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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
계룡산 동학사


겨울의 제국이 스르르 그 기운이 다해가던 2월 하순 평일에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
嶽)이라 불리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
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은근히 포근하여 두꺼운 잠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
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추우니 1단계 낮은 잠바와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서울고속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을 달려 대전(大田)의 부도심인 유성(
儒城)에 이른다. 여기서 대전시내버스 107번(대전역~동학사)을 타고 다시 20분을 내달려 계룡
산의 동쪽 관문인 동학사 종점(학봉리)에 이른다.

휴일 같으면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겠지만 평일의 한복판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다. 계룡산
그늘에 형성된 주막촌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지나는 등산객들에게 여기서 밥드시고
가라며 목이 터져라 호객행위를 하지만 점심시간임에도 반응이 그리 신통치가 않다.

우리는 김밥과 라면, 과자 등을 사들고 삼불봉 밑에 남매탑이나 동학사에서 간단히 때우고 갑
사(甲寺)로 넘어가서 저녁만큼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다. 그래서 주막촌 편의점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입하는데. 김밥과 컵라면이 무려 2,000원씩이나 한다. 김밥은 그래도 시내보다는 덩치
가 크니 봐줄 만 하겠으나, 컵라면은 800원짜리는 2.5배나 얹혀서 아무렇지 않게 파니 어이가
달아날 따름이다. 산 중턱도 아니고 수레가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시내와도 가까운 주막촌에서
말이다. 하지만 산에 올라 먹는 라면과 국물의 맛이 그리워 그냥 질렀다.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주막촌을 지나면 별로 반갑지도 않은 동학사 매표소가 등산객을 맞는다.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폐지되었지만 몇몇 오래된 절은 여전히 문화재관람료를 이유로 입장료를 받는데, 동학사도 그
중의 하나로 소장 문화유산이 매우 빈약한데도 어른 기준으로 2,000원이나 받는다. 그래서 비
상용으로 지니고 다니는 대학교 학생증을 제시하여 700원에 입장을 했다.


♠  동학사 가는 길 (일주문에서 홍살문까지)

▲  동학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겨울에 잠긴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길 옆에는 동학사계곡(溪谷)이 졸졸졸
흐르며 숲길의 정치를 북돋는다. 그런 길을 3분 정도 가다보면 기둥 2개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자 속세와 절의 경계를 가르는 존재로 절 입구에 흔히 있
는 존재이다. 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이 문은 1999년 11월
승려 일연이 지은 것으로 공포(空包)가 촘촘히 박힌 육중한 다포(多包) 양식의 맞배지붕을 2개
의 기둥이 받쳐들고 있는데, 지붕이 너무 큰 나머지 기둥이 안스러울 정도이다. 기둥을 가만히
보니 가운데가 좀 볼록 나왔는데, 아마도 배흘림기둥인듯 싶다.


▲  조용히 봄을 잉태한 동학사계곡
겨울의 눈치에 숨죽여 지냈던 동학사계곡은 소쩍새가 울 때면 기지개를
활짝 켜며 봄을 맞이할 것이다. 날씨가 영상의 기온을 누리고 있으나
눈은 아직도 계곡의 절반을 뒤덮으며 겨울 제국의 위엄을 과시한다.

▲  동학사 문턱에 홍살문 - 홍살문을 갖춘 절은 동학사가 유일하다.

일주문을 들어서 17분 정도 가면 홍살문이 있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남매
탑과 삼불봉이며, 직진하면 동학사와 은선폭포로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동학사이다. 그런데 뭔
가 이상한 점이 있다. 절 앞에 특이하게도 홍살문이 있는 것이다. 그럼 홍살문이 무엇인가? 사
당이나 왕릉, 지배층의 묘역, 관아, 향교 문턱에 세우는 존재로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이
다. 여닫는 문이 아닌 공개된 문이란 점은 일주문과 비슷하나 성격은 전혀 틀리다.

그럼 왜 홍살문이 절의 관문인양 세워져 있을까? 그 이유는 당연히 있다. 바로 경내 동쪽에 자
리한 숙모전이란 사당 때문이다. 숙모전은 조선 세조의 명으로 지어진 것으로 단종(端宗)과 사
육신 등을 배향하고 있다. 이렇게 왕명으로 지은 사당이 있으니 그 입구에 홍살문을 두어 엄숙
함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전혀 맞지 않는 홍살문과 절집의 어색한 어울림, 그 현장이 바로 동
학사이다.

문 중앙에는 태극마크가 달려 있고, 다른 곳의 홍살문보다 기둥이나 창살의 굵기가 얇다.


▲  세진정(洗塵亭)

홍살문을 지나면 길 왼쪽 계곡에 세진정이란 정자가 있다. 6각형의 조촐한 정자로 누구든 발을
들여 쉬어갈 수 있게끔 개방되어 있다. 정자의 이름인 세진은 마음 속 번뇌와 티끌을 계곡에서
말끔히 닦고 깨끗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란 뜻이다. 즉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정자에 들어가
무심히 흐르는 계곡에 그나마 남은 속세의 미련과 번뇌를 말끔히 내던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
어오라는 동학사의 주문이 담겨진 것이다.


▲  동학사 앞을 흐르는 동학사계곡

▲  동학사 범종루(梵鍾樓)

세진정을 지나면 담장에 가려진 숙모전과 더불어 2층 규모의 범종루가 나온다. 범종루에는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을 비롯한 4물(四物)의 보금자리로 1872년
주지 옥봉이 세웠다. 1974년 범종을 새로 만들었으며, 2000년에 법고(法鼓)와 운판(雲版), 목어
(木魚)를 달았다. 범종루는 범종이 있는 2층만을 일컬으며, 시멘트로 지어진 1층에는 가게를 두
어 사찰용품을 팔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동학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범종루와 육화당(六和堂)
육화당은 1966년 주지 광호가 3년에 공사 끝에 완성된 건물로 대중을 수용하고
공양 및 공부를 하는 대방(大房)의 역할을 한다.


※ 계룡산 동쪽에 안긴 비구니 사찰, 충신의 사당을 간직한 동학사(東鶴寺)
동학사는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을 대표하는 절이다. 계룡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자리한 이곳
은 724년(신라 성덕왕 22년) 상원조사(上願祖師)의 제자인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지금의 남매탑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난 곳이라 하여 절의 이름을 청량사
(淸凉寺)라 했으며, 남매탑은 청량사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920년(고려 태조 2년)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고려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면서 원당(願堂)을
세워 고려의 국운을 기원했다고 하며, 936년에는 고려 개국공신이자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
(柳車達)이 신라의 3대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를 비롯하
여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자 지금의 자리에 동학사(東鶴祠)란 사당을 지었
는데, 그것이 나중에 절 이름으로 단단히 굳어졌다. 여기서 동학(東鶴)이란 절 동쪽에 학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동방 성리학의 시조인 정몽주(鄭夢
周)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동학사라 불린다고 함>

천하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절이 소실되었다고 하며, 1394년(조선 태조 2년) 고려 3은(
三隱)의 하나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동학사 승려 운선과 지금의 자리에 절과 제단을 만들고
고려 태조와 공민왕(恭愍王),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제사를 지냈다. 길
재가 죽은 이후 1399년 유방택(柳方澤, 1320~1402)이 포은과 목은, 야은 등 고려3은의 제단을
만들어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1400년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 삼은단(三隱壇
)이라 하고 그 곁에 삼은각(三隱閣)을 지었다.

1457년(세조 2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추앙받는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삼은
단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死六臣)의 초혼제를 지냈다. 얼마 뒤 영월에서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嚴興道)가 김시습을 찾아와 단종의 옷을 건네주었으며, 사육신의 제단 위에 단종
의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458년, 세조(世祖)가 충청도 지역을 시찰하면서 미리 통지도 하지 않고 갑자기 동학
사에 들렸다. 세조의 깜짝 등장에 미처 단종의 사당을 숨기지 못한 동학사 승려와 유생들은 간
이 단단히 쫄깃해 졌다. 허나 사연을 들은 세조는 오히려 표정을 바르게 하고는 자신의 업보를
뉘우치는 뜻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자신의 왕위 찬
탈 과정에서 죽어간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초혼제를 지냈다.
그리고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이 죽은 매년 10월 말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그에 따른 경
비 충당을 위해 10여 결의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동학사(東鶴祠)라는 현판을 내리는 한편, 동
학사 승려와 유생들이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동학사는 특이하게도 경내
에 유교식 사당이 둥지를 트게 되었으며, 절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진 것이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와 관련된 신천영(申天永)의 반란으로 절이 죄다 한줌의 재로 전락되었으
며, 1776년 영조의 4째 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1749~1776)이 토지를
팔아 착복하면서 초혼각 제사가 중단되는 등, 동학사 최대의 아찔한 위기를 맞는다.
그러다가 1814년 금봉화상(錦峰和尙)이 중창을 벌이고 조선 정부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건물을
세웠으나 다시 화재를 만났다. 이후 여러 차례 상소를 하여 학암마을을 경계로 땅 절반 정도를
되찾는다.

1818년 초혼각에 봉안된 이들의 자손들이 초혼각과 동학사의 중간을 호소하는 권선문(勸善文)을
돌리고, 상소를 올려 예조(禮曹)와 관찰부(觀察府)에서 완문(完文)을 내린다. 이때 월인은 충청
도 도승통(都僧統) 겸 초혼각 수호총섭(守護總攝)에 봉해지고 동학사 승려의 전출을 제한한다.
1827년 홍휘익(洪羲翼)이 세조가 내린 도장을 위한 집을 짓고 충청좌도 어사(御使)인 유석(柳奭
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전답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지냈다.

1864년 금강산에 있던 보선(普善)이 이곳에 와 경내의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을 새로 지었다. 이때 초혼각 북쪽 벽에는 단종, 동쪽에는 3은과 엄흥도, 서쪽에는 사육신과 김
시습의 위패를 모셨으며, 조선의 군신(君臣)과 고려의 신하를 같이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
여 3은의 위패는 동학사 판도방(判道房)으로 옮겼다.

1898년 대웅전에 탱화 4점을 봉안하고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9년에
는 기와중수를 했으며, 6.25전쟁 때 경내가 모두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1956년 숙모전을 중
건하고, 삼은각을 새로 지었으며, 1965년 육화원과 강설전을 지어 승가대학으로 삼았다. 그 이
후 계속 불사에 열을 올려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육화원, 강설전, 숙모전, 삼성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
으며 부속암자로는 관음암과 길상암, 미타암, 상원암, 문수암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성각, 3층석탑, 삼은각, 숙모전이 고작이다. 절의 내력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애당초 갑사처
럼 큰 절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초혼각과 숙모전 등의 사당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면
서 마땅한 불교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했으며, 볼거리도 빈약하다. 게다가 계곡 주변의 협소한 공
간에 둥지를 틀어 경내 확장도 여의치가 않다. 그래서 절의 규모는 보통 수준이다. 허나 이상하
게도 계룡산에 안긴 절 가운데 인지도가 가장 높아 계룡산하면 동학사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이
곳의 대표적인 절이자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동학사는 비구니 절로 경내가 정갈하고 깨끗하며, 계룡산 깊숙한 산골에 자리하여 고즈넉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계룡산으로 오르는 입구로 여기서 은선폭포를 통해 신원사
(新元寺)로 내려갈 수 있고, 남매탑과 삼불봉을 거쳐 갑사로 내려갈 수 있다.


※ 동학사 찾아가기 (2012년 3월 기준)
① 버스 이용 (동학사3거리 경유 / 서울에서 제일 빨리 가는 방법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계룡(신도안)행 직행버스를 타고 동학사(동학사3거리) 하차, 동학사3거
  리(학봉3거리)에서 걸어가거나 학봉3거리(또는 학봉리) 정류장에서 동학사로 들어가는 대전시
  내버스 107번이나 공주/논산시내버스를 타고 동학사 종점으로 이동 (학봉3거리에서 겨우 3정
  거장임)
② 버스 이용 (유성 경유)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광주와 전주, 청주에서 유성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③ 철도 이용 (대전역 경유)
* 서울역, 영등포역, 수원역, 광명역, 천안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대전역 하차
* 부산역, 마산역, 동대구역, 울산역, 포항역, 구미역에서 경부선 열차 이용
* 제천역, 충주역에서 대전행 충북선 열차 이용
④ 현지 교통 (유성, 대전, 공주, 논산에서 동학사까지)
* 대전역과 유성시외터미널에서 대전시내버스 107번 이용 (17~20분 간격)
* 대전지하철 1호선 현충원역(3번 출구), 유성온천역(5번 출구), 용문역(5/8번 출구)에서 107번
  시내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동학사행 시내버스 1일 3회 (시간이 맞지 않으면 유성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박정자에서 107번으로 환승)
* 논산역과 논산터미널에서 동학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21번이 1일 6회(휴일은 4회) 운행
⑥ 승용차로 가는 경우
* 호남고속도로지선(회덕~논산) → 유성나들목 → 공주방향 32번 국도 → 박정자3거리 좌회전
  → 동학사 주차장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 → 공주방향 23번 국도 → 월송교차로에서 대전방향 32번 국
  도 → 박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 동학사


★ 동학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천원(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5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 042-825-2570)
* 동학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동학사 계곡과 등산로 북쪽에 자리한 동학사 경내


♠  소소한 동학사 둘러보기

▲  동학사3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앞에는 2m 높이의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그는 원래 남매탑 주변에 있던 것으로 근
래에 이곳으로 옮겨온 청량사 시절의 유물이다.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
힌 형태로 기단과 3층 탑신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 붙어 완전한 3층석탑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색의 떼가 가득 입혀진 탑신과 옥개석, 그리고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기단과 3층 탑신이 오랜 시간을 초월하며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 주변에 난간석을 둘러 탑을 보호한다.


▲  동학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동학사의 중심건물로 1980년 새롭게 지었다. 이곳의 법당(法堂)이지만 강설전이나 육
화당 등 한덩치하는 건물들이 여럿 있어서 그런지 조금은 왜소하게 다가온다. 건물 불단(佛壇)
에는 석가여래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신장탱화와 약사회탱, 미타회탱, 현왕탱 등 여러 불화
들이 내부를 수식한다. 이들은 대부분 1898년에 제작되었다.


▲  동학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대웅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818
년에 지은 것으로 경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삼성각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들이 그려진 탱화는 1950년대에 제작되었다.


▲  수줍은 듯 뜨락을 굽어보는 삼성각 현판

▲  칠성탱화

▲  산신탱화


▲  해우소에서 바라본 숙모전(肅募殿) 일대(초혼각터) -
충남 지방기념물 18호

불교 공간으로서의 동학사는 이상이 전부이다. 나머지는 근래에 지은 참선 및 강학(講學), 생활
공간이고 그나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그들은 여기서 생략한다. 굳이 다룰 필요도 없
다. 지금부터는 동학사만의 특징이자 충신의 넋을 모신 숙모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숙모전은 경내 동쪽에 자리한 유교식 사당으로 매월당 김시습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세조
의 왕위찬탈에 뚜껑이 폭발해 낙향하여 동학사에 머물러 있었다. 1456년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
를 도모하다가 새남터(서울 용산)에서 처형되자 밤몰래 찾아가 처참하게 흩어진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노량진 사육신묘(死六臣墓)에 묻어주었다.
1457년 삼은각 옆에 사육신을 위한 단을 설치하고 그들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단종(端宗) 마저
영월에서 강제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잠적한 엄흥도가 살짝 찾아와 단종의 옷
을 건넸다. 김시습은 눈물을 흘리며 단종의 제단을 만들고 옛 주군의 혼을 달랬다.

이렇게 생겨난 사육신과 단종의 제단은 세조의 왕위 찬탈과 조카인 단종을 죽인 것에 발끈한 선
비들과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통곡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 매
월당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으나 제사를 지낼 때는 어김없이 찾아와 제사에 임했다.

1458년 세조가 만신창(滿身瘡)이란 병이 생기자 병도 치료할 겸 민생도 살필 겸 해서 충청도를
찾았다. 그는 왕자 시절부터 백부(伯父)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영향으로 불교에 관심이 많았
는데, 충청도에 이름있는 절들을 둘러보다가 동학사까지 오게 되었다.

동학사를 찾은 세조는 삼은각 옆에 '品' 모양의 단을 보고 '저게 무슨 단인가?' 물었다. 동학사
승려와 유생들은 '이젠 죽었구나' 싶어 벌벌 떨며 단종과 사육신의 제단이라고 답을 하니 세조
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업보를 뉘우치고자 자신 때문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비단에 적고
왕명을 내려 초혼제를 지냈다. 또한 그것으로도 성이 차질 않는지 사당인 초혼각(招魂閣)을 짓
게 했다. 초혼제를 지낼 때 세조가 서서 울었다는 바위인 '울바위', 걸음을 자작거렸다고 해서
'자작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절 입구에 남아있다.
이렇게 태어난 초혼각은 조선 정부와 유생들의 지원으로 번성해갔으나 1728년 신천영의 반란으
로 파괴되어 많은 신위(神位)를 분실했으며, 다시 세워 58위를 봉안하다가 1869년 3칸으로 중건
했다.

1883년에는 충청좌도 어사인 유석이 동무(東撫)와 서무(西撫)를 세워 군신(君臣)을 나누어 봉안
했으며, 1904년 숙모전이란 이름을 내리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를 추가했다. 이후 충신 26위
를 더해 89위가 봉안되어 있다.

삼은각과 동계사를 포함한 숙모전 일대는 한 덩어리로 초혼각터라 하여 충남 지방기념물 18호
지정되었으며, 숙모전은 별도로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7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굳게 닫힌 숙모전의 정문 인존문(仁存門)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67호

숙모전은 동학사 경내와 달리 출입이 어렵다. 숙모전의 정문인 인존문이 굳게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마크가 그려진 인존문이 활짝 가슴을 여는 날은 오로지 제사를 지내는 날 뿐이다.


▲  삼은각과 동계사

숙모전보다 1단계 낮은 좌측에는 쌍둥이꼴의 삼은각과 동계사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숙
모전의 전신(前身)으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들 사당 밖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사육신과 단
종의 제단이 들어서고 그들을 위한 초혼각이 세워지면서 별도의 공간으로 밀려났으며, 삼은각과
동계사에 봉안된 이들의 중요성 또한 떨어지고 말았다.


▲  삼은각(三隱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삼은각은 1394년 고려 3은의 하나인 야은 길재가 동학사에 들어와 정몽주의 넋을 위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길재는 동계사 옆에 제단을 만들어 그를 위한 초혼제를 지냈는데, 1399년 유방택이
정몽주의 제단 옆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단을 만들었고, 길재가 죽자 그까지 같이 봉안하여
1400년 삼은각을 만들었다. 그 이후 유방택과 이숭인(李崇仁), 나계종 등을 추가로 배향하여 6
위를 모시고 있다.
삼은각 앞에는 삼은각중건기념비가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  동계사(東鷄祠)

삼은각과 나란히 한 동계사는 이곳 숙모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라 관료 출신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유차달(柳車達)이 936년 동학사에 잠시 들렸는데, 부근 산중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박제상(朴堤上)의 영정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계사(혹은 동학사)란 사
당을 지어 신라의 다른 시조 2명(석탈해, 김알지)과 함께 제를 지냈다.

이후 고려 3은의 사당과 사육신의 초혼각이 지어지면서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1728년 신천영의
반란으로 초혼각이 불타면서 덩달아 파괴되었다. 이후 복원되지도 못하고 제사마저 끊긴 채 버
려져 있다가 1956년 9월에 비로소 중건되었다.


▲  숙모전과 삼은각, 동계사를 관리하는 숙모재(肅募齋)

▲  동학사에서 남매탑으로 오르는 산길

동학사는 높은 입장료에 비해 볼거리가 너무 빈약하여 거의 20분 만에 관람을 마쳤다. 삼성각에
서 3배를 하며 5분 정도 머무른 시간을 빼면 15분 밖에 되질 않는다.

이렇게 동학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남매탑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시간이 점심 때라 홍살
문 주변 의자에 자리를 펴고 속세에서 사들고 온 김밥과 계란을 일부 먹었다. 김밥은 4줄을 샀
는데, 그중 2줄과 계란만 먹고 나머지 김밥과 라면은 남매탑에서 먹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자
꾸 손이 가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여기서 다 먹어치우면 몸이 무거워져 오르기도 힘들다.

동학사에서 남매탑까지는 거의 50분, 남매탑과 가까워질 수록 산길의 경사는 힘겨운 속세살이처
럼 무척이나 각박해진다. 산에 오를 때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곱게 접어 날리고 산과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숭상(崇尙)과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고 천천히 올라야 뒷탈이 없다. 산은 자
신을 만만하게 보고 덤비는 존재를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추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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