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127C0E564E24724F09) ▲ 회룡골의 찬란한 꽃, 회룡폭포
![](http://2.bp.blogspot.com/-AxYQSH-d1gU/VZWId3oCxlI/AAAAAAAAIbc/zO_zgVpjtZs/s640/YyKq.kV6d4xpkWX7RCOqiA.jpg) ▲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멋드러진 반석들 (회룡폭포 위쪽)
![](http://4.bp.blogspot.com/-rZDUcVtsHuU/VZWIa8YJ32I/AAAAAAAAIas/IT26eFhT1VY/s640/AnpshQiwbpQyEZnYMHE4cA.jpg) ▲ 바위를 따라 내려오는 회룡골, 그 곁에 회룡사 접근을 이유로 시멘트를 높이 발라 어울리지도 않는 옥의 티를 선사해버렸다.
![](http://4.bp.blogspot.com/-WtX9knLuoY0/VZWIiOhZn9I/AAAAAAAAIcg/CbzGSolz18A/s640/yGq1aePTXd7nhqm38tLMng.jpg) ▲ 회룡사로 오르는 길 길은 힘들지만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연등의 안내를 따라 묵묵히 오르다보면 금세 회룡사 산문이 마중을 한다.
![](http://3.bp.blogspot.com/-iVvK3U7EPng/VZWIfznnDnI/AAAAAAAAIbw/b8xBhHpZrdU/s640/cVLIT5JrRMi9B2IKhU34pw.jpg) ▲ 드디어 도착한 회룡사 정문 회룡사는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며, 이곳이 그 역할을 대신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회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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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굴지의 오랜 산사(山寺),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도봉산 회룡사(回龍寺) 도봉산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사패산(賜牌山, 552m) 동쪽 자락 회룡골에 비구니 사찰, 회룡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사패산은 조선 선조(宣祖)의 6번 째 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가 유정량( 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회룡사는 681년(신라 신문왕 원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했다고 한 다. 930년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고, 1070년(고려 문종 24년)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 을 했으며, 1384년(우왕 10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년)에 회룡사로 이 름을 갈았다고 한다. 허나 무학대사 이전은 이를 입증할 자료와 흔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권상로(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하권 회룡사 부분에는 무학대사가 1384년 또는 1395년에 창건했 다고 나와있으며, 1881년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는 1384년 무학이 지은 것 으로 나와 무학대사 창건설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사실 의상대사의 창건설은 이 땅의 많 은 오래된 절들이 창건주로 팔아먹는 유명한 승려를 그를 절 창건주로 내세워 내력을 윤색시키 고자 함이다. 정작 그가 창건한 절은 부석사(浮石寺) 외에 몇 개 되지도 않는다.
'회룡사중창기'에는 1384년 창건설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384년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가 도봉산에서 같이 창업 성취 기도를 올렸는데, 이성계는 회 룡사 뒤쪽 석굴암에서, 무학대사는 무학굴(지금의 회룡사)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1388년 이성계는 최영(崔瑩) 장군과 우왕(禑王)의 명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정벌하러 가자 무학은 작은 절(회룡사)을 짓고, 손수 만든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봉안하여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요동을 코앞에 둔 위화도(威化島)에서 딴 뜻을 품고 군사를 돌려 고려 조정을 뒤엎은 이성계는 이후 왕위에 오른 뒤 무학을 찾아가 회룡사란 절 이름을 내렷다고 한다. 회룡(回龍)은 용이 돌 아왔다는 뜻이니 즉 용으로 상징되는 제왕, 이성계가 돌아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회룡사중창기'에는 '회룡'의 연유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1403년(어떤 기록 에는 1398년) 2차례나 일어난 아들들의 권력 싸움, 왕자의 난에 뚜껑이 폭발한 태조(太祖) 이성 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갔다가 서울로 환궁할 때 회룡사에 있던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태조 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며 그와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무학은 그의 환궁을 크게 기뻐했는데, 태 조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자신이 환궁했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연 스레 1384년(또는 그 이후)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정답일 듯 싶으며, 15세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이 있어 이를 더욱 입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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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1630년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된 듯 싶다. (이때 비구니 절로 전환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 1878년 혜봉 최성(慧峯 最性)이 상궁(尙宮) 박씨의 지원으로 절을 크게 중수했고, 1881 년 경해당 원삼(慶海堂 圓三)이 잘나가는 장인들을 모아 당우와 요사를 새로 지었다. 이때 채사 (彩師)들을 초빙하여 지장탱과 신중탱, 현왕탱, 무학대사의 진영을 조성했는데, 시주자는 상궁 하씨와 조씨 등이었다. 비록 왕실의 지원은 아니지만 왕실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상궁들의 지원 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사라진 이후, 1938년 순악(順岳)이 요사를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절은 잿더미가 되었 다. 전쟁이 끝나자 도준(道準)이 1954년부터 중창불사를 벌여 승당(僧堂)과 대웅전, 약사전, 선 실, 요사 등을 다시 지었으며, 197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87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 으며, 1988년에 범종각을, 1996년에는 극락보전과 삼성각, 노전채를 새로 지었다. 거기서 멈추 지 않고 2000년에는 선원인 취선당(聚禪堂)을 개축하고, 2001년에는 성견(性見)이 삼성각을 증 축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삼성각, 설화당, 취선당, 범종각 등 8~9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조선 초기 석탑인 5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조와 신중도 등 지방문화 재 3점을 품고 있다. 건물들은 죄다 6.25이후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씻겨 내려갔 지만 3점의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도봉산을 아우른 북한산(北漢山)국립공원 일대의 대표적인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 하며, 석조관음보살상을 통해 나름대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고 있다. 멋드러진 회룡골을 옆에 품고 있고,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로 고즈넉한 산사의 멋 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끈질긴 번뇌라 한들 회룡골과 도봉산의 청정한 기운 앞에 꼬랑 지를 내리고 도망을 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절을 구경하고 회룡폭포나 회룡골에서 발을 담구며, 피서를 즐기 는 것도 괜찮다. 게다가 회룡사 바로 뒤에는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석굴암이란 조그만 암자 가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다만 석굴암은 바로 질러가지 못하 고 석굴암입구 갈림길로 내려와서 다시 10분 정도를 올라가야 된다.
※ 도봉산 회룡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5분. 회룡탐방지원센터까지는 수레가 들어갈 수 있 도록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후는 수레 1대 다닐 정도의 산길이다. 회룡폭포를 지나서 경 사가 좀 급해질 뿐,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수레로 회룡사까지 접근 가능) * 서울 종로5가, 동대문, 혜화역, 돈암동, 미아4거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06, 108번을 타고 회룡 역 하차, 회룡역 밑을 지나 도보 40분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전좌로 155번길 262 ☎ 031-873-3391) * 회룡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회룡골재 정상이다. 여기서 서쪽은 송추, 북쪽은 사패산 정상과 안골로 이어지며, 남쪽 능선을 타고 망월사나 포대능선, 자운봉으로 넘어가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