968년에 보 호수로 지정됨) 2. 느티나무로 흥천사 경내로 인도하는 길 경내 밑에는 절에서 운영하는 유료 주차장이 있는데, 길 차단봉 자리쯤에 예전에 흥천사 ..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城北洞) 산책 ' ▲ 삼청각 편운정 서울 도심의 갑옷인 한양도성, 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북문에 해당되는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을 나서면 바로 성북동이 도심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서울의 주산 (主山)이자 영원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서울의 늠름한 진산(鎭山) 북 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인 성북동은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쎈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 분위기를 자랑하며 다소 예민한 지정학 적 위치상 개발의 물결도 잠잠하다. 하여 성북동에 오면 서울특별시 성북구가 아닌 교외(郊外 )로 나온 듯한 기분이 물씬 든다.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나라에..
* 정릉동 봉국사 북한산(삼각산) 남쪽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약사사라 하였으며, 이후 비운의 정릉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복구하고 제를 올리면서 인근에 있던 이곳과 경국사를 정릉의 원찰로 삼아 관리하게 했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국사로 갈았다. * 봉국사 일주문 (정릉로 대로변에 있음) * 봉국사 범종루와 천왕문 - 문 하나가 2개의 기능을 한다.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 - 사람들이 공양밥을 먹고자 길게 줄을 서고 있다. * 봉국사 천불전 * 봉국사 명부전 - 인근 흥천사(신흥사)의 명부전 현판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