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