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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7월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악산 백석동

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
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8회 이상 발걸음을 한다. 그렇게 많이 찾았으면 진짜 질릴
만도 할텐데 그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어제 갔어도 오늘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이번 백사실 나들이는 공교롭게도 나들이의 1등 방해꾼, 비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좀 일찍 찾았는데, 이미 그 시간대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
이다. 다행히 우산은 가져왔으나 비가 따라붙으니 정말 귀찮기 그지 없다. 허나 다행히 비
는 약한 수준이었고 비 덕분에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오랜만에 고적한 백사골의 풍
경을 누리게 되었다. 이곳은 무려 50번 이상 발걸음을 하였지만 비가 오는 날에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이다.


♠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  피서의 성지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3m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거의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조
촐한 폭포로 하얀 피부의 반석(盤石)과 잘 어우러져 수려한 멋을 자아내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인
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그곳에 대한 기대감마저 크게 불러일으키게 한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은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 등
폭포가 많은 명산(名山)에 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폭
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임의로 지은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라고
한다. 허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그만 자신의 이름 마저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폭포를 품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
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근래 비가 많이 와서 비의 희롱에 단단히
노했는지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대단하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45도 각도를 이루는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밑에 있는 못으로 내려가 심호흡을 한 다음 정든
고향을 등지며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버림 받은 낙엽들이 계곡으로 떨어져 폭포를 타
고 밑으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대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매
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백사아랫폭포)

폭포 아랫 못 너머에 펼쳐진 백사골 하류 폭포는 거의 30도 경사가 진 바위를 타고 아주 숨가쁘
게 내려간다.
바위를 타고 경사를 이루며 흐르니 엄연히 폭포는 폭포다. 아직은 이름이 없어서 백사폭포(동령
폭포) 밑에 있다는 뜻에서 백사아랫폭포란 쉬운 이름을 살짝 지어주었다. 폭포의 길이는 100m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만 없었다면 정말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숨죽여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
큰한 작품, 백사골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개발의 난도질 때
문이다.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밀고들어올 줄 누가 생각을 했으랴? 

애시당초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한때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
亭)과 연계하여 서울 도심 제일의 경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이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개발의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뚝 멈추었지만 나중에 꼭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계곡 주변 집
들을 밀어버리고 옛 모습을 꼭 되찾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과 만나는 곳까
지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생각도, 자비도 없다. 그
칼질에 목이 떨어져 나간 서울의 자연 명소가 어디 한둘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며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
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
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
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아래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
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
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기운을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
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
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여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청정함을 자랑하는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
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은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쓴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
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
리트로 계곡에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 후반이나 겨울에
는 눈동자를 잘 굴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
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을 새
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
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
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
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
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
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지형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
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던 세검
정,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
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별서 돌담의 흔적

▲  백사골 중류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머물렀다는 기록이 발견되
어 그의 손때를 조금 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
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
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
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 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마저 고자가 되
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
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이 정도의 별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재력이 상
당한 양반이었을 것이다. 추사도 이곳을 거쳐갔으니 말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
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
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문화재청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
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
여 무명에서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과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
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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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

▲  백사골 산길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 햇빛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꿀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했던 옛 사람(주
로 지배층들)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 고적한 분위
기는 좀 떨어졌다.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남
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행위가 늘어나면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근래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괜
히 어설프게 나서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건너편 길가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은 경사
   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
   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홍제천에 걸린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 이정표를 따
   라 '세검정로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1,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
   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
   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산모퉁이와 G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백
   석동2길)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을 추천
   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
  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
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
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어쨌든 돌계단을 오르면 주춧돌만 앙상하
게 남은 사랑채터가 나온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으나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
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인
이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
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잡초와
약간의 고인 물이 그런데로 연못티를 낸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과 주춧돌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
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생매장을 당했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
서 갈아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
후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다시 묻었으며,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
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인 석축이 여럿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사랑채 뒤쪽의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
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
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많은 돈을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을 불러 별서를 만들고 사대
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잔
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19세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처럼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과 양반
들의 수탈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서의 주인과 이곳을 매입했던 추사 김정희가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
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
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임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연꽃이나 물고기, 수초 대신 잡초와 잡석의 공간이 되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
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또한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자연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
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간만에 만수(滿水)의 기쁨을 누린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모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기고 싶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숲이 울창해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
들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숲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
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  연못터 옆에 자리한 돌다리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다리이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
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자라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
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이고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장대한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
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
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
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별서터에서 수습된 길쭉한 통돌로 조촐하게 이루어진 쉼터
이곳에서 수습된 돌로 대충 의자와 탁자를 흉내냈는데, 그 모습이 참 수수하고
정겹기만 하다. 잠시 앉아 행동식을 먹기에도 별로 불편함이 없다.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계단식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봐글
봐글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
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푸른 잎을 지닌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
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이곳 이름인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자 했던 옛 사람들(선비와 지배층들)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와 그 기념으로 저렇게 낙서
를 남기곤 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여름에 잠긴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지만 푸르게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잘생긴 바위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골 상류가 나
온다. 하얀 피부의 넓은 반석부터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
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
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우리가 잠시 머물며 속세에 찌든 발을 정화시키던 백사골 상류
30분 정도 머물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정말 오랜만에 흙으로
계곡에 토목공사(?)도 해보았지. 어린 시절 흙장난 정말 재밌었는데
다시 해보니 역시 재밌다.

▲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흐르는 백사골 냇물의 패기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
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
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다.
사람 많고, 수레 많고, 빌딩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
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인
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다니?? 그곳은 바로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
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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