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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마실길~구름정원길 나들이 '


▲  마실길에서 만난 은행나무숲길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  마실길 느티나무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첫 무렵,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이번 둘레길 산책은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하여 내시묘역길, 마실길, 화의군묘역, 구름
정원길 북쪽 구간을 거쳐 불광2동에서 그 끝을 맺었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
지만 내 마음을 적지 않게 앗아간 곳 중 하나라 그 마음을 찾으러 다시 그들을 찾은 것
이다. 탐방밀도 1위(1㎢당 5만여 명)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당당히 올라있는 북한산(삼각
산) 탐방객의 절반 정도가 둘레길 방문자라고 하니 그의 인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진관동 구간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 입구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서울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북한산초교가 있다.
(거의 시골학교 분위기임)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인 내시묘역길은 고양시 효자동(孝子洞) 공설묘지에서 진관동 방패교육대
에 이르는 3.5km의 산길이다. 북한천(北漢川)에 걸린 둘레교를 사이로 북쪽은 고양시, 남쪽은
서울 영역으로 평지와 야트막한 산길이 전부인 아주 착한 길이다. 전주이씨 서흥군파묘역, 경
천군 송금비, 경주이씨묘역, 여기소터, 백화사, 중골마을 느티나무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으
며, 백화사 뒤쪽 산자락에는 천하 최대의 내시묘역이었던 이사문 공파(李似文 公派)의 묘역이
있었다. 바로 그 묘역 때문에 '내시묘역길'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그 묘역의 규모는 약 8,800평으로 45기의 조선 중~후기 무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무덤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곳이 있구나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묘역은 2012년 4월 귀신같이 사
라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내시의 후손임을 껄끄럽게 여긴 후손들이 묘역을 파서 유골과 부장물을
챙기고 그 일대를 조경개발업자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사까지 포장길이 뚫리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자 팔았다고 전하며 후손들은 땅값으로 4억 8천만원을 만졌다고 한다. 유골은 화장
하여 납골당 등에 두었고 유물 또한 후손이 가져갔으나 무덤에 배치된 문인석 등의 무거운 석
물은 버려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얼마나 비밀리에 콩 볶듯이 했는지 동네 사람들과 백화사 승
려들도 묘역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 땅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던 그곳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이제는
한낱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되었다. 진작에 국가 지정 사적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이런 무덤 대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 후손들의 그릇된 생각과 문화재청과 서울시 철밥
통의 직무유기, 그리고 내시묘역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저평가가 낳은 비극이다.
이제 내시묘역도 없는 내시묘역길이 되었으니 그 이름도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이는 갈비탕
에 갈비가 빠졌음에도 갈비탕을 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적당하
다고 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북한산국립공원 철밥통들은 이름 변경도 귀찮다며 계속 수수방
관하고 있다.


▲  내시묘역길 (북한산초교에서 백화사 구간)
숲이 워낙 삼삼하여 햇살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긴다.

▲  경천군 송금비 주변 내시묘역길
길 주변은 경주이씨 경천군파 문중 땅이라 양쪽에 철책과 나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 서울시 지방기념물 35호

한산초교입구에서 내시묘역길을 따라 자연에 묻힌 민가를 여럿 지나면 울창한 숲속에 들어
서게 된다. 마치 자연휴양림에 들어선 듯, 키가 크고 늘씬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이로운
기운을 아낌없이 베풀어 속세에서 오염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오솔길을 거닐다보면 조그만 오래된 비석이 활짝 마중을 나오니 그가 바로 경천군 이해룡 사
패지 송금비이다. (줄여서 '경천군 송금비', '경천군 송금물침비'라 불림)

경천군은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서예가 겸 역관(譯官)으로 이름은 이해룡(李海龍)이다. 본관
은 경주(慶州),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으로 해서체(楷書體)를 잘 썼다고 하며 비
슷한 시대를 살았던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에 필적하는 명필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어(倭語)에 능숙해 1588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사자관(寫字官)으로
왜열도에 갔다왔으며 많은 글씨를 그곳에 뿌리고 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역관으로 왜군과의 협상테이블에 참여해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했으
며 1595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고 1602년에 사섬시주부(簿)가 되었다.
선조(宣祖)는 왜군과의 교섭에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치하해 경천군에 봉했으며 지금의 백화
사 동쪽 일대의 땅을 하사했다.

광해군(光海君)은 1614년 사패지(賜牌地, 제왕
이 하사한 땅) 적당한 곳에 송금비를 세워주었
는데, 비문에는 큼지막하게 '慶川君 賜牌定界
內 松禁勿侵碑' 13자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경천군이 하사받은 땅에서 소나무를 벌목하거
나 무단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으로 뒷면에는
'만력(萬曆) 42년 갑인(甲寅) 10월'이라 쓰여
있어 1614년 10월에 세워졌음을 귀뜀해준다.

비석에 쓰여있는 송금(松禁)은 나라에서 필요
한 목재를 확보하고자 소나무가 많은 산을 선
정해 보호하는 것으로 고려 때 시행되었다.
이곳 송금비는 조선시대 임업 정책인 송금 정
책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 400년이 넘는 나이
에도 무탈하게 잘 남아있으며 조선 임업사에서
꽤 중요한 유적이자 천하에서 딱 하나 밖에 없
는 존재로 가치가 높다.
이런 비가 2기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이곳만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바꼭질
중)

▲  조성시기가 쓰여진 송금비 뒷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 철책 사이로 잠겨진 문이 보일 것이다. 그 문을 열고 숲으로 살
짝 몸을 숨기면 이곳의 주인인 이해룡의 묘역을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묘역은 경주이씨 묘역이
라 불린다. (문이 늘 잠겨있으나 느슨한 경우가 종종 있어 순수한 의도로 살짝 들어가 살펴보
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음)

고색의 때가 가득해 중후한 멋을 풍기는 비석 주위에는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들이 마련
되어 있다. 워낙 숲속이고 평일에는 인적도 드물어 바람의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가 이곳을 이
루는 소리의 전부이다. 둘레길이 닦이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속세에 내보인 존재로 둘레길이
아니었다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북한산둘레길이 산자락에 숨겨진 많
은 명소를 속세로 꺼내주었음)

※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4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과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백화사 하차, 백화사 방면 둘레길을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4번 출구) 롯데몰 정류장에서 704번, 건너편 2번 출구 정류장에서
  34, 8772번(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25


▲  경천군 송금비 주변

▲  경천군 송금비에서 백화사로 이어지는 내시묘역길
중간에 의상봉, 용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  내시묘역길 중간에 자리한 백화사(白華寺)

경천군 송금비에서 6~7분 정도 가면 백화사란 조그만 절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중골마을의
동쪽 끝으로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지나친다고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도 넉넉하다.

백화사는 1930년경에 지어진 비구니 절로 자세한 내력은 딱히 모르겠다. 조촐한 경내에는 종
무소(宗務所)의 역할을 겸하는 요사(寮舍)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閣) 등 5~6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옆에는 아주 도드라지게 새겨진 잘생긴 마애3존불이 있다.


▲  백화사 마애3존불

백화사 마애3존불은 바위 윗부분을 싹둑 다듬고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치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돋음새김으로 사실감있게 다
듬어 그들이 마치 내 앞에 나타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비록 숙성 기간이 적어 고색의 때
는 끼지도 못했지만 50년 이상 지나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거뜬히 따
낼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연꽃대좌(臺座)에 앉은 석가불은 선정인(禪定印)을 선보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는데 꽤나 몸을 단련한듯, 어깨와 가슴이 매우 당당하다. 좌우 협시불은 시무외인으로 그
들 나름대로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고, 3존불 모두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광명(光
明)을 표현한다.

* 백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18-2 (의상봉길 70-7, ☎ 02-381-9103)


▲  백화사 삼성각(三聖閣)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창건 초기부터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이곳에 큼직한 대웅전이
들어앉아있고 삼성각은 마애불 뒤쪽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  경내 남쪽에 자리한 돌탑
경주 첨성대(瞻星臺)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지각색의 돌이 협동심을 보이며
어엿한 돌탑을 이루었다.

▲  중골마을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0호

백화사를 지닌 중골마을은 산에 감싸인 산골마을로 여기소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고 있는데 높이 19m, 둘레 4.7m로 추정 나이
는 210년 정도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치가 165년~) 이 일대는 이사문 내시
집안이 살던 곳으로 그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이며 오늘도 마을에 시원한 그늘을 베풀어 자연
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  여기소(汝其沼)터 표석

백화사 정류장에서 백화사로 가는 길목 초입에 여기소터 표석이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아련히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크게 증축했을 때 지방 관리로 있다가 공사 현장에 파
견된 관리가 있었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기생은 그를 보고자 먼 길을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으나 공사 관계자
들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여 너무 열받은 나머지 이곳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며 '너의 그 사람이 잠긴 못'이란 뜻에서 '여기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공사가 끝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섣부른 행동을 했을까? 옛말에도 급하면
돌아가라고 했거늘, 그 속담만 얌전히 지켰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텐데 말이다. 아마도 꽤
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이후 기생의 한이 서린 연못은 매립되었고 그 자리에 표석을 두어 여기소의 흔적과 교훈을 아
련히 일깨운다.


▲  내시묘역길 남쪽 구간 (북한산 글램핑장 주변)
내시묘역길도 그렇고 북한산둘레길은 민가와 농장, 경작지, 개인 토지를
이리저리 피해가느라 우리네 인생처럼 굴곡이 좀 크다.

▲  내시묘역길의 남쪽 끝을 잡다 (방패교육대 직전)


 

♠  북한산둘레길 9구간, 마실길

▲  마실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다~

내시묘역이 없는 내시묘역길은 여기서 마실길로 간판을 바꾸어 달린다. 방패교육대에서 진관
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1.5km 구간으로 완전 평지 수준이고 북한산둘레길 구간 중 가장 짧고
편한 길로 살랑살랑 거닐기에 아주 좋다. 하여 마실길이라 불린다.
이 코스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숲길, 삼천사계곡, 진관사계곡, 숙용심씨묘표, 영산
군묘역, 화의군묘역, 진관동 느티나무 등의 명소가 있어 짧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아주 풍
부하며 진관사(津寬寺)와 삼천사(三千寺)도 아주 가까워 답사 코스로 아주 안성맞춤이다.


▲  진관천 옆구리를 지나는 벼랑길 (마실길)

마실길을 들어서면 진관천 벼랑에 닦여진 나무데크길이 나온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
처럼 길을 낸 것으로 동쪽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벼랑이, 서쪽은 진관천이 삼
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물을 모두 머금으며 창릉천으로 흘러간다.
예전에는 피서의 성지로 여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서쪽에 연서로가 닦이면서 풍경이 조
금 깎여지고 지나는 차량의 소음도 적지 않아 요즘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중/상류로
많이 넘어갔다.


▲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로 약간 구부러진 계곡 벼랑길

▲  식당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너는 마실길

진관천 벼랑을 통과한 마실길은 삼천사입구에 이른다.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
(磨崖佛)을 지닌 오래된 절로 그곳이 땡기면 잠시 둘레길을 놓아두고 갔다와도 상관없다. (20
분 정도 걸림)
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계곡 구간에는 농장과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들을 지나 삼천사계곡을 건
너야 다음 코스로 진행이 된다. 평일에는 썰렁하지만 휴일에는 맛있는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
여 그 유혹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어찌 식당 앞도 아니고 한복판을 지나가게 했는지는 모르지
만 주변에 마땅한 길이 없어 기존 길을 활용한 모양이다.


▲  마실길 돌탑 구간

삼천사계곡을 건너면 'S'자로 살짝 구부러진 길이 나오고 길 왼편으로 비슷하게 생긴 돌탑 4
형제가 마중을 한다. 이들 돌탑은 둘레길을 닦으면서 수식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둘레길을 아기자기하게 꾸며준다.


▲  나란히 자리한 돌탑 4형제

▲  마실길의 오랜 터줏대감,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11호

돌탑을 지나면 울창한 모습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그네의 두 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동화 속
푸른 언덕이나 초원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나무로 나이가 약 170년에 이른다.
자꾸만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높이 18m, 둘레 4.2m에 큰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위치는 진관동 132-20번지로 북한산둘레길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삼천사와 진관사를 수없이 들락거린 나 조
차도 둘레길의 안내로 2012년 이후에나 그를 만났으니 앞서 경천군 송금비와 더불어 둘레길이
캐준 소중한 보물이다.


▲  느티나무 주변 풍경

▲  은행나무숲길 옆에 닦여진 돌탑들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숲과 돌탑이 나란히 있으니 마치 신성한 어딘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은행나무숲길 (왼쪽은 늦봄, 오른쪽은 여름)

마실길에서 가장 으뜸인 곳이자 북한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로 170
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숲길을 꼽고 싶다. (솔직히 둘레길 주변에서 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은 별로 없었음)
수목원이나 휴양림의 그림 같은 숲속길이나 산책로를 거니는 듯한 즐거운 기분이 드는 곳으로
느티나무 주변을 곱게 손질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어 마실의 기분을 진하게 들게 했다. 게
다가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로 조촐하게 은행나무숲길을 내면서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
이어 가로수길에 못지 않은 맵시를 자랑한다. 
산책로 주변에는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있다. 굳이 의자가 아니더라도 돗자리를 가져와
은행나무 그늘이나 주변에 깔고 간식을 먹으며 수다 몇 송이를 피우면 정말 소풍이 따로 없을
것이다.

은행나무숲길은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명소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홀린 곳으로 집으로 훔쳐
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보고 또 보고 누리고 싶다. 이런 곳에서는 정말 옛 사람들처럼 시 1수
읊어줘야 운치가 나거늘, 시적(詩的) 감각이 떨어지고 인간의 하찮은 말과 언어로 자연의 아
름다움을 표현하고 희롱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 일인듯 싶어 그저 탄성만 질렀다.


▲  봄과 여름, 가을이 앞다투어 머물다 가는 은행나무숲의 위엄
겨울은 그 시샘이 더 높아 아예 은행나무의 옷을 다 벗겨가 버린다.


 

♠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
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
(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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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8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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