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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자현암)



~~~~~  도봉산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무수골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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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방학동사지

▲  도봉산 방학동사지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무수골 숲길

▲  귀록계산 바위글씨

▲  윗무수골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20m)은 내가 서식하는 도봉구(道峰區)의 듬직한 뒷
동산이다. 그의 그늘에 묻혀 산지가 어언 20년 남짓,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의
품을 찾곤 한다. 도봉산을 거의 손바닥 보듯 돌아다니는 본인이지만 그것을 깨는 신선한
존재들이 가끔 나타나 나를 놀래키니 그런 것을 보면 도봉산이 내 손바닥이 아니라 오히
려 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재롱을 떠는 것 같다.

도봉동 집과 가까운 도봉산 방학동(放鶴洞) 구역에 늙은 바위글씨와 절터 유적이 있음을
근래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아직도 그런 미답처(未踏處)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내심 놀
랐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여름 제국(帝國)
의 기운이 슬슬 꺾이던 늦여름에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집과도 가까우니 슬슬 걸어가면 된다. 신도봉4거리에서 우이동(牛耳洞) 방면으로 이어지
는 시루봉로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신방학중학교이다. 여기서 '방학동 전형필(全鎣
弼) 가옥' 옆길로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택시 회사가 있는데, 그 옆에 방학동계곡을 낀
산길로 들어서면 바로 도봉산의 품이다.


 

♠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방학동사지,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인도하는 숲길이다. 방학
동 주민의 소중한 산책 코스로 왕래가 빈번해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해 경관도 괜찮은데,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과
낙서가 거의 있기 마련이다.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해야 된다.
다행히 숨바꼭질의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
다.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 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암반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방학동계곡
바위 피부에 푸른 이끼들이 가득해 이곳이 속세의 때를 덜 탄
청정한 곳임을 알려준다.

▲  바위글씨가 서린 조그만 폭포 주변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에 네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
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
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가 급히 지
원을 애걸했다. 하여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營大將)
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또 파직을 당했
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왔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많은 문인과 교류를 했는데, 그중에서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
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조 1
수가 전하며,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300년 가까운 세월이 덧없이 흘렀건만 글씨는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은 정정한
모습이다.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뒷
쪽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해 별서(別墅)
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 어딘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
고, 귀록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
又贈可憐)','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
으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계곡 주변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
서 후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
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장수주말농장 옆 산길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너른 밭두렁이 나타나 사람을
놀라케 하는데, 그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푸르게 익어가는 밭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나마 봄이 된 기분이랄까? 수많은 사람과 회
색빛 빌딩숲,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에서 이렇게 밭두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서울 변두리란 소리이다.


 

♠  도봉산에 숨겨진 옛 절터, 방학동사지(放鶴洞寺址)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장수주말농장에서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묻힌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약수터 주변에 운동시설을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에 널린 운동시설과 공원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
는 돌도 꽤 고색이 깊어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살짝 속삭인다.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과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이 없어 안타
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지 여전히 입
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어 지역 이름을 따서 편의상 '방학
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 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하게 내
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건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적어도 고려 후기 이전에 절이 세워진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중기나 후기에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  절터 2단 석축 (석축 서편은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의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
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육시설
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관리의 손
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좀 있다면
금세 이곳이 절터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돌들이 헝클어진 절터 1단 석축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허나 그 가
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책임하게 버려져 있으니 실로 안타깝다. 그 외에 북한산(삼
각산) 향림사지(香林寺址), 화곡동(禾谷洞)사지, 대모산(大母山) 절터 등이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  절터에 남은 약수터
옛날 이곳에 있던 절 사람들의 식수로 절과 승려는 온데간데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물은 쏟아져 나와 대자연의 넒은 마음을 보여준다.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어처구니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터가 너른 1단 석축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 모습
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삼성각(三聖閣)이나 명부전(冥府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이렇게 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름도 전하
지 않는 옛 절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를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싹 뒤집어 조사
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도봉사 영국사(寧國寺)터로 여겨지는 도봉서원터처럼 이곳
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1단 석축

▲  맷돌 주변 절터 석축과 주춧돌


▲  절터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절터 서쪽 바위에는 체격도 늠름하고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
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월에 마련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자체적으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
로운데, 그들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손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자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복원하고 불
상복원비를 세웠다.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불상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
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명상에
임한다.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  1단 석축 윗쪽에 쌓여진 석축들
절터에서 나온 온갖 돌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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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계곡에 서린 바위글씨와 절터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방학동길을 타고 무수골
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북한산둘레길19구간)은 무수골에서 정의공주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
의 산길이다. 짙은 숲속을 거니는 그림 같은 숲길로 오르락 내리락이 다소 있을 뿐, 살방한
코스이며, 경사도 그리 각박하지 않다. 북한산둘레길의 서울 구간 상당수는 주택가와 산림 사
이를 오가지만 이 코스는 남쪽 구간 일부를 제외하면 시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은 깊은
산길이며, 북쪽인 무수골에서 도봉옛길(북한산둘레길18구간)로 간판을 바꾸고, 정의공주묘역
에서는 왕실묘역길(북한산둘레길20구간)로 간판을 갈고 우이동으로 흘러간다.

방학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연산군묘 북쪽에 자리한 정의공주(貞懿公主)와 안맹담(
安孟聃) 묘역, 무수골, 둘레길을 닦으면서 만든 쌍둥이전망대가 있으며, 둘레길과 좀 거리는
있지만 방학동사지와 귀록계산/와운폭 바위글씨가 있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해(樹海)와 속삭임 ~ 방학동길

▲  쌍둥이전망대

방학동길이 흐르는 무수골 남쪽 언덕에 똑같이 생긴 쇳덩어리 구조 2개로 이루어진 쌍둥이전
망대가 있다. 둘레길을 닦으면서 심어놓은 것으로 회전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 윗쪽에 이르는
데, 이곳에 서면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구와 노원구 지역이 그런데로 시야에 박힌다.


▲  하늘과 보다 가까이, 쌍둥이전망대 윗쪽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그저 그런 하늘 아래 전망대더라..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방학동 구역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노원구, 수락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안개가 극성이었다.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산줄기

▲  쌍둥이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  무수골 직전, 야트막한 고갯길 (방학동길)


 

♠  서울 속의 별천지, 도봉산 무수골 (윗무수골)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서울 속의 산골마을이자 도봉산의 숨겨진 비경이며 도봉산의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는 무
수골은 근심이 없는 계곡이란 뜻이다.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
도 있으며,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대장장이가 많이 살아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
'이라 불렸는데, 그 무쇠골이 영해군(寧海君)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
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15세기에 세종 9번째 아들인 영해군이 무수골 명당자리에 묻힌 이후, 그의 후손(전주이씨)들
이 터를 닦았고, 이후 안동김씨와 함열남궁씨, 진주류씨, 개성이씨 등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인
연으로 들어와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골짜기에 영해군파묘역과 함열남
궁씨묘역, 진주류씨묘역,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과 그의 부
인인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 ?~1466) 묘역 등 조선시대 무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방학동길 북쪽 종점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속살이 나온다. 그 전에 성신여대 난향
원 돌담길을 지나야 되는데, 길 좌우로 돌담이 둘러져있어 비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
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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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르게 익은 윗무수골 논

난향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온
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삼삼한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너른 편이다. 마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다.
이들 논두렁이 무수골의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
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
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윗무수골 숲길

논두렁을 지나면 250년 묵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느티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었다는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내외의 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식당을 가로 질러 숲속으로 들어서면 무수골의 오랜 주인인
영해군 묘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반면 느티나무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현암, 원통사, 우이암(관음봉)으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
다운 숲길 100선은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인데,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
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을 타고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한여름 피서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자현암입구 갈림길 (무수골공원 지킴터)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윗무수골 가장 안쪽에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자현암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첩첩한 산주
름 속에 제대로 묻힌 산사(山寺)로 1943년에 승려 김혜향(金慧香)이 이름이 전하지 않은 절터
에 세웠다.
혜향은 자현(慈賢)의 3대 제자의 하나로 스승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삼았는데, 1991년 요사채
를 새로 짓고 2011년에 범종각을 갖추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범종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이 피어나
지 못한 상태라 문화유산은 없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바깥에 석불과 보살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고, 요사채 옆에 노천 부뚜막을 설치해 나무장작으로 밥과 국을 만든다.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부뚜막을 갖추고 있으니 밥맛 하나는 좋을 것 같다.

* 자현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6-2 (도봉로169길 500 ☎ 02-954-2578)

▲  솥뚜껑도 갖춘 부뚜막

▲  대웅전(大雄殿)과 7층석탑

▲  석불과 김혜향 공로비(오른쪽 비석)

▲  칠성과 산신, 독성이 봉안된 삼성각


▲  정헌대부(正憲大夫) 남궁숙 신도비(神道碑, 왼쪽에 보이는 비석)와
후손들이 사는 집과 재실


자현암 못미쳐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남쪽 길로 조금 가면 마치 먼 지방의 깊은 산골에 들어
선 듯, 숲에 감싸인 조촐한 공간이 나온다. 그야말로 숲과 하늘만 보이는 이런 두메산골에 2
채의 집과 너른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한쪽에 근래에 지어진 남궁숙(南宮淑, 1491~1553) 신
도비가 있다.
신도비 뒷쪽 숲에는 남궁숙과 그의 자손들이 묻힌 함열남궁씨 제1묘역이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이후에 조성된 묘역으로 그 입구에 철책과 철문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긴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도 아니고, 묘역도 다소 젊어져서 철문을 뚫으면서까지 살필 생각은 없
다. 그냥 여기서 길을 접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신도비 주위로 후손이 사는 집과 재실(齋室)
이 있으며, 주변 텃밭은 주말농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함열남궁씨는 무수골과 도봉동 토박이의 일원으로 그들의 묘역은 이곳 외에 무수골 하류인 도
봉초교 뒷쪽(함열남궁씨 제2묘역)에도 있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에 벌인 도봉산 동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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