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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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