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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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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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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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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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문 안쪽 (도심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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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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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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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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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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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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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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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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