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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길목에서 만난 쌍미륵불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 石佛立像)'

파주 용미리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 용미리 석불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용미리 마애2불입상'이나 오랫동안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이라 불렸으므로 본글에서는 이들 명칭을 같이 썼음)


 

늦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한복판에 쌍미륵불로 유명한 용미리석불(마애2불입상)을 찾
았다.
파주시 문산, 파주, 광탄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
역)을 타고 고양시 동부와 해음령, 용미리 남부 지역을 지나 용미1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
으면 고개 중턱 숲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올 것
이다. 바로 용미리석불이다. 석불 밑에는 그를 후광으로 절을 꾸리는 용암사란 조촐한 절이
있다.


▲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

용암사 입구에는 절을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석불
을 찾은 중생을 인도한다. 경내 남쪽에는 넓게 주차장이 닦여있으며, 경내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경내로 가는 길은 푸른 옷을 걸친 숲길이다. 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이 코끝을 강하게 스치면서
번잡한 마음과 뇌리가 말끔히 정화된 듯, 시원해짐을 느끼며, 다른 절과 달리 절의 정문인 일
주문(一柱門)이 없다. 허나 그런 문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섬으
로서 부처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지키는 조그마한 산사(山寺)
~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

▲  용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등, 5층석탑

용미1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장지산 서쪽 자락에는 용미리석불입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산사, 용암사가 포근히 안겨 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시
기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경내 북쪽에 용미리 석불이 있고,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
―절 이름은 전해오지 않음―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로 여겨진다. 허니 창
건 이후 이렇다 할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36년 파주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지금
의 절을 세우고
승려 혜성(慧城)이 그 불사를 담당하여 절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

절을 이루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요사, 삼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
금의 절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라 고색(古色)의 멋은 찾아 볼 수 없다. 허나 절
집의 규모가 작고 조촐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건물들도 절의 규모 마냥 적당한 크기를 지니
고 있어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무리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그 앞뜰에 5층석탑과 석등 2기가 하얀 피부의 반질반
질한 맵시를 드러내 보인다. 석등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참배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국토
통일 천일기도 광명등(光明燈)이란 기나긴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뜨락 중앙에 자리한 5충석탑
은 예전에 대웅전을 중수했을 때 세웠다.
작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8년에 지어졌
다.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뒤에 석가후불탱화가 있으며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
(佛畵)가 건물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절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금당(=법당, 대웅보전)과 하나의 탑이 있는 1금당 1탑 형식으로 금당과
탑이 용미리 석불을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절이 들어앉은 지형을
보니 남향(南向)으로 법당을 세우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대웅전 주변에는 요사, 범종각이 있고, 석불로 가는 길목에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  용암사 삼성각(三聖閣)
칠성과 산신, 독성을 봉안한 건물로 원래는
용미리석불에게 기도를 올리는 용도로
세워졌다.

▲  삼성각 부근 공터에 놓여진 돌들
1936년 지금의 용암사를 세울 때 지어진
건물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용미리 석불에서 떨어져 나온 7층석탑과 동자불상

삼성각 좌측에는 소박한 모습의 아담한 동자불상(=동자상)과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7층석탑이
나란히 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로는 이들의 유래가 적힌 표석이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용미리석불과 한 몸으로 지내던 것으로 1980년대 이전 석불 사진을 보면 동자불상
은 석불의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어깨 위쪽, 7층석탑은 그 오른쪽 아래에 있었
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시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며, 이승만의 어머니가 용미
리석불에서 아들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4년 이승만이 용암사
를 방문하여 남북통일과 자손을 염원하고자 그들을 만들었는데, 어이없이도 이것을 용미리석불
에 주렁주렁 단 것이다.

그 이후 동자상과 7층석탑이 석불의 미관을 망치고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
면서 1987년 석불에서 떼어내 요사 뒤쪽에 두었다가 2009년에 석불 밑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
여 기념표석을 세웠다. 1987년 이전에는 동자상 때문에 2체불이 아닌 3체불(體佛)로 오인을 받
는 경우가 많았다.
7층석탑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를 연상케 만드며 동자상은 어린
동자를 보듯 포근한 표정이다. 그래도 이들은 60년 묵은 것들이라 반백년 세월의 때가 진하게
얼룩져 있다.

절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가볍게 1분 정도 오르면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오게한 주인공,
머리 둘, 몸통 둘이 달린 거대한 불상,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  요사 뒤쪽에 있던 시절의 동자상과 7층석탑 (2007년 이전)


♠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용미리 마애2불입상(磨崖二佛立像, 석불입상) - 보물 93호

고양시 동부와 파주시 동부를 이어주는 용암사 고개, 지금은 2차선 도로(혜음로)가 흘러가고 있
지만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사람
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고개 동쪽이자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 용미리 마애2불입
상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깃들여진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彌勒佛), 쌍미륵
불 등으로 불려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렸다. 예전에 불광동서부터미널
에서 광탄까지 시외완행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석불 아래 정류장 이름도 '미륵불'이었다.
이 석불은 11세기 후반에 고려 선종(宣宗)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갔던 궁주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 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로
봐도 상관은 없다.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석불(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 대표격인
데, 그 석불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절과
속세에서는 그를 쌍미륵불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
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몸통
둘의 머리 둘로 봐도 무방하다.


▲  석불 앞에 마련된 기도처
중생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따스히 감싸 흐른다.


석불의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강한 특징이자 개성이
니 이에 대해 뭐라 중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
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 불상보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
는 석불이라 하겠다.


▲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의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상
들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기 마련인데, 그런 화려함 대신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아 무척 친근하게 다가온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과도 좀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
는 그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으며,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
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다. 그리고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 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가 약간 크
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은근히 웅장해 보인다.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
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짙은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여 중생들을 살펴보
는 모습이 꽤 훈훈해 보인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겨
져 있고 지방색이 짙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소망을 들어주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특히 아이가 없어 애태우거나 아이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을 잘 들어준다고 한다.

▲  측면에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  용미리 석불의 전경


※ 용미리 석불입상의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
에 도승 2명이 나타나 하소연했다.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
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상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왈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가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밑에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워 기도를 올리니 과
연 몇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이 태어났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의 소생으로 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
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장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원신궁주는 한산후 외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낳아 더욱 승승장
구하게 된다.

1094년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와 공모하여
한산후를 왕위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15대
숙종)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머나먼 곳으
로 추방당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잊혀
져 갔다.


▲  앞쪽만 멀뚱히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석불과는 이미 여러 번의 안면이 있다. 몇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만큼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해 있었다. 향
을 피워 그들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찾아와 '이러이러하니 제발좀 살
펴달라'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나는
과연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지
기도 한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는 산길이 나 있는데, 그들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
유산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 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 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용미리 마애2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2불입상)에서 내린다.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5호선 광화문역(6번 출구), 1/2호선 시청역(8번 출구), 1/4
  호선 서울역(3,9-1번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 3호선 녹
  번역(1번 출구),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3호선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도 → 고
   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
   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좌회전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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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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