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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봄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우미내계곡)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봄나들이 '


▲  아차산 생태공원 소나무숲

▲  아차산성

▲  온달샘 석탑


 

♠  한강변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 상부암 석보살입상(上浮庵 石菩薩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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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0호

▲  상부암 석불의 거처인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

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聖地)이자 야간 등산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차산(峨嵯山,
295m)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1~2달에 1번꼴로 안기고 있다. 그렇게나 자주 안기는 아차
산이지만 며칠도 안가서 아차산 앓이가 도져 그곳에 깃든 미답지(未踏地)를 1개라도 지울 겸
그의 품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장동 구석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을 먼저 찾았다.

키다리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즐비한 광장동(廣壯洞) 동쪽 구석 한강변에 늙은 석불 하나가 조
용히 숨어있다. 없는 듯 자리한 그에게 세상이 달아준 이름은 '상부암 석보살입상' 8자. (예
전에는 '상부암 석불입상' 7자였음)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빌딩으로 가득하여 여유 공간도 없
을 것 같은 곳에 1칸짜리 기와집을 지닌 고색의 석불이 숨어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
담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석불 이름에 '상부암(上浮庵)' 3자가 들어가 있어 '상부암'이란 암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그런 절은 없으며 그 석불이 떠내려왔다는
뜻에는 지역 사람들이 '상부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니 석불 자체가 그냥 상부암이란
노천 암자이다. 
현재는 옆에 있는 광장노인정에서 '상부관음전'이란 맞배지붕 기와집을 씌우고 주변을 정비하
여 석불을 지키고 있다.

▲  상부암 석불로 인도하는 길
(광장노인정 옆)

▲  잔디와 봄꽃이 잔잔히 입혀진
상부암 석불 뜨락과 쉼터


상부암 석불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광장동 100번지 막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서쪽과 남쪽
은 키다리 빌딩에 막혀 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막혀있는데, 그 위에 광나루역과 구리시를 잇
는 아차산로가 닦여져 차량들의 굉음이 종일 귀를 때려댄다. 그나마 한강이 있는 동쪽이 조금
시야가 트여있지만 그마저도 강변북로 아차산대교가 시야를 절반 이상 가리고 있어 그야말로
개발의 산물에 포위된 궁색한 처지가 되버렸다.
바로 그런 장소에 있으니 그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서울에 대
해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본인 역시 그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 그와의 숨바꼭질에
서 이제서야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석불은 언제 생겼을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670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광나루를 건너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석불의 나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9세기 후반~10세기 초)로 가늠되어 의상대사 설은 신
뢰성이 없다. 다만 옛날에 큰 홍수로 한강을 타고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
으며, 그로 인해 상부암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솔직히 홍수로 불상이나 석불이 떠내려가
새로운 곳에 안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떠내려왔다는 설은 그나마 신뢰가 간다.

이곳에 새로 자리를 잡은 석불은 오랜 세월 광나루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역 사람들의 보호
와 정성이 대단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밑에 있었으나 빌딩이 들어서면서 1989년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석축을 쌓고 터를 다져서 그의 거처와 조촐한 쉼터를 닦았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됨)이 두텁게 발라져 하얀 피부의 백불(白佛)로 있었는데, 근래 호분이 벗겨지면서 마치 번데
기에서 벗어난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수백 년 묵은 석불로 짐작을 하고 그를
살펴봤는데 무려 하나의 1,000년을 지낸 아주 늙은 석불이었다.


▲  날씬한 몸매의 상부암 석보살입상

석불은 키가 큰 늘씬한 몸매로 얼굴과 머리가 좀 지나치게 크다.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
無見頂相, 육계)이 두텁게 솟아 있으며, 머리칼 부분이 너무 넓다. 좁은 이마 밑에는 구부러
진 눈썹과 살짝 뜬 눈, 코가 무늬만 남아있으며, 다물어진 입술에는 조금이나마 미소가 피어
있다. 얼굴 살은 조금 있어 보이며, 두 귀는 길쭉하여 중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은 좀 두터워보이며, 목 부분이 절단되어 있던 것을 다시 붙였다. 윗도리는 짧지만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이고, 밑도리는 두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뚜렷하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며,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가 다리 사이
로 내려와서 다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하고 있다. 이
는 신라 후기와 후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법으로 이를 통해 그 시절 조성되었음
을 대놓고 귀뜀해준다. 또한 석불이 딛고 선 대좌(臺座) 역시 그 시절 연화문(蓮花紋)과 유사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분적으로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상태는 거의 괜찮으며, 서울 땅에서 거의 유일한 후삼국시
대 석불로 그 희소가치가 인정되어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석불은 반듯하게 서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한강에서 떠내려왔으니
원래 있었던 동쪽 어딘가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건물 또한 그를 따라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건
물 이름은 '상부관음전'으로 지역 사람들이 그
를 관세음보살로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석불 뒷쪽은 벽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3면 또
한 붉은 창살이 배치되어 마치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보호도 좋지만 너무 가둬놓은
인상이라 정면 만이라도 창살을 제거하여 중생
들과 보다 가까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  옆에서 바라본 상부암 석불


▲  희미하게 천 년의 미소를 던지는 상부암 석불의 얼굴
신체 비례는 그리 맞지는 않는다. 머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상부관음전 현판의 위엄

▲  상부암 석불 부근에 자리한 석불좌상

석불이 홀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지역 사람들이 별도의 석불좌상을 옆에 갖다두었다.
그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나 몸통과 그의 대좌에 고색의 때가 조금 깃들여진 것으로 보
아서 20세기 초나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가 잘려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서 붙였는데, 몸통과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서로가 익
숙치가 않다. 그의 표정은 나이 지긋한 노공(老公)이 싱글벙글 웃는 듯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100


▲  녹음이 짙은 워커힐로 (아차산생태공원 방향)

상부암 석보살입상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넘어가고자 워커힐아파트를 통해 워커힐로로 올라
갔다.
2차선 크기의 워커힐로는 서울 장안의 주요 벚꽃 명소로 4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이 순백(純白)의 봄 향연을 펼친다. 길 주변은 나무로 가득해 거의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5~6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이 아름다운 연못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  아차산 숲이 그늘을 드리우는 워커힐로


 

♠  아차산 남쪽 끝에 그림처럼 자리한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생태공원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紅蓮峰)
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과 만남의 광장, 황톳길과
지압보도, 소나무숲, 생태자료실, 생태관찰로와 자생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성
과 보루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흔적과 유물을 머금고 있는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갖추고 있
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과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을 닦은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
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의자와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시름과
더위를 잊기에 좋다. 또한 아차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 등산
/답사에 임하면 편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192)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습지원 사진을 클릭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습지원(濕地園)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인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대로 습지식물
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다진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
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1개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달과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습지원 동쪽 못

▲  습지원 서쪽 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 누님상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
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내 침침한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비록 하얀 피부
가 전부이나 실감나게 색을 입힌다면 지금보다 감동이 더 할 것이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했다.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습지원 서쪽 나비정원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아차산 생태자료실 서쪽에는 아차산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을 다룬 역사문화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은 좁게는 서울과 구리 지역, 넓게는 미수복지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많은 고
구려 유적을 품은 현장이라 고구려가 아차산에 새겨놓은 영광스런 현장들을 집대성하고 이곳
의 역사적 중요성을 천하에 널리 알릴 공간이 절실했다. 하여 광진구에서 1.45억원의 돈을 들
여 2009년 5월에 조촐하게 그 공간을 마련했다.

아차산성을 비롯해 아차산과 용마산, 홍련봉 일대 보루 유적과 이들이 뱉은 유물 일부를 전시
, 소개하고 있으며, 비록 생태공원에 얹혀있는 미약한 신세이나 아차산과 광대했던 고구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지대하여 장차 크게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를 제외한 이 땅에서 고구려를 전문으로 다루는 박물관이나 공간
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홍보관 내부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물고 있으며, 고구려 귀족의 복장을 입는 체험코너도 있
다. 아직까지는 전시 유물이 꽤 빈약하고, 아차산 일대로 국한된 점은 어쩔 수 없으나 4~5세
기 고구려 강역도가 너무 작게 나와있어 이 땅에 뿌리깊게 박힌 쓰레기 같은 식민사관의 잔재
가 여전함에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아차산성과 보루 유적이 목적이되 초행길이라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우선 둘러보고 답사
에 임하는 것도 좋다. 홍보관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봐야 10~20분 내외면 충분하다. (해
설시간은 제외) 그리고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아차산성 내부를 둘러보고 싶다면 이
곳에 문의를 해보기 바란다.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관람정보 : 9시~18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광진구의 역사와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을 머금은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내부


▲  홍련봉(紅蓮峰) 1,2보루 조감도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홍련봉(125m) 정상에는 2개의 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5~6세
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강과 가까워 아차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가마터
와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나왔다. 몇 년에 걸쳐 계속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는 다 풀리지 않았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①

아차산을 점령한 신라는 산성과 보루를 손질하여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신라 후기 이후 사용
가치가 사라져 모두 버려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인간의 손때가 사라지면서 대자연의 의해 헝
클어지고 분해되어 끝내 자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이후,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그 흔적들이 다시 햇살을 보면서 많은 유물을 토해냈
지만 성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죄다 깨진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의 깨져버린 역사 퍼즐을
푸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꼼꼼히 처리해야 될 숙제이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②

▲  상큼하게 닦여진 자생식물원 산책로

▲  파릇파릇 새싹이 꿈틀거리는 자생식물원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부부상

아차산성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 온달 장군이다.
그래서 만남의 광장 한쪽에 갑옷을 입고 칼집을 높이 들어올린 온달(溫達)과 아리따운 자태의
평강공주(平岡公主)상을 만들어 이곳의 상징적 장식물로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군주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딸이며, 온달은 그의 사위인
데, 공주의 휼륭한 내조에 힘입어 온달은 1급 장수로 성장해 많은 공을 세웠다.
신라가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세우며 드디어 한강 하류까지 건드리자 온달은 '죽령(竹嶺) 이
북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굳은 다짐을 꺼내 보이며 남쪽으로 달려가 한강
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차산성을 지켰다. 허나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성은 함락
되고 온달 자신은 끝내 전사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
한 한 때문인지 아무리 힘센 장정이 들어도 관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달래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신라 따위에게 한강 유역과 강원
도, 충북 지역의 많은 땅을 잃고 거기에 고구려의 1급 장수인 온달까지 죽어나갈 정도였으니
이에 대한 고구려의 치욕감이 상당했음을 온달의 설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온달의
부하들이 온달의 한을 풀기 전(죽령 이북 회복)에는 절대로 관을 운구할 수 없다고 거부한 것
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양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


▲  아차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그늘로 가득한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아차산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숲이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아차산성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소나무숲 동쪽 산길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
룩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드니 역
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1~2세기 경)에 국도(國都)인
위례성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
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
산성이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 등의 별칭도 전하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
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하게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
벌인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들쑤셨다. <동성왕(東城王) 시절에 북
위와 산동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크게 때려잡은 적이 있음>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
을 가다가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그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장수로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는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를 비롯해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
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아차~용마~망우산에 닦인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해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
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
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
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으
며,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
또한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장대터 주변에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묵은 것으
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허나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원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사
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
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광진구청이 워커힐과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 날이 있다. 바로 1
월 1일 아침으로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몰지각한 산꾼들이 그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책을 넘어 들어가니 그때 살짝 묻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는 아차산 일대가 수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어 단속
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코지만 안하면 된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이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將臺)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암사대교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과 1보루로 이어지는 능
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럼 생겨서 낙타
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정상, 대성암(범굴사)으로 이어지며, 서쪽
은 친수계곡과 영화사(永華寺) 방면.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대장간마을과 온달샘 석탑으
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줄기차게 들락거렸던 아차산 주능선이나 친수계곡 대신 관심을 1번도
주지 않았던 동쪽 길로 내려갔다.


 

♠  아차산 마무리

▲  너럭바위 전망대

낙타고개 동쪽 길은 구리시 지역으로 아차산에 묻혀있던 미답처였다.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
한 신세계에 발을 들인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려가니 동쪽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연 너럭
바위가 마중을 한다.
너럭바위는 산비탈에 드러누운 넓직한 바위로 그 윗도리에 전망대를 닦아 좁게나마 천하를 굽
어보게 배려했다. 비록 보이는 범위는 한강과 강동구, 구리시, 하남 미사지구 등이 전부이지
만 낮은 높이 치고는 조망은 괜찮은 편이며, 한강 바람과 산바람이 어우러져 시원하기 그지
없다.


▲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구리시(아천동, 토평동), 강동구 고덕동과 강일동,
하남시 미사강변지구 등이 바라보인다.

▲  온달샘

너럭바위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숲에 묻힌 온달샘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과연 그의 손때가 탄 샘터인지는 증명할 방법은 없다. 어
차피 먼저 이름을 쓰는 사람이나 지역이 임자이다.

천하가 봄가뭄으로 심한 갈증을 겪고 있던 때라 샘터의 수량도 그리 시원치는 못하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온달 형님이 1,500년 전에 마셨다는 물 맛은 봐야 되겠지. 비록 그때 물맛과
지금 물맛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답답하게 쏟아지는
물을 받아 들이키니 갈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온달샘 주변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한 온달체육회가 닦은 운동시설이 있으며, 샘터 옆에는 우
미내계곡 상류가 예전에 내린 비를 아껴가며 적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고, 그 건너에 납작하게
엎드린 늙은 석탑 하나가 슬그머니 눈길을 주니 그가 바로 온달샘 석탑이다.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온달샘 석탑

온달샘 계곡 건너편 바위 밑에 있는 온달샘 석탑은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지붕돌(옥개석)
2개가 전부인 초췌한 몰골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 겨우 일부만 남아 흩어져 있던 것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있는 석재를 수
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일으켜 세웠다.

유실된 부분이 태반이라 탑의 원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기단석도 그렇고 지붕돌도 작
은 것으로 보아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도의 작은 탑이었던 같다.
바닥돌의 양식<높은 사분원(四分圓)과 낮은 각형(角形) 괴임>과 기단석의 수법으로 보아 신라
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탑으로 여겨지며, 탑 주변에 건물터 주춧돌과 석재가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조그만 절집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절 역시 어느 세월에게 잡혀갔는지 알 도리가 없
으며, 탑은 온달샘 옆에 있다고 하여 온달샘 석탑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원래
이름은 아니겠지만 현재로써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어쩔 수가 없다.

* 온달샘 석탑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  뒷쪽에서 바라본 온달샘 석탑

▲  온달샘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  온달샘 석탑 주변 (우미내계곡)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워커힐 골프장, 강동구 지역)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리 아천동과 토평동, 한강, 강동구 지역)


온달샘에서 대장간마을로 이어지는 동쪽으로 내려가면 두꺼비바위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은
흙과 화강암이 어우러진 산이라 잘생긴 바위들이 많은데, 온달샘과 우미내계곡 주변에는 너럭
바위와 두꺼비바위, 큰바위얼굴, 석실고분이 있는 넓직한 바위(아직 이름이 없음) 등이 잔뜩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매력을 크게 수식해준다.

두꺼비바위에도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바라보게 했는데, 앞서 너럭바위보다 해발이 좀 곳이라
그곳과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바라보인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잘닦여진 계단길을 통해 대장
간마을로 내려갔다.


▲  대장간마을에서 두꺼비바위, 온달샘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

▲  하얀 피부의 반석이 짙게 깔린 큰바위얼굴 밑 우미내계곡

두꺼비바위에서 대장간마을로 내려가는 중간에 아주 큰 벼랑이 있는데, 그곳에 '태왕사신기'
촬영 시절(2007년)에 배용준이 발견했다는 '큰바위얼굴'이 있다. 그 벼랑이 잘보이는 곳에 조
망대를 두었는데, 나는 엉뚱한 것을 그 얼굴로 오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다시 찾아오라는 아차산의 깊은 뜻인
가 보다.

큰바위얼굴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우미내계곡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한 고구려 테마공간인 대장간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허나 시간이 늦은 상태라 쿨하게 다
음으로 몽땅 넘기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나의 즐겨찾기 산이니 가까운 시일
에 또 발걸음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나를 환송하는 온갖 무리의 장승들 (대장간마을에서 우미내마을 방향)
장승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러워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나쁜 악귀들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내버리며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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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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