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연등으로 가득한 영화사 대웅전 뜨락
▲  하늘을 훔친 영화사 연등의 위엄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
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나 초파일 앓이가 대단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
다 매우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지역의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답사를 내세운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소에도 많은 절을 찾고 있지만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 뿐인 날이라 심쿵거리는(심장
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적당한 절을 찾아보았으나 이제 서울에 남
아있는 미답(未踏) 고찰(古刹)은 완전히 씨가 마른 상태, 하여 수도권으로 눈을 돌려보
았으나 멀리 나가기도 귀찮아 예전에 갔던 시내 절 중에서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보니 아차산 영화사 등 여러 곳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들을 이번 초파일의 주메뉴로 선
정하고 제일 먼저 아차산 영화사를 찾았다.



 

♠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입문

▲  영화사 일주문(一柱門)

아차산(峨嵯山) 남쪽 끝에 넓게 둥지를 튼 영화사는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다. 날이 날인지라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어 천하 사람들이 거의 절에 모여든 기분
인데 영화사의 정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영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경내 또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으로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초파일 분위기
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으며, 선불장 주변에서는 공양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
부터 먹고 싶었지만 우선 절을 둘러보고 먹기로 했다. 원래 핵심이 되는 것은 끝에 하는 법이
라고 하지 않던가? 초파일 절 투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영화사의 내력
을 간단히 살펴보자.

영화사는 672년에 그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용마봉(龍馬峰,
용마산) 밑에 절을 짓고 화양사(華陽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자료
는 전혀 없다. 게다가 그 시절 의상은 부석사(浮石寺)와 옥천사(玉泉寺, 경남 고성) 등 자신
이 키우던 화엄종(華嚴宗) 소속의 절 10개-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를 짓고 관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사는 그의 화엄십찰이 아님)
그러니 의상의 창건설은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영화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경내에 조
선 초에 조성된 미륵석불이 있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에 있던 시절, 절 등불이 무려 8km 이상 떨어진 한양도성까지 비쳤다고 한다. 그 정도
면 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등불이 궁성(宮城, 도성)까지 비추
는 것에 영 기분이 좋지 않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명을 내려 1395년 절을 군자동(君子洞) 어
딘가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후 중곡동(中谷洞) 산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07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영화사로 이름
을 갈았다. 1909년 도암(道庵)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 월주(月珠)가 중창하면
서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미륵전, 선불장, 요사채, 유치원 등 7~8동의 건
물이 있으며, 400년 묵은 느티나무와 하얀 피부의 늙은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느티나무는 영
화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기 이전부터 있던 것이고 미륵석불입상은 중곡동에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힘들게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20세기 초에 조성된 독성탱과 산신탱이 전하며, 1909년에 지어진 삼성각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허나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이렇다할 지정
문화재는 없는 실정이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넓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학생들의 법회활동이 매우 활발해 제법 젊
은 절이다. 아차산 밑에 있기는 하나 아차산과 이어지는 산길은 절에서 모두 끊어버렸다. 하
여 절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오르고 싶다면 일주문으로 다시 나와서 절 서쪽이나 동의초교
동쪽에서 산길을 이용해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9 (영화사로 107, ☎ 02-444-4321)


▲  영화사 선불장(選佛場)
대웅전에 못지 않은 우람한 규모로 선방 및 요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대한 규모의 영화사 대웅전(大雄殿)
1992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붉은 기와지붕이 켜켜이 이루어진 닫집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색 연등을 가득 달아놓아 마치 하늘이 움푹 낮
아진 기분이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태초(太初)에는 하늘과 땅이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저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밑에 초파일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
져 있고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누리려는 사람들로 꽤나 정신이 없다.


▲  오색연등이 영롱하게 허공을 뒤덮은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밑은 밤처럼 어둡고, 연등 위는 구름 위의 세상처럼 무척 환하다.

▲  아기부처의 관불(관정)의식 현장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분홍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
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그 긴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냈던 터라 간만의 화색
이 돈 표정인데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灌佛)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정면에서 담지는 못하고 이렇게 측면에서 어설프게 사
진에 담았다.
아기부처 앞에는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마치 오늘
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초파일 특수에 불전함은 거의 터져나갈 지
경이다. (반대로 내 주머니는 나날이 얇아지고 있음 ㅠ)


▲  영화사에서 제일 늙은 집,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옆에는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09년에 도암이 지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인데, 현판은 물론 겉모습까지
고색의 흔적이 자욱하여 이제 110여 년 되었건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지방문화재의 자
격이 충분하여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면 100% 통과될 듯 싶은데 절에서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매우 젊은 칠성탱

▲  20세기 초에 조성된 늙은 독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탱은 독성탱과 비슷한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와 어린 비서인 동자(童子), 그리고 산신(山神)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아
차산 자락이니 저 산신은 자연히 아차산 산신이 될 것이다.
거의 고양이처럼 그려진 호랑이는 산신 뒤에 자리해 있는데 얼굴은 산신의 왼쪽, 꼬랑지는 오
른쪽에서 살랑살랑거린다. 탱화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간식과 음식, 과일, 술들이 상다리가
절단이 날 정도로 가득하여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  하얀 연등이 하늘을 훔친 삼성각 뜨락

죽은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푸른 하늘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우울한 느낌이다. 반면 대웅전
뜨락에는 오색 연등이 펄럭이고 있어 활력도 넘치고 보기에도 좋다. (역시 색이 있어야 보기
에도 좋음)



 

♠  영화사 마무리 (미륵석불입상, 느티나무, 공양밥)

▲  경내에서 미륵전으로 인도하는 숲길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구석진 동쪽 산자락에 미륵석불의 거처인 미륵전이
있다.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엮어진 숲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미륵전이 활짝 모습을 비추는데,
느긋한 경사의 계단길로 이루어져 누구든 오르기 쉽다.
다만 길 양쪽 수풀에 지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있고 난간줄도 쳐져 있어 적지 않게
긴장감을 준다.


▲  숲속에 묻혀있는 미륵석불의 거처, 미륵전(彌勒殿)

영화사에 왔다면 대웅전 주변만 살피지 말고 미륵전에 깃든 미륵석불입상도 꼭 친견하기 바란
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영험하다고 소문난 석불이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홀로 떨어진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팔작지붕 건물로 미륵석불 덩치에
맞게 짜여졌다. 석불의 키가 3.5m라 건물 높이는 5m 정도 되며 건물의 겉모습에서 고색이 제
법 느껴져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전 앞에는 가건물을 길쭉하게 다져 예불
공간으로 삼았는데 새벽부터 19~20시까지 개방해 그를 친견할 수 있게 했다.

미륵전 현판은 불교학자이자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가 쓴 것이다. 영화사도 생각이 있다면 그 현판을 떼어내 장작으로 땠으면 좋겠는데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듯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까지 친일매국노의 흔적이 더럽게 깔려있
어 천하의 정의구현을 소망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적지않게 희롱한다.


▲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전의 주인, 미륵석불입상

영화사의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석불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에 대한 정성이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떡칠을 하는 통에 원래 모습을 다소 잃었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를 측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조각 수법도 그저 그런 수준이
라 늙은 석불임에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그의 몸에 짙게 깔린 하얀 때를 싹
제거하여 인근 광나루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 관련글 보기)처럼 제대로 된 재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불교에 관심이 지대했던 세조(世祖)가 그를 찾
아와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곡동에
서 여기로 절을 옮길 때 워낙 키다리에 거구로
콧대가 높은 그를 옮기고자 여러 대의 우마차
를 동원해 며칠 동안 낑낑대며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경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를 두었으니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
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불의 머리는 지나치게 큰 편으로 머리부터
눈, 코, 입, 귀, 검은 수염, 삼도가 그어진 목
까지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가슴 앞부분
을 드러낸 법의(法衣)를 걸쳤다.
왼손은 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린
여원인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현재 절에서는 그를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으나 원래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다.

▲  옆에서 본 미륵석불입상


▲  미륵전 주변 숲길
미륵전 뒤쪽이 바로 아차산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무심히 끊겨있어
이곳은 사실상 영화사의 막다른 곳이 되었다. 여기서 아차산둘레길이 뻔히
보이나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처럼 바라봐야 된다.

▲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미륵전 옆에 놓인 돌덩어리

미륵전 옆 바위에 인공이 가해진 동그란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생김새를 보아하
니 석불의 모자(갓) 같은 기분인데, 이곳 미륵석불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형편없이 작다.
이 돌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고색의 때가 별로
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영화사가 이곳에 안착된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대한 세월에게 저것을 지녔을 본체를 빼앗겨 저거만 겨우 남아있으며 정체성까지 상실되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
한 일은 없다.


▲  푸르게 익은 영화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5-2호

시간도 벌써 13시가 넘었고 경내를 이리저리 뛰다보니 시장기가 아주 극에 달했다. 경내를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초파일 절 투어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공양을 할 시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삼성각 앞까지 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양을 제공하는 곳은 선불장 느티나무 앞으로 줄의 길이는 대략 200m는
넘어보였는데, 내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어 할 수 없이 그 줄에 동참했다.
200m는 짧은 거리가 분명하나 그날의 200m는 거의 20km처럼 장대해보였다. 그렇게 30분 가까
이 기다리니 느티나무 앞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10분 정도를 더 소비하여 그제서야 공양밥과
미역냉채국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공양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19.5m, 둘레 4.1m의 덩치로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1982년 10월) 추정 나이가 약 37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덧없이 얹혀져 410살 이상이
된다. 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로 늘 좋은 질감의 그늘을 드리워 대자
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기다리는 줄이
꽤 고달팠을 것이다.


▲  영화사에서 힘들게 먹은 공양밥의 위엄

힘들게 공양밥을 받았으나 경내의 어지간한 자리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겨우
미륵전 숲길 입구에 자리를 잡고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비빔밥 스타일이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과 고사리, 시금
치 등 나물에 빨간 고추장을 넣어 잘 비벼먹으면 된다. 어떻게 비비느냐에 따라 맛도 천지 차
이, 게다가 고추장이 위장에도 좋다고 하니 듬뿍 넣어 비벼먹는 것도 좋다. 비빔밥에 딸려 나
온 미역냉채국은 시원하고 개운해 비빔밥의 느끼한 맛을 싹 가시게 해준다. (후식거리는 제공
되지 않았음)

그렇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시장통처럼 번잡한 영화사를 뒤로 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