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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견(義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 '
오수 의견비
▲  오수 사람들의 자랑, 오수 의견비


 

울 제국이 한참 위세를 부리며 천하를 핍박하던 1월 한복판에 전북 중심부에 자리한 전주
(全州)와 임실(任實)을 찾았다.

전라도의 오랜 중심지인 전주에서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오후에 임실 땅으로 넘어가 의견의
고장인 오수를 찾았다.
임실군에 속한 오수는 임실읍과 남원시(南原市) 사이에 둥지를 튼 고을로 17번 국도와 전라
선(全羅線) 열차가 고을 한복판을 관통해 교통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오수에는 이곳의 자랑인 의견비가 있으며, 오수지구대 앞에는 오래된 망루가 있다. 또한 오
수 시내 서쪽을 흐르는 오수천(獒樹川) 서쪽 너머에는 오수리석불과 해월암 등의 이름 없는
명소가 숨겨져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다. 의견비를 중심으로 2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오수에
서린 4곳의 명소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주인을 구하고 숨진 의로운 견공(犬公)의 넋이 서린
오수 의견비(義犬碑) - 전북 지방민속문화재자료 1호

오수터미널에서 남쪽으로 4분 정도 뚜벅거리면 왜정 때 지어진 오수망루가 나온다. 망루 부근에
의견비를 알리는 커다란 갈색 이정표가 있는데, 그의 안내를 받아 오른쪽 골목(오수3길)을 들어
서면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圓東山公園)이 모습을 비춘다.

의견비는 자신을 기르던 주인을 구하고 숨진 개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주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개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땅에는 오수 외
에도 밀양(密陽)과 구미(龜尾, ☞ 관련글 보러가기) 등 많은 지역에서 전해오고 있으며 다른 나
라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아 인간들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쓰나미를 선사한다.
개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기도 한다. 오수 의견비는 그런 의견을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
운 비석으로 이 땅에 전해오는 의견 관련 유적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의 의견 설화의 대표격인 오수 의견 설화는 고려 무신정권 때 활약했던 최자(滋, 1188~
1260
)의 보한집(補閑集)과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소상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견 설화는 등장 인물의 이름과 장소만 다를 뿐, 줄거리
는 비슷하다.

때는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 거령현(居寧縣, 임실군 지사면)에 김개인(金盖仁)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애지중지 기르던 개가 있었는데 어딜 가든 항상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개인은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집으로 오다가 그만 길가에 퍽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마침 부근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산불은 삽시간에 그가 벌러덩 자는 곳까지 번져왔는
데, 개는 어떻게든 주인을 깨우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그는 꿈나라에 깊숙히 들어가 좀처럼 깨어
나지를 못했다. 하여 개는 가까운 냇가로 달려가 몸에 물을 적시고 불에 뿌리는 형식으로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화마(火魔)로부터 주인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닌
것이다.

개는 간신히 불을 진압하여 주인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나 너무 체력을 소비한 나머지 쓰러져 결
국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간신히 꿈나라에서 나온 주인은 자기 옆에
쓰러져 있던 개를 보고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고, 그런 개를 껴안으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그는 노래를 지어 개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친히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옆에 자신의 지
팡이를 꽂았다. 그런데 지팡이에 그 개의 혼이라도 깃들여져 있는지 그것이 나무가 되어 무럭무
럭 자라나니 이 나무를 큰 개를 상징하는 오(獒)를 붙여 '오수(獒樹)'라 하였고, 그것이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

그 이후, 오수 사람들은 의견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워 이를 동네의 긍지로 삼으니 지금도 그 자
랑은 여전하다. 비석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마멸된 것을 1955년 4월 8일에
지금의 비석으로 새로 갈았으며, 비석에 비각을 씌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원동산공원을 닦았다.


▲  의견상과 나이 5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 (임실군 보호수 9-11-3호)
의견상에 늘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는 느티나무로 높이가 무려 18m에 이른다.
허나 혹독한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벌거숭이의 몸으로
제국의 시련을 견딘다.

▲  글씨의 폼이 예사롭지 않은 원동산공원 정문

의견비를 품은 원동산공원은 조그만 공원으로 오수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이다. 정문을 들어서
면 정면으로 의견비를 간직한 비각이 보인다. 그 비각까지는 돌이 박힌 돌길이 펼쳐져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나무들이 공원을 아름답게 수식한다.

비각에 들어있는 의견비는 1955년에 새로 만든 것으로 비각 좌측에는 나이 500년의 오랜 느티나
무가 의견비와 의견상의 우산/양산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공원에 있는 나무 중, 제일 오래된
것으로 어쩌면 의견의 주인이 심은 나무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주인의 혼이라도 서린 듯,
언제나 비석과 의견상을 지켜주는 느티나무로 서로를 보듬은 정겨운 풍경이다.

의견비 동북쪽에는 의견의 형상이 마치 위대한 인물의 동상처럼 세워져 있는데, 예전에 왔을 때
는 그의 목에 꽃목걸이가 걸려져 있었다. 허나 지금은 겨울이라서 목걸이는 없는 상태, 이처럼
오수는 의견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를 소재로 한 보신탕으로도 유명하여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의견비와 동상을 만들어 의견을 기리지만 다른
쪽에서는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여먹는 것이다.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미묘한 현장이기도
하지만 의견은 어디까지나 의견이고 보신탕은 어디까지나 보신탕일 뿐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
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비난은 없었으면 한다.

▲  공원 구석에 있는 비석군(碑石群)

▲  오수고적기실비(獒樹古蹟記實碑, 오른쪽)
, 오수의견비 문화재 표석(왼쪽)


▲  의견비각(義犬碑閣)에 담긴 의견비

▲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의견상

의견을 기리는 비석이나 무덤은 있어도 동상까지 갖춘 곳은 천하에서 오수가 거의 유일할 것이
다. 그만큼 동네 사람들의 긍지와 사랑이 대단한 것이다. 물론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개
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을 과연 어찌 생각하고 있을까?


※ 오수 의견비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오수역 하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수 경유 남원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전주, 남원에서 오수 방면 직행버스 이용 (1시간에 3~5회 운행)
* 오수터미널을 나와서 오수시장 방면 남쪽으로 4분 정도 걸으면 의견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
  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1분 들어가면 의견비가 있는 원동산공원이다.
* 오수역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도보 2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주변 길가에 하면 됨)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오수나들목을 나와서 오수, 남원 방면 → 남악교차로에서 우회전 → 오
   수 시내, 오수 지구대에서 좌회전 → 하나로마트에서 바로 우회전 → 오수 의견비
*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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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 지역 명소 둘러보기

▲  임실 오수망루(獒樹望樓) - 등록문화재 188호

수 시내 한복판인 오수지구대(치안센터) 앞에는 고색의 때가 흠뻑 묻어난 붉은 피부의 돌탑이
있다. 그가 바로 이곳을 지키던 오수망루이다.

오수망루는 왜정(倭政) 말기인 194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는
12m, 하부 지름이 2.4m로 이 땅에 남아있는 망루 가운데 가장 높다. 그의 역할은 마을을 지키며
통제하고 비상 상황 또는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축조 방식은 벽돌을 원통형으로 쌓아 꼭대기에 6각형의 망대(望臺)를 두었으며, 6각의 각 면에
는 구멍을 내어 사방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망대에는 사이렌을 울리던 스피커 2개가 남아 있
으며, 망루 내부에는 지름 65cm로 벽을 따라 철제 계단이 놓여 있고, 망루 1층에는 작은 문이
있다.

2005년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현재는 망루 내부롤 들어갈 수 없다. 얼핏
보면 공장의 굴뚝이나 교도소의 망루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왜정부터 근래까지 오수 고을을 지
키고 통제하던 존재로 역사성과 건축학적 가치까지 지녔으며, 망루가 걸친 벽돌마다 70년 세월
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선사한다. 문화재 지정명칭은 '임실오수망루'이나 '오수망루'로 불
러도 무관하다.
* 오수망루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48-6


▲  오수리 석불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6호

오수의견비를 둘러보고 공원 정문에서 왼쪽으로 2분 정도 가면 오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오
수천(獒樹川) 둑방길이 나온다. 둑방길에서 오른쪽(북쪽)으로 2분 가면 하천 위에 걸린 월교란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길은 좌우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해월암로 이
어지고, 왼쪽으로 가면 바로 관월마을인데, 그 마을로 들어서 산이 있는 서쪽으로 계속 비집고
들어가면 산림과 접한 마을 서쪽 끝으머리에 '도석사'란 조그만 절과 뾰족하게 솟은 석불이 손
짓한다. 그가 바로 관월마을의 수호신 오수리 석불이다.


▲  멀리서 본 오수리 석불

동쪽으로 관월마을과 오수 시내를 굽어보며 서 있는 오수리석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미륵불(彌勒佛)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불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지 못하며, 다만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전설이 한 토막 아련하게 전해온다.

대략 300년 전 마을 아낙네가 마을 뒷산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저것좀 보소!!'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바위는 뻘쭘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섰는
데, 그 바위가 바로 오수리 석불이라는 것이다. 그 전설을 통해 아마도 산사태나 홍수로 떠밀려
왔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 불상 주변에는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없으므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던 듯 싶다. (근처 해월암에서 넘어 왔을 가능성도 있음)
하지만 불상이 입을 굳게 봉하며 비밀을 말해주려 하질 않으니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어
쨌든 산에서 내려온 석불을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정성껏 모셨는데, 만약 그가 마을 앞
까지 내려왔다면 마을이 더욱 번창하고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오수리 석불은 하나의 돌로 된 불상으로 아랫 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어 맨땅 위에 서 있다. 석불
의 높이는 3.5m로 대체로 완만한 타원형이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해 보인다. 눈은 지그시 떠 있
고, 코는 볼록하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미소는 보이지 않고 볼에는 살이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고, 두 귀는 중생의 작은 소리하나 놓치
지 않으려는 듯 어깨까지 크게 늘어져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두 손은 옷 안에 들어있으며, 볼록하게 표현된 소매
자락은 법의와 함께 밑으로 내려져 있다. 얼굴과 몸 뒤쪽에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등의 광
배(光背)가 새겨져 있는데, 화염무늬가 세심하게 수놓여 있다.


오늘도 묵묵히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의 가호 덕분인지 관월마을과 오수는 그다지 큰 사
고는 없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불상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정정한 모
습으로 마을 사람들의 친근한 벗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그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석불 옆에는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현대 사찰 도석사가 자리해 있다.
* 오수리석불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1


▲  해월암(海月庵)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4호
해월암에서 가장 연세가 지긋한 건물로 대웅전과 달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 좌측칸에는 해월암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귀뜀해준다.
 

수에서 관월교를 건너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앞에서 언급한 오수리석불이 있는 관월
마을이고, 오른쪽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산길의 끝에 조그만 암자 해월암이 어미 품에 안
긴 알처럼 포근히 터를 닦았다.

오수 시내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해월암은 고려 후기인 1352년(공민왕 1년)에 해경(海
境)과 월산(月山) 두 승려가 창건했다고 하며, 1396년(조선 태조 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절의 이름인 해월은 해경과 월산의 이름 첫 자를 딴 것
이라고 한다.

창건 이후 1556년(명종 11년)에 남원부사(南原府使)가 중건했다고 하며, 1747년에 중수가 있었
다. 1858년(철종 9년)에도 중건이 있었고, 1915년 봉인(奉仁)이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면서 절을
손질하였다. 1990년 주지 정현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  해월암 가는 길목에 자리한 청기와 누각
오수 사람들의 납량 피서지로 이곳에 오르면 조그만 오수 시내가 두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처럼 조그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오래된 요사, 그리고 본
연당(本然堂)이라 불리는 새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다. 이중 대웅전 뒤에 자리한 옛 요사가
해월암의 유일한 옛 흔적으로 그가 '해월암'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옛 요사는 부엌을 갖춘 방 3개짜리 기와집으로 불전(佛殿)이라기 보다는 양
반가의 기와집이나 별당(別堂), 경치가 좋은 곳에 짓는 조그만 기와집 비슷한 모습이다.

옛 요사를 가리고 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556년에 처음 지어졌다
고 한다. 1915년에 중수하고 1990년에 새로 지었는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협시한 목조(木彫) 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은 1352년 창건 당시의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불상이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수려하기 그지
없으며, 건물 내외부에 그려진 단청은 절의 왜소함을 능히 덮을 정도로 화려하다.
또한 1915년에 쓰여진 '해월암중수기'와 '제해월암(題海月庵)' 현판이 있는데, 제해월암은 해월
암에 대한 시문(詩文)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 1쌍이 서 있으며, 그 좌측에 새 요사인 본연당
이 방금 지어진 산듯한 모습으로 승려와 신도의 숙식을 책임진다.

▲  하얀 눈기와를 지닌 해월암 대웅전

▲  해월암 본연당

대웅전을 기준으로 우측 높은 곳에 산신각이 경내를 굽어본다. 산신각(山神閣)은 정면 1칸, 측
면 1칸의 조촐한 크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산신(山神)을 비롯하여 칠성탱(七星幀)을 머금고 있다.

해월암은 오수 지역의 유일한 옛 절로 나무가 무성하여 산속 깊숙히 들어온 기분이다. 속세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고, 속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는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윽한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적막에 잠긴 절에 지나가던 산바람이 졸고 있던 대웅전
추녀의 풍경물고기를 깨워 겨울잠에 든 절을 살포시 깨운다.
답사객의 발길이 거의 없는 탓인지 본연당에서 나온 승려가 약간 경계를 품으며 무슨 용건으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답을 주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고치고서는 잘 구경하라며 안으로 들어
간다. 경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웅전 앞 뜨락은 겨울 제국이 보낸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
고, 날씨가 조금은 풀린 탓에 눈들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철수하고 있었다.

▲  경내를 굽어보는 칠성각

▲  산신각에서 바라본 해월암 경내


▲  해월암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해월암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 겨울 제국의 쫓겨 햇님도 서둘러 퇴근을 재촉하고 어두
운 기운은 다시 세상을 훔치려 든다. 이리하여 의견의 고장 임실 오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
표를 찍는다.

* 해월암 소재지 -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715 (☎ 063-642-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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