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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의 소금강, 순창 강천산(剛泉山) '

강천산

▲  구름다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천산

천우폭포 숲길 구장군폭포

▲  천우폭포 숲길

▲  구장군폭포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8월 한복판에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격하게 찬양
받는 순창 강천산을 찾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7시에 떠나는 전주(全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 호남의 오
랜 중심지인 전주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순창(淳昌)으로 가는 직행버스
로 다시 1시간을 내달려 고추장의 고장인 순창에 이른다.

순창에서 11시 반에 강천산(강천사)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리니 시간이 다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이거 무단 결행이 아닌가 걱정이 들던 찰라, 버스는 딱 시간에 맞추어 슬그머
니 타는 곳으로 들어와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10분을 11시 40분에 강천산 종점에
도착했다.


♠  강천산(剛泉山) 들어서기

▲  강천산 관광안내소 내부의 강천산 모형도

순창읍에서 강천산으로 가는 중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비가 조금씩 창밖에 한줄기 낙서를 휘
갈기고 있었다. 그날 기상청 날씨예보에서는 비가 온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하늘이 그걸 비웃듯
선전포고도 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비에 대항할 장비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거 어찌해야 되나 난감해 하던 중, 버스는 강천산 종점에 도착해 바퀴를 접었다.

비는 그렇게 많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우산이 필요할 정도로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
선 제2주차장 부근에 있는 강천산 관광안내소로 피신해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관광안내소에는 강천산을 축소한 모형도를 비롯해 순창군 관광안내도와 관광정보, 고추장과 여
러 특산품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순창의 제일 명소인 강천산(583,7m)은 순창 서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무성
하며, 폭포와 잘생긴 바위가 많아 호남의 소금강으로 일컬어진다. 1981년 1월 7일 이 땅에서 최
초로 군립공원(군청에서 지정한 공원)으로 지정된 현장이기도 하며, 강천산(왕자봉)을 비롯하여
광덕산(565m), 산성산(연대봉, 603m) 등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담양 금성산성
과 이어져 있다.
강천산의 주요 명소로는 강천사와 삼인대, 병풍바위, 구장군폭포, 약수폭포, 천우폭포, 구름다
리, 용소 등이 있으며, 내장산, 백암산(白巖山)과 함께 가을 단풍명소로 이름 높다. 관광객 상
당수는 걷기에 별 부담이 없는 강천산계곡길을 이용해 구장군폭포나 구름다리까지 다녀오며, 넉
넉잡아 3시간 정도 걸린다.

관광안내소에서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약간의 기대를 품으며 바깥에 나가보았다. 허나 전혀 나
아진 것은 없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고 하니 우선 점심밥을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관광안내소 서쪽에 펼쳐진 상가촌에는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기념품점, 민박집이 즐
비하다. 어느 식당이 좋을까 재고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마땅한 호객행위는 없었고, 다만 완
도식당 1곳만 방황하는 나를 향해 적극적으로 호객을 한다. 그 식당 주인할매가 먹고 가라고 자
꾸 손짓을 하니 마지못해 그곳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다른 식당도 비슷했다. 내가 추천 메뉴를 물으
니 주인할매는 산채비빔밥을 권했다. 산에 왔으니 산채 나물이 들어간 비빔밥이 제일 무난하겠
지. 혼자 먹기에도 별 부담이 없고, 음식 메뉴 가운데 가격도 제일 낮으니 말이다. 허나 그 가
격은 무려 7,000원... 그래서 그걸 달라고 주문을 하니 10분 뒤에 잘 차려진 산채비빔밥과 갖은
반찬들이 내 앞에 펼쳐진다.


▲  완도식당에서 먹은 산채비빔밥의 위엄

여러 산채나물이 버무러진 산채비빔밥을 중심으로 6가지의 정갈한 반찬과 된장국이 나왔다. 반
찬도 죄다 풀이며, 된장국에는 감자와 두부, 파만 들어있다. 주인할머니는 더 먹으라며 공기밥
1그릇을 살짝 건넨다.
시장기가 폭발하여 비빔밥과 반찬, 된장국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빗방울도 조금은 줄어들어 그대로 강천산으로 밀고 들어갔다.


▲  강천산계곡 (공원관리소 직전)

가촌과 제1주차장을 지나니 반갑지 않은 존재가 나그네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바
로 입장료를 징수하는 공원관리소 매표소이다. 처음에는 1,000원 내외로 생각했는데, 확인해 보
니 무려 3,000원.. 학생과 군인은 2,000원씩이나 한다. 강천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郡
立公園, 1981년에 지정됨)이긴 하나 군립공원의 입장료 치고는 너무 비싼 감이 든다. 허나 입장
료를 깎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어 3,000원의 거금을 내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은 지리산(智異山), 최초의 도립공원은 금오산(金烏山)임>


▲  병풍바위와 병풍폭포 (왼쪽이 중심 폭포임)
비록 두 폭포의 물줄기와 높이는 현저히 다르지만 나란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다.


공원관리소에서 씁쓸한 마음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풍경 하나가 나의 두 발을 묶는
다. 바로 병풍바위와 병풍폭포이다.
병풍바위는 그 바위 밑을 지나는 그 어떤 사람도 깨끗해진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는 강천
사에서 지어낸 말인 듯 싶다. 강천사를 목전에 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세(俗世)의 번
뇌를 벗어던지고 들어와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 병풍바위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병풍폭포라고 한다. 폭포는
2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의 커다란 폭포가 중심폭포로 높이 40m, 물폭은 15m이다. 1분당
쏟아지는 낙수량은 5톤이라고 한다. 그 동쪽에는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
물폭 5m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면 자연산 같지만 아쉽게도 인공폭포로 2003년에 지어졌다, 그렇
다고 바위까지 인공은 아니며, 그냥 물줄기만 낸 것이다. 서쪽 폭포의 물줄기를 자세히 보면 자
연산 폭포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폭포와 바위의 위엄, 멋드러진 풍경 앞에 앞서의 아쉬운 마음은 싹 가시
고 말았다. 구장군폭포 만큼은 아니지만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약간의 더운 기운도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친다.

강천산은 폭포의 성지(聖地) 답게 폭포가 무지 많다. 병풍폭포를 시작으로 천우폭포, 약수폭포,
용머리폭포, 구장군폭포, 비룡폭포 등이 마치 꽃잎이 여기저기 날아가 앉은 듯 경승을 한층 돋
구고 있으며, 이중 구장군폭포가 단연 으뜸이다.

참고로 병풍폭포에서 산림욕장 데크산책로가 시작된다. 계곡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산자락 숲
길로 계곡길과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전망대와 황우제골, 팔각정을 거쳐 구름다리 남쪽까
지 이어진다. 또한 강천산계곡길은 웰빙산책로로 삼아 공원관리소에서 구장군폭포까지 마음 편
히 맨발로 걸을 수 있게끔 흙길을 잘 다졌다.


▲  강천산계곡 (병풍바위와 용소 사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계곡물이 경쾌하게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  녹색의 진한 물결 강천산계곡 탐방로

▲  계곡에 뿌리를 내린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의 조촐한 소망이 깃들여진 돌탑들이 계곡 물결 위에 뿌리를 내렸다.
겉으로 보면 물결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겉보기와 달리 견고하여
거의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돌탑을 쌓은 이들의 소망이 굳게 이루어진 것일까?

▲  길가에서 만난 작은 폭포
가파른 바위에 한줄기 길을 내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
속세에서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  무명의 폭포를 지나고 ~ 신록이 가득한 산길
저 풍경을 집으로 고이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그냥 여기서 실컷 누리고 가야 된다.

▲  현대사의 쓰라린 현장 회문산지구 전적비

원앙사육장 동쪽에는 회문산지구전적비가 초라하게 자리를 지킨다. 이 비석은 1954년 회문산에
머물던 북한군의 잔당, 빨치산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전적비로 현대사의 가슴 쓰린 현장이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 잔당 1만 명은 지리산을 비롯해 험준한
산에 들어가 항쟁을 벌였다. 특히 지리산 일대에 머물던 빨치산이 지독하여 1953년 7월 휴전 이
후에도 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계속되었으며, 1956년 7월 비로소 토벌이 마무리 되었다.
그 기나긴 시간 지리산과 빨치산 은거지 주변에 살던 많은 양민들이 원통한 넋이 되었으며, 거
창 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학살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들 가운데 빨치산
에 적극 가담하고 도운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협박에 못이겨 국군과 빨치산 양쪽의 눈치를 보
던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전적비가 다소 외진 곳에 있어 지나치기가 쉽다. 상쾌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만나는 씁쓸한 현장
이긴 하지만 우리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되는 그러나 다시는 재방송되서는 안되는 이 땅의 역
사이다.


♠  강천산 천우폭포(天雨瀑布)

병풍바위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송음암이란 기암절벽이 나온다. 그 울퉁불퉁한 피부에 물줄기
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천우폭포라고 부른다.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이지만 병
풍폭포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하늘에서 비가 오면 자연히 폭포가 이루어
진다는 뜻에서 천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폭포 앞에는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어어 숲길이 짧게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폭포
와 계곡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의 극치를 진하게 우려내니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나 역시 이곳 풍경에 제대로 퐁당퐁당 빠져버렸다.
나무 그늘에는 폭포를 구경할 수 있도록 벤치가 여러 개 베풀어져 있으며, 강천산 명소 가운데
구장군폭포와 더불어 단연 으뜸으로 치고 싶은 곳이다.

  천우폭포 앞 메타세콰이어 숲길

여름이 이쁘게 채색을 들인 아름다운 메타세콰
이어 숲길, 늘씬한 자태로 쭉쭉 솟아나 하늘을
가린 숲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다시금 들었다가
놓는다.
나무가 불어준 산내음에 속세의 번뇌를 저만치
날려 보내며 계속 길을 재촉한다. 허나 번뇌가
너무 무거워 인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천우폭포 앞 녹음이 깃든 숲길
자연과 여름이 앞다투어 깃들여진 탓인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푸른 물감이 첨가된 듯한 용소(龍沼, 아랫용소)

강천산에는 용소라 불리는 담(潭)이 2개가 있는데, 여기는 아랫용소이다. 구름다리 부근에 있는
윗용소에는 숫용이, 이 용소에는 암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서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다.
물이 워낙 청정하여 밑바닥이 거의 다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수심이 깊어 옛날 사람들이 수심
을 재고자 명주실을 내리니 딱 한 타래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만큼 깊다. 괜히 안전 장비 없이
푸른 색의 유혹되어 무책임하게 풍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  강천사의 일주문(一柱門)인 강천문(剛泉門)

용소를 조금 지나면 강천문이라 불리는 맞배지붕 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강천사의 일주문
으로 다른 절의 일주문보다 규모가 좀 있으며, 절의 이름 대신 강천문이라 쓰인 현판을 내걸었
다. 즉 강천사의 일주문이란 뜻이다.


♠  강천산 품에 포근히 안긴 작은 고찰 ~ 강천사(剛泉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수해(樹海)에 가려 보이지 않던 강천사의 조촐한 산문이 조금씩 모습을 비추
기 시작한다. 2층짜리 누각을 비롯하여 현대식으로 지어진 해우소(解憂所)와 세심당, 염화실 등
이 차례대로 나타나며, 그 다음에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이 이곳의 오랜 보물인 5층석탑과 나란
히 나타난다.

강천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강천사는 강천산 유일의 절집으로 887년 도선국사(道詵
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나 근거는 없다. 1316년 덕현(德賢)이 중창하면서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하
며, 강천산이란 이름은 이 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482년 신말주(申末舟, 1439~?)의 부인 설씨가 '강천사모연문(募緣文)'을 작성했는데, 바로 그
해 설씨 부인의 지원으로 중창되었다고 한다. 신말주는 세조 때 공신(功臣)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으로 1470년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고 하며, 모연문에 따르면 옛날에 신령(信靈)이 광덕산
가운데서 명승지를 골라 그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지낸 것에서 강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계곡처럼 흘러 절이 폐허의 지경에 이르자 중조(中照)가 서원을 내어 시주를 모아
중창했는데, 부근에 부도(浮屠)가 있으므로 절 이름을 임시로 부도암(浮屠庵)으로 갈았으며, 이
때 절은 비록 소소한 규모지만 청정한 수도처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허나 절이 다시 쇠락에 빠
지자, 증조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했다.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되어 1604년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했으며, 1760년(영조 36년)에 출판된 '
옥천군지'에는 당시 절의 부속암자로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 등 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나와있어 지금과 달리 왕년에 꽤나 잘나갔음을 보여준다.
1855년 금용(金容)이 중창했으며, 6.25전쟁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것을 김장엽 주지가 1959년
첨성각을 짓고, 1977년 관음전, 1978년 보광전을 새로 지었다.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
름을 갈았고,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과 염화실, 세심당 등 6~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5층석탑과 모과나무가 있다. 그외에 파괴된 석등과 석주의 일부가 대웅전 뜨락에 있으며,
용소 근처에 조선시대 부도 4기가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 산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병풍처럼 들어선 숲이 고요한 바다를 이루
고 있어 그야말로 금강산이 부럽지 않은 곳이다. 비록 옛날의 영화는 거진 다 사라지고 말았지
만 새소리와 솔바람, 산바람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하고 호젓한 산사로 심술쟁이 번뇌가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로, 산새도 넘어오다 날개가 마비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 있다.

강천사는 대웅전과 그 뜨락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고, 절이 조그
만하기 때문에 대웅전 뜨락에서도 계곡길과 나란히 한 담장 너머에서도 훤히 바라보인다.

▲  경내 동쪽에 새로 지은 2층 문루

▲  염화실과 세심당


▲  강천사 약수터

산사에 꼭 하나씩은 있는 약수터, 강천사도 예외는 아니다. 강천산이 베푼 청정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와 나그네의 목마름을 해소해준다. 빨간 바가지에 가득 담아 한 모금의 신세를
지니 몸 속에 낀 속세의 때가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뜨락에 놓인 아픈 상처들 (부도탑)

풀이 곱게 입혀지고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대웅전 뜨락에는 5층석탑과 근래에 심은
석등(石燈) 외에 석주와 6.25때 파괴되어 일부만 남은 부도와 석등 등이 초췌하게 자리를 지킨
다. 왼쪽은 조그만 부도탑으로 여겨지는데, 지붕돌과 상륜부(相輪部), 바닥돌과 탑신(塔身)의
일부만 간신히 남아있으며, 바닥돌 위에 잎이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남아 초라해진
자신을 위로한다.
그 동쪽에는 석주(石柱)로 보이는 기둥이 서로의 고된 몸을 기대고 있고, 그 곁에 맷돌처럼 보
이는 동그란 돌이 놓여져 있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대웅전과 대웅전 뜨락 (5층석탑)

강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에 지어졌다. 불
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산신탱, 칠성탱, 신중탱 등의 탱
화가 걸려있어 칠성각과 산신각 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강천사5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웅전 뜨락에는 보기에도 정말 안쓰러운 5층석탑이 보호철책에 둘러싸여 상처투성이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강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316년에 덕현
이 세웠다고 한다. 1중의 기단 위에 5층
의 탑신을 세웠는데, 1층과 2층, 3층 옥개석(屋蓋石)이 크게 깨져나갔고, 4층과 5층 탑신도 그
리 성하지가 못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자연의 괴롭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6.25 때문이다. 그 전쟁은 이 땅의 민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까지도 불구를 만든 것
이다.

탑신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에 높은 3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1층에 비해 2층 이상
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에서 신라 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부분적으로 백제 석탑 양식이 반영된 고
려 석탑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노반(露盤)이 사라진 채, 복발과 보륜(寶輪)이 남아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명문이 새겨진 괘불대가 3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乾隆八歲十五(건륭8세15
)'라고 되어 있어 1700년대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방(禪房)으로 쓰이는 심우당(尋牛堂)
대웅전 서쪽 높다란 곳에 터를 닦고 자리한 심
우당은 선방이다. 심우당이란 이름은 선종(禪宗)
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되었다.


▲  삼인대(三印臺)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7호

강천사 남쪽 계곡 너머에 삼인대 비석을 품은 1칸짜리 기와집이 있다. 계곡 건너에 자리한 탓에
그의 존재와 사연을 모르는 무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
가기 일쑤인데, 삼인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그의 아우인 중종이 익선관(翼善冠)
을 쓴 채 왕위에 올랐다.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반정파(反正派)들은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
愼守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그의 딸이자 중종의 왕비인 신씨<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
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게 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3명이 비밀리에 강천산에 모여 당시로써는 큰일 날 소리인 신씨의 복위(復
位)를 주장하며,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上疏)를 올리기로 결
의를 했다. 그때 그들이 관인을 걸고 맹세한 곳을 3개의 관인을 걸던 곳이라 하여 삼인대라 부
르게 되었다. 허나 그들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떨친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비어있는 국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744년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순창 선비들이 삼인대의 사연
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웠고, 대학자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碑文)을,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 1691∼1767)가 전서(篆書)를 썼다. 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으로 비석의 높이는 157cm, 너비 80cm, 두께 23cm이다.

삼인대는 1963년부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며, 1978년 삼인대 비석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여
옆에 검은 피부의 비석을 만들었다. 또한 1994년 지역 사람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결성
되어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  삼인대 절의탑(節義塔)
삼인대 3인방의 절의를 기리고자 근래에 쌓은 탑으로 탑 꼭대기에 하얀 돌을 심어
그 피부에 절의탑이라 새겼다.

▲  비각 안에 소중히 담긴 삼인대 비석

▲  '삼인대비'로 시작되는 비석의 좌측
글씨가 근래 새겨진 듯 매우 또렷하고 정정한 모습이다.

▲  강천사 모과나무 - 전북 지방기념물 97호

삼인대입구에는 강천사의 또 다른 오랜 보물인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
으로 높이 20m, 둘레 3.1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강천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관상용
으로 인기가 좋아 5월에 홍색 꽃을 피운다. 또한 9월에는 황색의 열매가 피어 속세에 모과를 제
공한다.

나무를 살피니 녹음(綠陰)에 젖은 잎파리만 보일 뿐, 열매는 어디 숨었는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
다. 나무 주변으로 붉은 백일홍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그의 주변을 화사하게 맴돈다.


♠  강천산 구름다리와 구장군폭포

▲  윗용소
이곳에는 숫용이 살았는데, 세상이 혼란해지면 아랫용소에 암용과 함께
서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


강천산의 중심 길이자 공원관리소부터 줄곧 하나의 길로 이어진 강천산계곡길이 윗용소에 이르
면 2갈래로 갈린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숲속데크산책로다 대나무숲길이다 해서 갈림길이 여럿 있
었지만 방향을 두고 그리 갈등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갈등이 생긴다. 이유는 여기서 용소를 건
너 직진하면 구장군폭포이고, 오른쪽 까마득한 계단길을 오르면 전망대와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데, 구장군폭포와 구름다리를 모두 보고 싶기 때문이다.

푸른 물감이 흐드러진 듯, 순수함을 자랑하는 윗용소는 강천사 밑의 용소와 구별하기 위해 그렇
게 부른다. 상류에서 내려온 물이 암반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용소를 이루며,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하고자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가 어느 정도 가늘어지자 먼저 구름다리로 가기로 했다. 구름다리와 전망대까지는 0.2km라고
하지만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급해 체감거리는 0.5km 정도 되는 듯 싶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그 언덕 정상부에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누각처럼 전망대가 보이고, 그 전망대로
오르니 천하일품의 조망(眺望)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 조망 앞에 조금 전의 고단함과 날씨에
대한 서운함이 싹 가셔버린다.


▲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 구름다리와 강천산계곡

구름다리 동쪽 전망대에 발을 딛으면 주황색이 칠해진 강천산의 명물 구름다리와 장군봉, 강천
산계곡 상류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첩첩산중이라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강천산계곡을 둘
러싼 여러 봉우리가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고, 녹음에 젖은 강천산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실감나게 둘러볼 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구름다리와 이어지고, 동쪽으로 가면 강천산계곡으로 이어진다.
허나 여기까지 왔으니 구름다리의 아찔함과 그 위엄을 체험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  강천산 구름다리

▲  구름다리를 건너다 - 남해대교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밑에서 올려다본 구름다리의 아찔함

강천산의 인공적 명물인 구름다리는 강천산계곡 상류 협곡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 75m, 높이 50
m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려 나그네의 염통을 제대로 오므라들게 만든다.
게다가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에 눈을 감게 만들어 다리를 건너지 않고 꼬랑지를 내리
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리의 길이가 75m라고 하나 실제 체감거리는 능히 100m를 넘는다. 짧은 거리를 믿고 다리를 건
너니 정말 그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다. 다리 바닥에는 4개의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데, 그 구멍을 통해 아래가 훤히 보인다. 밑을 보면 현기증이 날 것 같
으니 천상 눈은 다리 건너편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고 양쪽 난간을 잡아
걸음을 빨리 했다.
분명 건너편이 가까이에 보이는데도 쉽사리 와 닿지가 않는다. 75m가 이렇게 길었단 말인가..?
두려운 마음이 그 거리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 위에서 사진이라도 담았어야 했는데, 다리
의 아찔함에 그럴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건너 버렸다.

건너편으로 넘어가 내려가는 길을 찾았으나 지도를 잘못 봐서 올라가는 길만 있는 것으로 착각
했다. 여기서 700m 정도 오르면 신선봉(425m)이 나오는데, 나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게다
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어 산을 오를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다리를
다시 건너 동쪽으로 돌아왔다. 본의 아니게 다리를 왕복한 셈이다.

동쪽 전망대로 돌아와 동쪽으로 나 있는 내리막길을 거쳐 계곡으로 내려왔다. 계곡에는 비를 피
할 수 있는 조그만 쉼터가 있는데, 여기서 구름다리의 위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마치 구름 위
에 떠 있는 듯한 다리, 마침 용감한 나그네 1명이 다리에서 계곡 상류를 향해 사진을 찍고 있었
다. 그 광경을 보며 그저 다리를 건너는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조금은 씁쓸해진다.


▲  구장군폭포로 인도하는 오솔길

구름다리 밑에서 계곡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산수정이란 정자와 구장군폭포가 나온다.
이 구간은 앞서의 길과는 약간은 틀리다. 계곡을 3번 정도 건너야 되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다
리가 있었지만 이 구간은 다리와 함께 두 다리에 물을 묻히며 직접 계곡을 건너는 구간도 마련
되어 있다. 다리에 물을 묻히지 않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다리를 건너면 되고, 강천산계곡길의
특징인 맨발 산책이나 계곡물을 원하면 다리 옆에 마련된 길로 물살을 헤치며 건너면 된다. 직
접 건너는 구간은 통행에 별무리가 없도록 바닥을 잘 다졌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  구장군폭포 곁에 세워진 산수정(山水亭)
구장군폭포의 명쾌한 물줄기를 보며 쉴 수 있는 정자로 근래에 지어졌다.

▲  수직으로 가파른 벼랑에 물길을 낸 구장군폭포(九將軍瀑布)

강천산계곡 산책로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구장군폭포는 강천산의 얼굴이자 백미(白眉)이다. 강
천산에 왔다면 꼭 봐야 되는 경승지로 이곳을 눈에 넣지 않고는 강천산에 갔다고 우길 수 없다.
폭포 물줄기가 2개로 이루어져 있어(서쪽에 깎아지른 벼랑인 거북바위에도 여러 물줄기가 있음)
둘 다 구장군폭포로 생각하기 쉽지만 진품은 오른쪽 폭포이다. 왼쪽 폭포는 근래에 물줄기를 낸
인공폭포로 겉으로 보면 거의 자연산처럼 보인다.

구장군폭포는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르는 3단 폭포로 제일 윗부분은 수직으로 거의 70m 가까이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급하게 낙수(落水)한 물은 조금은 완만한 2단과 3단 부분을 거쳐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들 물이 옹기종기 모인 담을 용소라고 하며, 이곳에 모인 물은 청랭한 산
공기를 싣고 속세로 흘러간다.

폭포 맞은편에는 산수정과 여러 벤치를 두어 폭포를 구경하며 두 다리를 쉬도록 배려했고, 용소
앞에는 보다 가까이에서 폭포를 구경하도록 나무도 조망대를 만들었다. 폭포 부근에는 남근석과
사랑 관련 조각품들이 있는 공원, 강천제2호수, 수좌굴이란 자연굴이 있다. 강천제2호수는 강천
산계곡 상류에 만든 산중호수로 호수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강천제1호수는 강천산 입
구에 있는 강천호를 일컫는다.

구장군폭포에서 느긋한 산책로는 끝을 맺으나 그 길이 산길로 바뀌는 것일 뿐, 완전히 끝난 것
은 아니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가면 비룡폭포가 나오며, 연대암터를 지나면 금성산
성(金城山城, 사적 353호) 동문(東門)에 이른다.


▲  구장군폭포 용소

▲  구장군폭포 (오른쪽이 진품)

▲  구장군폭포 서쪽 벼랑 (거북바위)

구장군폭포는 말그대로 9명 장군의 폭포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때는 삼한(三韓)시대, 마한(馬韓) 장수 9명이 전쟁에서 패해 이곳으로 쫓겨왔다. 그들은 여기서
자결을 하여 치욕을 씻고자 했으나, 그중 1명이 '자살을 할 바에는 차라리 1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다들 힘을 얻어 다시 전장으로 나가 승리를 거뒀다고 하며, 그래서 구장
군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야 뭐 어쨌든 이 폭포는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마냥 위엄이 상당하며, 폭포와 그를 껴안은 거북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하여, 아무리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설치는 인간을 보기 좋게 주눅들게 만든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 설친
들, 대자연의 작품 앞에는 그저 조그만 개미에 불과하다.


▲  구장군폭포 부근에 마련된 공원과 돌탑

▲  실로 거대한 거북바위의 위엄

구장군폭포를 둘러보고 잠깐 쉬려고 자리를 물색했는데, 산수정과 공원 벤치들은 죄다 관광객들
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강천제2호수 밑으로 가서 의자에 벌러덩 누우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다리도 지치고 했으니
말이다. 잠까진 들지 않아 꿈나라까진 가지 않았지
만 강천산 자체가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이니 굳이 따로 꿈나라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강천산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가기 싫은 속세로 힘 없는 발걸
음을 옮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비룡폭포나 금성산성, 강천산 정상까지 흔쾌히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구장군폭포까지였다. 강천산을 찾는 사람들 상당수는 강천산에
중심 산길인 강천산계곡길을 따라 구장군폭포까지만 보고 다시 내려간다. 구름다리를 빼고는 경
사가 급하거나 힘든 구간이 없어 그냥 계곡만 졸졸 따라가면 되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강천산계곡길을 맨발산책로라 부르기도 한다.
내려갈 때는 신발을 벗고 강천사까지 맨발로 걸었는데, 발에 크게 위해가 되는 곳은 없다. 계곡
에 여러 차례 발을 담구며, 흙과 부드러운 스킨쉽을 즐기니 내려가는 길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강천산 상가촌으로 내려가니 마침 속세로 나가는 직행버스가 요란하게 심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서둘러 뛰어가 그 버스를 타고 순창읍
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호남의 호금강, 강천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강천산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순창행 고속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9:30~16:10)
* 광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10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전주에서 순창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이중 2회가 강천사까지 들어간다.
* 순창터미널에서 강천사(강천산)행 직행버스가 1일 10회, 군내버스는 10여 회 다닌다. 직행버
  스는 강천산 상가촌(관광버스주차장)까지 들어가나 군내버스는 강천산입구만 스쳐 지나가며,
  강천산입구에서 강천산 상가촌까지 도보 10분 거리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 → 전주시내 우회도로와 27번 국도 경유 → 순창고교 교차로에
   서 우회전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순창나들목 → 순창읍 → 팔덕 → 강천산입구 → 강천산

★ 강천산 관람정보 (2015년 8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3,000원 / 초,중,고생 2,000원 / 군인,전의경 1,500원 (30명 이상 단체는 500
  원 할인)
* 강천산 주요 등산코스 (여기서 매표소는 강천산 관리사무소 매표소)
① 신선봉 코스(5km, 3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신선봉 → 강천사 → 매표소
② 산성산 코스(9.2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운대봉 → 산성산 → 송낙
바위 → 강천사 → 매표소
③ 광덕산 코스(11.2km, 5시간) : 매표소 → 금강계곡 → 황우제골 → 광덕산 → 시루봉 → 금
성산성 동문 → 강천사 → 매표소
④ 강천산 코스(5.2km, 3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갈우봉 → 강천산(왕자봉) → 강천사 →
매표소
⑤ 옥호봉 코스(8.7km, 4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장군폭포 → 장군봉 → 광덕산 → 금강
계곡 → 옥호봉 → 매표소
⑥ 종주 코스(12km, 7시간) : 매표소 → 깃대봉 → 강천산(왕자봉) → 형제봉 → 송낙바위 →
금성산성 동문 → 광덕산 → 옥호봉 → 매표소
⑦ 강천산계곡(맨발산책로, 5km, 2시간) : 매표소 → 강천사 → 구름다리 → 구장군폭포 → 강
천사 → 강천산매표소
* 강천산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 관리사무소 ☎ 063-650-1672)
* 강천사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996 (☎ 063-652-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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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8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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