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룡산 동쪽에 안긴 비구니 사찰, 충신의 사당을 간직한 동학사(東鶴寺)
동학사는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을 대표하는 절이다. 계룡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자리한 이곳
은 724년(신라 성덕왕 22년) 상원조사(上願祖師)의 제자인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지금의 남매탑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절의 이름을 청량사
(淸凉寺)라 했으며, 남매탑은 청량사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920년(고려 태조 2년)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고려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면서 원당(願堂)을
세워 고려의 국운을 기원했다고 하며, 936년에는 고려 개국공신이자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
(柳車達)이 신라의 3대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를 비롯하
여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자 지금의 자리에 동학사(東鶴祠)란 사당을 지었
는데, 그것이 나중에 절 이름으로 단단히 굳어졌다. 여기서 동학(東鶴)이란 절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동방 성리학의 시조인 정몽주(鄭夢
周)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동학사라 불린다고 함>
천하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절이 소실되었다고 하며, 1394년(조선 태조 2년) 고려 3은(
三隱)의 하나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동학사 승려 운선과 지금의 자리에 절과 제단을 만들고
고려 태조와 공민왕(恭愍王),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제사를 지냈다. 길
재가 죽은 이후 1399년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포은과 목은, 야은 등 고려3은의 제단을
만들어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1400년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 삼은단(三隱壇
)이라 하고 그 곁에 삼은각(三隱閣)을 지었다.
1457년(세조 2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추앙받는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삼은
단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死六臣)의 초혼제를 지냈다. 얼마 뒤 영월에서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가 김시습을 찾아와 단종의 옷을 건네주었으며, 사육신의 제단 위에 단종
의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458년, 세조(世祖)가 충청도 지역을 시찰하면서 미리 통지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동학
사에 들렸다. 세조의 깜짝 등장에 미처 단종의 사당을 숨기지 못한 동학사 승려와 유생들은 간
이 단단히 쫄깃해 졌다. 허나 사연을 들은 세조는 오히려 표정을 바르게 하고는 자신의 업보를
뉘우치는 뜻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자신의 왕위 찬
탈 과정에서 죽어간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초혼제를 지냈다.
그리고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이 죽은 매년 10월 말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그에 따른 경
비 충당을 위해 10여 결의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동학사(東鶴祠)라는 현판을 내리는 한편, 동
학사 승려와 유생들이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동학사는 특이하게도 경내
에 유교식 사당이 둥지를 트게 되었으며, 절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진 것이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관련된 신천영(申天永)의 반란으로 절이 죄다 한줌의 재로 전락되었으
며, 1776년 영조의 4째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1749~1776)이 토지를
팔아 착복하면서 초혼각 제사가 중단되는 등, 동학사 최대의 아찔한 위기를 맞는다.
그러다가 1814년 금봉화상(錦峰和尙)이 중창을 벌이고 조선 정부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건물을
세웠으나 다시 화재를 만났다. 이후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학암마을을 경계로 땅 절반 정도를
되찾는다.
1818년 초혼각에 봉안된 이들의 자손들이 초혼각과 동학사의 중간을 호소하는 권선문(勸善文)을
돌리고, 상소를 올려 예조(禮曹)와 관찰부(觀察府)에서 완문(完文)을 내린다. 이때 월인은 충청
도 도승통(都僧統) 겸 초혼각 수호총섭(守護總攝)에 봉해지고 동학사 승려의 전출을 제한한다.
1827년 홍휘익(洪羲翼)이 세조가 내린 도장을 위한 집을 짓고 충청좌도 어사(御使)인 유석(柳奭
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전답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지냈다.
1864년 금강산에 있던 보선(普善)이 이곳에 와 경내의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을 새로 지었다. 이때 초혼각 북쪽 벽에는 단종, 동쪽에는 3은과 엄흥도, 서쪽에는 사육신과 김
시습의 위패를 모셨으며, 조선의 군신(君臣)과 고려의 신하를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
여 3은의 위패는 동학사 판도방(判道房)으로 옮겼다.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점을 봉안하고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9년에
는 기와중수를 했으며, 6.25전쟁 때 경내가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1956년 숙모전을 중
건하고, 삼은각을 새로 지었으며, 1965년 육화원과 강설전을 지어 승가대학으로 삼았다. 그 이
후 계속 불사에 열을 올려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육화원, 강설전, 숙모전, 삼성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
으며 부속암자로는 관음암과 길상암, 미타암, 상원암, 문수암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성각, 3층석탑, 삼은각, 숙모전이 고작이다. 절의 내력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애당초 갑사처
럼 큰 절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초혼각과 숙모전 등의 사당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면
서 마땅한 불교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했으며, 볼거리도 빈약하다. 게다가 계곡 주변의 협소한 공
간에 둥지를 틀어 경내 확장도 여의치가 않다. 그래서 절의 규모는 보통 수준이다. 허나 이상하
게도 계룡산에 안긴 절 가운데 인지도가 가장 높아 계룡산하면 동학사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이
곳의 대표적인 절이자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동학사는 비구니 절로 경내가 정갈하고 깨끗하며, 계룡산 깊숙한 산골에 자리하여 고즈넉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계룡산으로 오르는 입구로 여기서 은선폭포를 통해 신원사
(新元寺)로 내려갈 수 있고, 남매탑과 삼불봉을 거쳐 갑사로 내려갈 수 있다.
※ 동학사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⑥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 동학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042-825-2570)
* 동학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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