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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  청계사 와불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끝 무렵에 후배들과 의왕시에 자리한
청계사를 찾았다.
그곳은 예전에 2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는데, 간만에 그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그냥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안양(安養)의 동쪽 요충지인 인덕원역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집에서 만두와 여러
과자 등을 사들고 대기하고 있는 청계산행 의왕시 마을버스 10번에 몸을 담는다. 평일이라
등산 수요는 거의 없지만, 대신 청계지구 주민들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만석의 기쁨을 누린
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청계사입구에 조성된 청계지구에서 승객을 모두 쏟아내고 우리만 태운
가뿐한 상태에서 청계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의 밑도리를 지나니
아파트와 시가지 대신 산과 들녘이 전부인 농촌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청계사천(淸溪寺川)을 따라 계속 들어가던 버스는 청계산 주차장에서 그만 두 바퀴를 멈춘
다. 그곳이 그들의 종점이었던 것. 그래서 여기서부터 별수 없이 걸어가야 되는데,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  청계사계곡 숲길

청계지구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목에는 맛과 분위기를 내세운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절을 목
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날이 평일이라 몇몇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계사 종점에서 7분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을 경계로 더 이상 속세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연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기서부터는 99% 자연 및 부처의 청정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청계산에서 발원한 청계사계곡도 여기서 청계사천으로 간판을 바꾸며 속
세로 길을 재촉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하나로 쭉 이어진 길(청계로)은 수레길과 숲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청계사로는 이어진다. 빨리 가고 싶다면 잘 닦여진 수레길을 이용하면 되지만 4발 수레의
적지않은 눈칫밥과 고약한 매연 냄새를 감당해야 된다. 그러니 차라리 친환경적인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숲길은 통행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을 닦았는데, 늘씬하고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신선한 숲내음을 베푼다. 산바람이 아직은 차갑지만 청정하고 해맑은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람
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심신(心身)이 맑아지는 기분. 게다가 숲길 옆에는 청계사계곡이
졸졸~♬ 흘러 그 나름대로 계곡의 바람을 선사하니 찰거머리같은 번뇌(煩惱)도 여기서만큼은 바
짝 긴장을 탄다. 

숲길 입구에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서 속세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섭취했다. 원
래 절 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다들 시장기가 높아 잠시 청계사를 잊고 여기서 자리를 펼쳤다.

▲  청계사계곡 숲길
겨울이라 실감이 덜해서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정말 옆구리에 끼고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하고 있는 청계사계곡
눈과 얼음의 지배를 받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계곡, 허나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다시 수레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지는데, 그길을 5
분 정도 오르면 청계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첩첩한 청계산 산주름에 묻힌 청계사
의 바깥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주차장 밑에 자리한 청계사 표석
바위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여 있다.

▲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

청계사 주차장 동쪽에는 승탑(僧塔, 부도)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들은 원래 극락
보전 서쪽에 있던 것으로 밑 석축에는 사적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심어져 있고, 윗 석축에는
승려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승탑 주인의 생애가 담긴 검은 피부의 가로형 비석들이 널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숙성이 된 존재는 청계사의 내력을 담고 있는 사적비로 고려 후기에 청계사
를 크게 일으킨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 조운
(趙橒)과 조신(趙新)이 1689년에 세웠다. 조운이
문장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피부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과 검은 때
가 여럿 있지만 아직은 글씨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다.
<청계
사 관련 자료에는 1341년에 세웠다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淑公祠堂記碑)가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못했음>


▲  아직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청계사 사적비(事蹟碑)

적비와 승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경내 밑부분에 이른
다. 오를 때는 모르지만 계단이 조금 각박하니 내려갈 때는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청계사의 내력을 잠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  청계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고색의 절집, 와불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

청계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청계사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으며, 조선 후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엮은 봉은본말사지(奉恩
本末寺誌)에도 단순히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1줄 뿐이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石燈)과 승탑의 잔재가 있다고 하니 (확인은 못했음) 적어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없음에도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의상대사(義湘大師), 자장율사(慈
藏律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상당수의 절보다는 좀 양심적이다.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원)의 그늘에 있던 충렬왕(忠
烈王) 시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많은 자금을 들여 청
계사를 중창하고 집안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절 아랫
쪽에 별당(別堂)을 지어 잠시 머무는 등, 청계사를 특별히 옆구리에 끼었다.
이렇게 당대 실력자인 조인규(평양 조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청계사는 오랜 세월 그
의 후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절을 꾸렸는데, 경내에 조인규의 영당(影堂)을 지어 그를 기렸으며,
1431년과 1448년에 영당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면서 천태종(天台宗) 소속이 되었
으며, 1448년 경내에 있던 대장경(大藏經)이 인출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시
절에는 흥천사(興天寺)와 원각사(圓覺寺) 등 한양도성의 많은 사찰이 연산군 또는 유생에 의해
대거 박살이 나면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禪宗)의 본찰(중심 사찰)인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
場)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 잠시나마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된다.
허나 그 영광도 잠시, 광해군(光海君) 시절에는 청계사 소속의 전답과 노비가 나라와 양반들에
게 대거 몰수당하거나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으며, 1689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자 성희
(性熙)가 평양조씨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 (이때 사적비가 세워짐)

1701년에는 경내 제일의 보물인 동종이 조성되었으며, 정조가 왕세손(王世孫) 시절이던 1761년
친히 이곳을 찾아 원당(願堂)을 짓고, 밤나무 3,000주를 내려 원감(園監)을 두어 관리케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9년 경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인 현륭원(顯隆園)의 제각(
祭閣)을 지어 매년 2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바로 그 해에 평양 조씨인 조심태(趙心泰)의 지
원으로 절을 중창했다.
1862년에는 괘불(掛佛)을 봉안했고, 1876년 3월 무심히 찾아온 화마(火魔)의 위엄 앞에 불전들
이 앞을 다투어 쓰러지자 1879년 주지 은곡(隱谷)이 중건을 벌였으나, 예전만큼은 못하여 간신
히 호흡이나 하는 지경이었다.

1900년 법당인 극락보전을 세웠고, 왜정 시절에는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는데, 경허(鏡虛)
를 비롯한 만공(滿空), 월산(月山), 금오(金烏) 등 당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풍(仙
風)을 떨치기도 했다. 1955년 비구니인 아연(娥演)이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을 벌이기 시작했
고, 1965년에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변경되었다.

1999년에는 와불상을 조성해 경내에 새로운 볼거리를 이끌어냈고, 2000년 이후 주지 종상이 경
내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진입로를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2001년에 극락보전을 중수
했는데, 바로 전년 10월에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의 협시(夾侍)인 관음보살상 상호 왼쪽 눈썹 주
변에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담바라는
아직도 관음보살상 눈썹 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며, 20여 송이나 피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존
재를 몰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청계사에 갈 일이 있다면 그 꽃을 꼭 눈에 담기 바란다.
(우담바라가 풀잠자리 알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지장전, 서요사, 동요사, 동종각 등 10
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
정된 신중도와 소장목판(所藏木板, 1622년, 1623년, 1831년에 만든 14종 466판,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 135호
)과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76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사적
비와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괘불 등이 앞을 다투며 고색의 향기를 더해준다. (소장
목판은 비공개이며,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등의 행사일에만 잠깐 얼굴을 비침) 또한 청계사 전체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첩첩한 청계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 산사의 향기도 매우 진하며, 서울이나 안양, 성남, 의왕 등
기라성 같은 도시와 가까이 있음에도 꽤 멀리 나온 듯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속세에서 잠시 나
를 지우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서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때 무작정
찾아와 안기고 싶은 포근한 산사이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삼삼한 숲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청정한 계곡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승지로 수도권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청계산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여, 이곳을 시작으로 응봉을 경유해 과천(果川) 문원동이나 포일2지구로 내려가거나, 청계산
정상을 거쳐 서울 원지동, 옛골 방면이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도 된다.

※ 청계산 청계사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2번 출구)에서 의왕시 마을버스 10, 10-1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
  계산 주차장 종점에서 도보 20분. 18시 이후에는 청계산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상청계(청계산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상청계에서 청계사까지는 도보 30분)
* 분당이나 죽전, 수지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103번(분당 도촌동, 야탑역, 판교 백현마을), 303
  번(분당 오리역, 판교 백현마을), 좌석 1303번(모현 외대, 죽전 단대, 분당 오리역/정자역),
  좌석 1550-3번(광교, 수지구청역)을 타고 양지편에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10, 1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양지편 전 정류장인 청계동주민센터과 한직골(청계농협)에서 내려도
  되지만 여기서는 10-1번 마을버스 밖에 없다.
* 청계사 셔틀버스가 인덕원역(4호선) 3번 출구 인덕원프라자 앞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9시
  와 10시, 초하루와 석가탄신일, 백중, 칠석, 동지 때는 오전에 5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바로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과천)/안양/군포/의왕 → 인덕원4거리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좌회전
   → 청계사
② 성남(분당/판교)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우회전 → 청계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로 475 ☎ 031-426-2348)
* 청계사는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가끔 짜장밥이 나오기도 함)
* 청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청계사 극락보전 주변 (오른쪽이 동종각)

▲  청계사 수각(水閣)

경내 밑에서 높이 5m 정도 되는 계단을 더 딛으면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극락보전 뜨락은 하얀
피부의 박석(薄石)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꽤 깔끔해 보이는데, 그런 뜨락 중앙에는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수각이 자리해 있다.
수각은 산사의 필수 요소인 샘터의 보금자리로 동그란 석조(石槽) 주위에 4개의 붉은 기둥을 세
우고 시원한 처마의 팔작지붕을 얹혀 소박하게 건물을 이루었다. 이렇게 샘터에 건물을 씌워 수
각으로 삼은 절이 꽤 되는데, 이는 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그만큼 물은 어디서든 소중하니 말이다. 특히 고적한 곳에 자리한 산사는 더욱 그렇다.

수각 석조에는 청계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넘쳐나는데, 산사에 왔다면 그곳의 샘물은 꼭 마셔줘
야 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콸콸콸 마시니 그렇게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몸
속에 낀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석조 안에 사람들이 무심히 투하한 동전이
여럿 잠들고 있어 그냥 마셔도 뒷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지
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그냥 두었다. 절에서는 이들 동전을 계속 방치해 수질에 영향
을 주지 말고 속히 구제하여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다. 이들 동전도 다 비싼 세금을 들여서 만
든 것이니 말이다.

수각 서쪽에는 2층 규모의 서요사(西寮舍)와 가건물 찻집이 있다. 찻집에서는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데, 거기서 차와 커피를 구입하여 서요사 앞에 널린 의자에서 마시면 된다. 차와
커피 가격은 2~3천원선으로 속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 서요사 앞에는 그보다
더 저렴한 길다방 자판기가 있어 돈이 궁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하면 된다. 자판기 커피 가격은
300원선.. (자판기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청계사 동요사

▲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비천상(飛天像)의 위엄

▲  수각과 극락보전 경계선에 자리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수각과 동/서요사보다 1단계 높은 곳에 다양한 모습의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거의 90도로 서
있는 다른 12지신상과 달리 편안한 포즈로 정면 또는 좌우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특히 쥐 같
은 경우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쌀을 축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소소하게 웃음을 건네준다. 마치
이 땅의 현실을 그렇게 함축한 것일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연등을 평방(平枋)에 두룬 청계사 지장전(地藏殿)

뜨락에서 2단계 높은 곳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극락보전 우측
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는 와불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와불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지장전 뒤쪽에서 졸고 있는 청계사 연(輦)
석가탄신일이나 불교 행사 때 불상이나 불경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  찻집 주변에 누워있는 옛 석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로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석조에게
수각의 자리를 넘기고 이렇게 뒤로 물러나 물 대신 겨울 제국이 내린
하얀 눈을 강제로 머금으며, 왕년을 그리워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청계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고 있다.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3명
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봉안하고 있는데, 경내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천하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그 뒤쪽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  조그만 석불좌상과 칠성탱

▲  산신탱과 독성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청계사 경내


 

♠  청계사 극락보전, 와불 주변

▲  청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청계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200년 정도
들어보이지만 실상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제 110여 년 정도 되었다. 대들보에서 '
庚子 三
年 三月'이란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를 따져보니 1900년이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과 신중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 옆에
자리한 관음보살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가 피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꽃이 조그
만하여 두 눈을 크게 부릅 떠야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담바라는 21송이 정도 피어있으며, 길
이가 겨우 1cm 밖에 안되는 가녀린 존재이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아미타불 왼손 쪽이 관음보살)

극락보전 불단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다. 중심 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110cm, 협시보살은 107cm
로 다들 조선 후기(1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다.


이들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커보이는데, 거의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볼살이 매우 푸
짐하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고 있고, 눈은 좌우로 길고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는 작고 오목하다. 붉은 입술은 조그만 하며, 얼굴 좌우에 붙어있는 귀는 중생
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다들 표정도 온후하여 나름
미소를 선보이며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다독거리며,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 왼손 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같은 경우는 우담바라가 피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세지보살과 양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대세지보다 이전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체
와 상체, 머리 부분에서 나발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점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불상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아미타불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
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74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색채가 고운 신중도(신중탱)가 자리해 있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들의 무
리를 담은 것으로 법당의 수호를 위해 법당 내부에 많이 걸어둔다.

이 그림은 1844년에 제작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경성(京城, 서울)
학파 승려의 화풍이 반영되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에 음영을 주고 코발트색과 금니(金泥)를
사용해 색채가 매우 곱지만 등장 인물이 많아 (어림 잡아 30명은 넘음) 다소 빽빽하게 보인다.


▲  동종이 담긴 동종각(銅鍾閣)

극락보전 좌측에는 조그만 동종각(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다른 절
의 범종각보다 규모도 좀 작은 편이고, 그 안에 담긴 동종 역시 많이 왜소하다. 허나 작다고 그
냥 지나치지 말자. 이 동종은 경내에서 제일 가는 보물로 국가 지정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비싼 몸이다.

▲  청계사 동종(銅鍾) - 보물 11-7호

동종각에 담겨진 동종은 높이 115cm, 입지름 71cm의 조촐한 종으로 그의 청동색 피부에 '康熙四
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1년에 동 700근을
들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광주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이후에 절의 이름을 따서 청계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광주(廣州) 고을의 범위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알
려준다.
청계사에서 조성된 동종이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러 있다가 1975년에 돌아왔으며, 경기도 지
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00년에 사인 비구(
思印 比丘)가 만든 다른 종과 묶어서
보물 11호 계열로 승격되었다.

청계사 동종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사인 비구가 만든 조선 후기 종으로 다른 범종에 비하여 작은
편이나 무게가 700근에 이르며, 종 꼭대기에는 2마리의 용이 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종 윗도
리에 보살입상 4구와 9개의 유두가 달린 유곽이 2개 있다. 이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종 밑도리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범종의 제조 기법이 반영되어
있으며, 명/청나라의 범종 양식을 슬쩍 대입한 듯,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다. 또한 그 밑
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신상명세를 알려준다.

이 종을 만든 사인은 종을 매우 잘만들었다. 이곳을 비롯하여 천하에 그가 만든 종이 8개가 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그의 굵직한 작품에 비해 그의 삶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세상에 조용히 나타나 조용히 종만 만들다가 조
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  청계사 와불상(臥佛像) ▼

극락보전 좌측에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청계사의 새로운 명물인 금빛의 와불상이 있다.
와불은 말그대로 누워있는 불상인데,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 아닌 정면을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이다. 이런 불상은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기껏해봐야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와불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누운 것이 아닌 하늘을 보며 누워있
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와불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보기가 쉬워졌다.
청계사도 그 유행을 타고 1999년에 하나 장만했는데, 이곳에 있던 지장전을 극락보전 옆으로 밀
어내고 터를 넓게 닦아 와불을 봉안했다. 특히 이곳 와불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닌 조그만
자갈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꽤 눈길을 끈다. 보잘 것 없는 자갈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해 와불
이란 무시못할 작품으로 거듭났으며, 그 자갈을 일일이 모아서 만든 청계사의 노력도 참 대단하
다. 물론 새로운 명물거리를 만들어 절의 명성과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자갈에 색을 입히지 않아 거의 하얀 피부를 지녔으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죄다 금칠
을 칠해 졸지에 금색 와불이 되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자갈이 아닌 금동불로 보인다.

와불 앞에는 예불을 올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와불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조그만 금동불
을 빼곡히 집어넣어 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넣어둔 원불(願佛)이다.

▲  와불상 뒷쪽

▲  와불상의 발부분

내가 본 와불은 이곳을 비롯해 석모도 보문사(席毛島 普門寺), 기장 장안사(長安寺), 화순 운주
사(雲住寺) 정도이다. 운주사 와불을 제외하면 죄다 근래 조성된 것들로 지금은 그저 그런 존재
로 시선을 받고 있지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20~21세기 불상 양식이라 하여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존재로 애지중지 될 것이다.

와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청계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서요사에 있는 길다방 커피에서 추
위에 시달린 몸을 달랠 겸, 커피 1잔을 뽑아마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2월 하순이지만
햇님이 산을 싫어하는지 산속에서는 속세보다 해가 일찍 저문다. 이제 5시가 넘었음에도 땅거미
의 정도가 진해졌으며, 해가 기운 만큼 겨울 제국의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면서 찬바람의 패기도
제법 높아졌다.

청계사에서 머문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겨울 제국의 차가운 등쌀에 떠밀려 청계사와의 짧
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길을 향한다. 우담바라를 친견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그때 와서 보면 된다. 내가 서울에 있는 한,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나 또는 청계
사가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또 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청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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