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에서 삼불봉 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삼불봉 밑에 평탄한 장소
가 나온다. 그곳에 계룡산의 명물인 남매탑 2기가 서로를 보듬으며 속세를 굽어본다. 탑이 있던
자리는 동학사의 전신(前身)으로 전해지는 청량사(淸凉寺)의 옛터로 고려 때까지 이곳에 둥지를
트고 있다가 조선 초기에 지금의 자리로 내려와 동학사로 이름을 갈았다.
남매탑은 각각 5층과 7층석탑으로 정식 명칭은 절터의 이름을 따서 청량사지5층석탑, 청량사지7
층석탑이다. 청량사 시절의 유물로 이들이 남매탑이라 불리게 된 믿거나 말거나 사연은 다음과
같다.
동학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회의화상(懷義和尙)의 스승 상원조사(上願祖師)가 큰 돌을 허리에
이고 계룡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호랑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야 힘들지. 내가 흔쾌
히 도와줄께!' 뒤에서 돌을 받쳐주어 쉽게 돌을 운반했다. 상원은 그 돌로 남매탑 자리에 조촐
하게 초암(草庵)을 짓고 불도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호랑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상원이 '어인 일로 왔냐?' 그러니 호랑이
가 '밥을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렸어!' 하면서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원은 뼈를 제거
해주고 '앞으로 사람을 해치지 마라!!' 따끈한 잔소리를 던지니 호랑이가 '우리도 요즘 먹고 살
기가 힘들다보니 음식을 가릴 여유가 없어. 하지만 앞으로 흔쾌히 주의할께~~!!' 고맙다며 고
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얼마 뒤 호랑이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 1명을 물어와 그의 초암 앞에 던
져놓고 '상원아 나와봐라~ 좋은거 가져왔어' 그러면서 사라졌다. 그가 혼자 사는 것을 눈치채고
여인과 짝을 지어 잘살라는 뜻에서 그런 기특한 짓을 한 모양이다. 허나 상원은 이미 출가한 승
려이다. 호랑이는 그 점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때 여인은 의식을 제대로 잃은 상태였
으므로 상원은 좋든 싫든 그 여인을 수습하여 간호를 해주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신분을 확인했는데, 경상도 상주(尙州) 지역에 이름있는 집안인 김화공(金化公
)의 딸이었다. 그가 어찌 계룡산 호랑이에게 납치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어
쨌든 호랑이가 물건은 제대로 가져온 셈이다.
상원의 간호를 받고 쾌차한 여인은 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상원 역시 마찬가지였
다. 딸을 애타게 찾던 김화공 내외는 상원에게 혼인을 제안했고, 여인 역시 이를 원하며 상원의
마음을 들쑤셨다. 마음의 공황에 빠져 방황하던 상원은 공황에 빠진 자신을 원망하며 결국 혼인
을 거절했다.
여인은 눈물로 다시 혼인을 청했으나 상원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상원도 그러곤 싶겠지만
이미 승려가 된 몸이고 그동안 쌓은 불도도 아깝고 하니 자기 자신도 무척 애간장이 탔을 것이
다. 그래도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들인지라 인연을 차마 저버리지는 못하겠고 대신 의남
매(義男妹)가 되어 같이 불도를 닦자고 제안을 했다. 비록 혼인은 아니지만 남매가 되어 서로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남매가 되어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채찍질도 해가며 불도에 더욱 정진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세상을 뜨자 (누가 먼저 죽었는지는 모름~~) 상원의 열성제자인 회의화상은
여인의 부친인 김화공의 지원을 받아 탑을 세워 그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한다. 허나 이들
탑의 조성시기는 공교롭게도 신라 후기가 아닌 고려 중기라 전설의 신빙성을 보기 좋게 떨어뜨
린다. 아마도 회의화상의 스승 상원조사에 관한 한 토막 전설이 청량사에 전해져 온 것을 나중
에 동학사에서 탑과 연관을 지어 재구성한 듯 싶다. 전설에 나오는 호랑이가 날라다 준 여인은
상원조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거나 청량사에 시주를 많이 한 여인을 모델로 한 듯 싶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전설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주 희방사(喜方寺)와 통영 도솔암(兜
率庵)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온다. 결말만 다를 뿐, 시작과 과정은 같다. 호랑이가 나타나 목
구멍에 걸린 가시를 빼달라고 청했고, 이를 빼주자 아름다운 여인을 납치하여 그에게 건넨다.
그런데 여인들은 모두 귀족이나 유력 집안의 딸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여인의 부친이 감사의 뜻
을 표하고 자신의 딸과 혼인해줄 것을 부탁하나 승려는 모두 거절한다. 남매탑에서는 승려와 여
인이 의남매가 되었지만 희방사와 도솔암은 여인의 집안에서 절을 지어주는 선에서 끝낸다.
허나 이들 전설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을 통해 상주 지역 김화공이라는 유
력집안에게 지원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정말로 혼사 이야기도 있었을지도 모름) 그
리고 전설에 호랑이를 넣은 이유는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며 사람들도 호랑이를 크게 무서워하
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컸다. 고구려 고분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右白虎)라
하여 하얀 호랑이가 푸른 용과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산신(山神) 신앙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단군설화에도 성질 급한 호랑이가 나오고,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효자동의 효자비(孝子碑) 전
설에도 박창선이란 사람이 매일 호랑이를 타고 선친(先親)의 묘를 찾아갔다는 것, 후백제 견훤
(甄萱) 설화에도 견훤이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라 그 기운으로 무예가 뛰어나고 나라를 세웠다
는 것. 기타 여러 설화와 전설에서 호랑이가 중요한 존재로 나온다.
이처럼 호랑이가 대단한 존재이기에 호랑이를 등장시켜 창건설화의 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호랑이 대신 여우, 늑대, 수달, 곰을 등장시켰다면 조금은 이상했을 것이다. 여우나 늑대,
곰이 승려에게 목에 걸린 뼈를 빼달라는 것도 그렇고, 그들이 감사의 뜻으로 여인을 납치하여
건네는 모습도 생각해보니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런 짐승들 보다는 호랑이를 집어
넣는 것이 설화의 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의
허접스러운 생각일 뿐. 정답은 아니다.
어쨌든 이 남매탑은 그 이름 그대로 다정한 오누이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80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청량사는 창건 이후 고려 때 무너진 것을 조선 초기에 저 아래로 내려가 동학사
로 다시 태어났다. 옛 청량사 자리에는 남매탑 외에 3층석탑도 있었으나 3층석탑은 동학사로 내
려갔으며, 남매탑 밑에는 상원암(上元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옛 청량사터를 지킨다.
조그만 여동생 탑인 5층석탑은 보물 1284호, 오빠 탑인 7층석탑은 보물 1285호이다. 상원암과
남매탑은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 남매탑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⑤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⑥ 현지 등산
* 동학사 종점 → 동학사 홍살문 → 남매탑 (1시간 10분)
★ 남매탑 관람정보
* 동학사나 갑사를 거쳐서 갈 경우 입장료를 내야 된다.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동학사 ☎ 042-825-2570) |
남매탑 서쪽 밑에는 상원암이란 조촐한 암자가 들어앉았다. 법당 겸 종무소 및 요사(寮舍)로 쓰
이는 팔작지붕 기와집과 가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조그만 암자로 동학사에서 관리한다. 법당은
1970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법당 앞에 서면 계룡산 남쪽 줄기가 훤히 두 눈에 들어와 마음을 시
원하게 해준다.
법당 뜨락 동쪽에는 등산객들이 쉬어가며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데,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밥과 간식을 먹으면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는 모
습이 정겹다. 우리도 한쪽에 앉아 동학사에서 남긴 김밥과 간식을 먹었고, 무려 2,000원의 거금
으로 마련한 컵라면에 뜨끈한 물을 부어 김밥과 겯드려서 먹었다. 그 맛이 얼마나 꿀맛 같던지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는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지 맛이 좋은 것 같다. 집에서 먹는 라면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천상(天上)의 맛이다.
그렇게 또다른 점심을 마치고 천막으로 된 공양매점을 찾았다. 상원암 경내에 있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무인매점으로 여기서 커피 1잔 뽑아 마실려고 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한다. 그
외에 양초나 공양미, 휴지 등은 속세보다 곱절을 얹혀 팔고 있었다. 관리인이 없기 때문에 돈은
불전함에 알아서 넣으면 되는데, 엄청난 가격에 입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조금은 쌀쌀하고 식곤증까지 밀려와 가격에 상관없이 1잔 뽑아 마
실려고하는데, 동전을 넣는 투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커피 버튼을 꾹 눌러보
니 종이컵이 나오면서 알아서 커피가 담긴다. 동전은 그 옆에 마련된 철제 불전함에 소정의 돈
을 알아서 넣으면 된다.
우리는 커피를 4잔이나 뽑아 마시고 500원 정도를 넣었다. 우리 같은 가난한 중생에게까지 그렇
게까지 돈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부처와 절은 아비규환에서 허우적거리며 신음하거나
없는 중생을 위한 존재이지 돈을 위한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
남매탑의 여동생인 5층석탑은 겉으로 보면 3층으로 보인다. 허나 그는 엄연한 5층석탑이다 기단
부(基壇部)로 착각하기 쉬운 길쭉한 1층 부분과 희미하게 남은 5층 부분 때문이다.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단의 기단을 벽돌처럼 쌓고 5층의 탑신을 얹은 형태로 얼핏보면
벽돌처럼 쌓은 모전탑을 연상케 한다. 탑신의 각층 옥개석(屋蓋石)은 얇고 넓으며, 1,2층 옥개
석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 넣은 구조이다. 3,4층 탑신과 옥개석은 따로 돌 1개씩
이며, 4층 옥개석 받침은 1단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5층은 탑신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옥개
석이 없어져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둥근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탑의 형태를 가만보면 백제 탑의 백미(白眉)인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을 많이도 닮았
다.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를 비롯한 옛 백제의 본토
에서는 고려 후기까지 정림사지 석탑과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들이
곳곳에 솟아났다. 이 탑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탑이 위로 올라가면서 생략된 부분이 있고, 조
각 수법이 일정치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의 내용처럼 신라 후기에 조
성된 탑이 아닌 것이다.
5층석탑의 곁을 지키는 오빠탑 7층석탑은 5층석탑보다 1.5배 정도 높다. 전체적인 모습은 5층석
탑과 비슷하며, 네모난 바닥돌 위에 1단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을 얺힌 형태로 5층탑과 마
찬가지로 1층 탑신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웠으며, 1층 탑신에는 네모난 감실(龕室)을 새겼다. 감실
은 불상을 봉안하는 공간으로 현재는 아무 것도 없으며, 옆면에는 문비로 보이는 아주 얕게 파
여진 부분이 있다. 옥개석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층과 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1층이 지나치게 크고 꼭대기로 올라갈 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균형은 크게 떨어진다. 탑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만 있을 뿐, 머리 장식은 없다.
탑의 양식을 보면 백제 2대 탑의 하나인 미륵사지석탑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5층석탑으로 이어
지는 양식으로 5층탑처럼 생략된 부분이 많고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이들 탑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앞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자 1981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