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의군 이영 묘역과 구름정원길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862C8414FB912BE13) ▲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4호 |
은행나무숲에서 진관사계곡을 건너 계단을 오르면 진관사로 인도하는 도로(진관길)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은 진관사로, 서쪽은 은평한옥마을로 이어지며 마실길은 바로 서쪽에 있는 3거리 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3거리 서남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4형제가 있음) 그리고 바로 정 면에 있는 산자락에 무덤들이 여럿 눈에 보일 것인데 그들은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묘역 이다. (영산군 묘역은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서쪽 3거리에서 은평한옥마을 동부를 가르는 마실길(연서로48길)을 따라가 진관생태다리를 지 나서 동쪽 산자락에 홍살문과 사당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덤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화 의군 묘역이다.
화의군(和義君, 1425~?)은 세종의 9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영(李瓔), 자는 양지(良之)이며 생 모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매우 좋아해 매일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하며, 초서(草書)와 예서(禮 書)에 쓸데없이 능했다. 또한 이미 6살에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人生斯世 忠孝爲大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충효가 크다 하니 忠能保國 孝能匡世 충성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효도로써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433년에 화의군에 봉해졌고 1436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했다. 1441년 에는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 때문인지 이복형인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여염집 여자를 남 장을 시켜 궁 안으로 납치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부왕(父王)인 세종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났다. 그 벌로 그에게 주어진 화의군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이 몰수되었다. 허나 1447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남의 기첩(妓妾)을 가로챈 일로 직첩이 또 몰수되었다. 그러다가 맏형(문종)이 재위에 오른 1450년에 다시 환원되었다.
화의군은 누이동생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더불어 훈민정음에 제법 조예가 깊었는데 정음청 (正音廳)에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프로젝트에 참 여하였고, 평소 친분이 있던 박팽년의 매부 박중손(朴仲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세 아들을 두었다. 1455년 2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에 오른 이후, 4째 형인 금성대 군(錦城大君)을 비롯한 60여 명의 무인과 활쏘기 사냥을 나갔다가 대간(臺諫)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변경으로 귀양 갔다가 그 이듬해 풀려났다. 그리고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兪應孚) 등 이 단종(端宗) 복위를 꾀하다 걸려들자, 세조는 화의군에게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화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457년, 순흥(順興,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귀양간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몰래 꾀하였고 영월로 유배간 단종이 결국 사사(賜死)되자 복위에 가담한 죄로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유배 되었다. 이때 그에게 주어진 모든 관직과 왕족의 특권, 재산이 싹 몰수되었으며, 그의 이름과 자손들의 이름은 왕실 종친록(宗親錄)에서 제명되는 치욕을 맞는다. 그가 금산으로 유배된 이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 ① 1460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는 것, (화의군 묘역 안내문, 화의군파 족보, 은평문화원에서 편찬한 '은평구의 문화유산') ② 거의 60~70세까지 유배지에서 살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 것. (조선왕조실록..)
화의군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과 자손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오다가 성종 시절에 들어와 세조의 부인이자 화의군의 형수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지시로 도성(都 城) 밖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중종 시절에는 화의군의 손자 이윤(李允)의 상언(上言)에 따라 복관(復官)되면서 신분이 회복되는 한편, 종친록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552년에는 금산에 있던 화의군의 묘소를 현재 위치인 양주(楊州) 땅 신혈리(新穴里, 현 서울 진관동)로 이장했으며, 1736년 영조(英祖)는 그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에 영월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 때 단종에 대한 충절이 인정되어 그 제단 에 배향되었다. 화의군 묘역에는 그의 차자(次子)인 '여성군 번(驪城君 轓)', 3자인 '금난수 식(金蘭守 軾)', 증손자인 '태산군 황(泰山君 凰)'의 묘가 있으며, 묘역 밑에 충경사(忠景祠)란 사당을 세워 화의군 부부와 그의 생모의 신위(神位)를 봉안했다. 또한 그 주변에는 화의군의 후손들이 살 고 있었는데 은평뉴타운 개발의 칼질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묘역 주변에는 충경사 사당 과 재실(齋室)만 남게 되었다.
화의군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조선 왕족의 하나로 단종 복위운동에도 참여했었고 훈 민정음 프로젝트에도 크게 활약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다. 물론 여자를 너무 밝혀 남의 여자를 마구 건드렸던 진상은 좀 있었지만... 그의 우울했던 인생 만큼이나 그의 묘역 또한 긴 세월을 비지정문화재의 영욕을 간직하며 지 내오다가 2005년 말에서야 뒤늦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면서 팔자가 조금은 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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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서쪽에 자리한 화의군 신도비 (神道碑) |
▲ 화의군 사당인 충경사와 붉은 피부의 홍살문 |
충경사 앞에는 성역(聖域)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차가운 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홍살문 과 충경사의 배치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조금은 북쪽으로 삐뚤어져 있다. 둘의 방향이 일치해야 좀 안정감있게 보이는데 말이다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충경사와 홍살문은 197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사당 남쪽 언덕에 화의군 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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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841C6424FB912B711) ▲ 화의군 묘역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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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주변은 잘 익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운치를 자아낸다. 묘역 주변은 묘역 보호를 위 해 사람 키보다 높게 철책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묘역으로 인도하는 문은 충경사 뒤쪽에 있는데 늘 굳게 잠겨져 있어 철책 너머로 보던가, 중간중간 보이는 허술한 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던가 해야된다. 허나 철책 밖에서도 보일 만큼 보이니 괜히 무리는 하지 말자.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33162424FB912B92E) ▲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화의군 묘역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05798414FB912C12C) ▲ 곡장을 병풍처럼 두른 화의군 묘와 그의 아들인 금난수 식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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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묘는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처럼 조촐한 크기로 곡장을 봉분(封墳) 뒤쪽에 병풍처 럼 둘러 무덤의 품격을 조금 높였다. 무덤 앞에는 상석(床石)과 묘표, 장명등이 있고 그 양쪽 으로 문인석 1쌍과 근래에 지은 무인석(武人石) 1쌍이 나란히 무덤을 지킨다. 게다가 근래에 봉분 밑도리에 엉뚱하게도 12지신상을 두룬 호석(護石)을 둘러 서로가 너무 어색한 조화를 보 인다. 봉분에 비해 호석을 너무 크게 둘러 근래에 지어진 무덤처럼 요상한 모습이 되었으며, 12지신 상의 모습도 지금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갈 것 같은 생동감 있는 모습이라 다들 산만해 보여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한 것 같다. 물론 무덤에 대한 후손들의 지극정성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 정성이 너무 지나쳐 조선 초기 무덤을 20세기 무덤으로 품격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은 크게 망가지지 않은 이상은 초창기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무덤 주 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무덤을 너무 기존의 모습과 다르게 치장해버리면 무덤 주인이 잠시 마실갔다가 자신의 무덤도 찾지 못하고 헤매지 않겠는가?
※ 화의군 이영 묘역 찾아가기 (2018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가변차로 정류장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중앙차 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에서 하차 (701, 7211번을 타 는 것이 더 빠름) 정류장 남쪽에 자리한 제각말아파트교차로에서 동쪽 길(연서로48길)을 3 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화의군 묘역이 있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1, 704번(구파발역 경유), 가변 차로 정류장에서 7211번을 타고 푸르지오 521동 정류장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44 (연서로48길 22) |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D9E3E4FB916602A) ▲ 화의군묘역 인근 구름정원길에서 만난 주인 잃은 비좌(碑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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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 묘역 남쪽에 북한산(삼각산)과 조선시대 최대의 공동묘지였던 이말산(莉茉山)을 이어 주는 진관생태다리가 있다. (밑에 터널을 두고 그 위에 산줄기를 만듬) 여기서부터 잠시나마 정들었던 마실길은 막을 내리고 북한산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로 이름이 갈린다.
구름정원길은 진관생태다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4.9km 거리이다. 옛 기자촌터 뒤쪽 으로 구름정원이란 이름이 참 어여쁜데 그 이름 그대로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름과 조금 이나마 가까워지는 구간으로 평지 일색의 마실길과는 완전 차원이 틀려 마실길에 적응된 몸이 조금 괴로워함을 느낄 것이다.
진관생태다리에서 10분 이상 올라야 비로소 옛 기자촌 뒷쪽 산능선에 이르는데, 길 중간에 주 인을 잃은 비좌와 동자석 등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허나 대부분 속인들은 둘레길에 눈이 멀어 그들을 지나치고 만다. 이곳을 비롯하여 이말산과 내시묘역길 주변에는 왕족과 사대부, 상궁, 내시들의 무덤이 즐비하며 이 비좌와 동자석도 그들 무덤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자연재해로 묘가 사라지고 비석 또한 파괴되어 이렇게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만 간 신히 남아 햇볕을 보고 있다. 이 비좌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주변을 싹 뒤 집어 엎으면 유력한 단서가 나올 듯 싶은데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이상 비좌와 동자석의 주 인을 찾는 시도는 없을 듯 싶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54A93E4FB9167408)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향로봉
![](https://t1.daumcdn.net/cfile/blog/1551843E4FB916780C) ▲ 기자촌 지킴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쪽 줄기와 은평구 동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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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촌지킴터에 이르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향로봉, 남쪽으로 은평구 동부 지역, 서쪽으 로는 개발의 칼질로 거의 허허벌판이 된 옛 기자촌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자들의 생활 터전으로 제공했다고 하는 기자촌(記者村)은 서울 지역 달동네의 상징으로 쇠락된 것을 2008 년 이후 모조리 갈아엎었다. 이곳도 은평뉴타운 개발지의 일부로 현재는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기왕 이렇게 밀어버린거 후회가 없게끔 잘 다듬었으면 좋겠고, 진관동 일대에 대한 개발의 난도질도 이곳에서 그만 멈 췄으면 좋겠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23EAE3E4FB9167E27) ▲ 구름정원길 중간인 폭포동 선림사 주변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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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촌지킴터에서 약 15분 정도 가면 기자촌 남쪽인 폭포동 선림사(禪林寺)에 이른다. 폭포동 (瀑布洞)이란 이름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산 위쪽 바위에 있는 폭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 소에는 보기 힘들며 비가 많이 온 날과 그 이후에만 잠깐씩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폭포이다.
이곳은 숲이 삼삼하고 계곡은 작으나 맑은 물이 흐르고 반석과 바위가 많아 피서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서 아파트가 보이는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바로 은평뉴타운의 동남쪽 끝 인 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완전 산속에 묻힌 아파트단지로 교통이 썩 좋 지는 못해 버스를 타려면 도보 10분 거리인 은평경찰서까지 걸어나가야 된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D3A3E4FB916812C) ▲ 하얀 피부의 반석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는 폭포동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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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123FCE3E4FB9168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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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포동 계곡에서 만난 어느 문인석과 망주석(望柱石) |
이들은 인근 산자락에 있다가 사라진 사대부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은 근심이 있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으며 상념에 잠겨 있고, 오른쪽 망주석에는 꼬랑 지가 긴 세호(혹은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
![](https://t1.daumcdn.net/cfile/blog/1753503E4FB916950A) ▲ 폭포동에서 불광2동으로 넘어가는 구름정원길 (선림사 뒷쪽)
![](https://t1.daumcdn.net/cfile/blog/174CDD3E4FB9169813) ▲ 선림사 남쪽 구름정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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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입구에서 시작된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선림사 남쪽 불광2동에서 쿨하게 마무리 지 었다.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이른 무더위와 장거리 도보로 적지않게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살펴보았으니 나름 뿌듯하며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자주는 아니어도 이렇게 종종 찾을 수 있어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둘레길 산책은 흔쾌히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