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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와 자연의 향기가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  녹음에 젖은 간송미술관 보화각


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는 5월 중순이 되면 나를 설레게 하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성북동(城
北洞)에 있는 간송미술관이다. 품위와 소양이 있는 문화인들이라면 대부분 1번 이상 거쳐가거나
가보진 못했어도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미술관/박물관 및 5월 명소의 성지
(聖地) 같은 곳이다.

1년에 달랑 2번, 5월과 10월에 각각 15일만 문을 여는 그곳은 다채로운 테마로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속인(俗人)들의 관심은 그야말로 지독하여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그곳에 1
번 발을 들이면 그곳에 매료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곳의 빗장이 열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
다. 작년 10월 전시 이후 기나긴 잠수에 들어간 이후, 많은 문화인들은 이번에는 무슨 전시회를
열까 기대를 한다. 그러다가 5월이 되면 각종 신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을 알린다.
그리고 5월 중순 일요일에 세상을 향해 닫혔던 문을 열면 그 소식을 접한 천하 곳곳의 문화인들
이 먼 길도 마다 않고 몰려와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이 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라 그 소식을 전해 듣고 5월의 마지막
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다. 미술관을 찾는 방문자가 나날이 증가하여 주말에는 자칫 1~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난감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여유롭게 평일에 찾았는데, 주
말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이 제법 많았다.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은 2층 규모로 1938년에 지어진 하얀색의 오래된 건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는 조그맣고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듯. 그 안에는 가치를 헤아리기
도 힘든 무수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보화각 현관에는 3기의 돌사자가 눈을 잔뜩 부라리며 이
곳의 보물을 지킨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마치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俗世)와 공기부
터가 확연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케하며, 청정한 공기는 마음과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
리 어려운 이름의 그림이라도 머리에 쏙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에서 선보인 고서화(古書畵)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대신 간송 선생의 일생
과 간송미술관의 내력, 뜨락에 잠들어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더덕더덕 붙여져 있는데,
글씨체가 마치 살아 숨쉬는 듯, 기품이 돋보인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대인(大人)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호(富戶)이자 명문 깊은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는 30대 이전에 친가족 대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을 잃었
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상(喪)과 부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양부모와 친부모, 형제를 죄다 여의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일시에 십만 석을 일컫는 조
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나라 잃은 한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여러 선배와 스승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러다가 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키라고 길을 알려준다. 그의 권유
에 감동하여 대책 없이 방치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지키기로 결심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기며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통해 서화와 도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관련 식견을 풍부히 쌓아갔으며, 위창은 그에게
골동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의 간송은
이순황과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많은 문화유산을 수
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부도 등의 석조물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상당한 문화유산를 구
입했으며, 왜인들이 꽤나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
들였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막대한 고려청
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
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의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보기조(新
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었다. 그중에서 훈민정음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정(倭政)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하던 1943년 어느 늦여름 오후, 간송은 한남서림을 찾아 더
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책거간으로 유명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다. 뭔가 좋
은 건수가 있는 듯 싶어 이순황에게 그를 데려오게 하여 사연을 들이니 글쎄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이 안동(安東)에 출현하여 그것을 손에 넣고자 돈을 구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간송이 그 액
수를 물으니 당시 기와집 1채 값인 1천원~~ 그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거기에 11배인 11,000원
을 내주며 1천원은 수고비로 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간송에게 돌아갔으며, 6.25때 그
것을 품고 피난을 떠나 베게로 삼았다는 일화는 세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간송은 문화유산으로 멈추지 않고 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 동성학원을 설립하면서 교육 분야
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정말 무리한 금
액을 요구했는데,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별도 청구
했다. 간송은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원 재단설립에는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팔았다.

해방이 되자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다.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인회
를 세워 문화재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
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는 배때기에 기
름칠하며 오래 사는 이 땅의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혔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각
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황
에서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재를 다시 거금으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
주했으나,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이승을 떠난 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
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그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 그의 호
를 따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收藏庫)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타국살이를 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1446년
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을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
면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우리나라의 문자인 한글 해설서가 말이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
었는지 앞에서 언급한 일화를 통해 그에게 돌아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이 땅에서 편안하게 훈
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헌신으로 많은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었으니 이 역시 민족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
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술관을 세워 입장료 수입을 챙
긴 것도 아니다. 그는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
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졌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많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 땅(그래도 꽤나 넒음, 미술관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만 남게 되었다. 이렇
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
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
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때 서화와 소장 문화유산
을 속세에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림은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숫자가 고
개를 숙일 정도로 오히려 크게 증가된 셈이다.
허나 그가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방치
되고 해외로 마구잡이로 빼돌려지는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있었지 그걸로 수익을 챙
기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
다가 그의 자손들도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세상에 팔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등쳐먹고 갖은 간계로 돈벌기에 혈안이 된 우리나라 졸부(
猝富)들과는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
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우리나라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보화각은 2층 규모로 모두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1층보다는 2층이 더 넓으며, 옛날 건물이라 냉
난방 시설이 신통치 못하다. 5월 특별전 같은 경우는 다소 더운 경우도 많다. 그때는 오직 창문
이란 창문은 다 열어 문화에 대한 열기와 초여름의 열기로 후끈한 내부를 다스리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 간송미술관의 70년 역사 ~~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에
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
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
장을 비롯하여 인근 숲 1만 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고 매우 만
족하여 즉시 매입했다.
그는 숲속에 미술관 건물을 짓기로 결심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가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
단장(北壇莊)이 완성되었다. 북단장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단
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종 사촌
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으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스
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
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 본다. 만품
(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
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
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
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
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에게는 그야
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히 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
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
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재
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공산당에서 책임자를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하여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이거나 수집함)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
업을 이어받아 수집한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
로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
랑 4주 정도 30일 정도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나날이 늘고 있는데
반해,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이 전부이며,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
하고 있다.
이곳은 사유지에다가 간송 일가의 집이 보화각을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뜨락 곳곳에 배치된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
나 아쉽다. 게다가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과 홈페이지가 없어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시간 줄을 서야 되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
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시대가 변함에도 이곳은 여전히 옛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전시공간을 확장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금동3존불감,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紋梅甁), 혜
원풍속도 등 국보 12점과 백자박산향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금보(琴譜)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부도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2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초교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 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
  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연장 가능)
* 매년 5월 중/하순과 10월 중/하순에 각각 2주 정도만 한시적으로 공개하며, 공개 2주 전부터
  주요 신문과 인터넷 언론에서 앞다투어 정보가 나온다. (미술관 홈페이지는 없음)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에 대한 도록(圖錄)을 판매한다. 가격은 무려 2만원,
  내용이 다소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며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호랑이석상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출입금지가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1
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호랑이석상이다. 무서운 호랑이라기
보다는 수염이 긴 고양이처럼 앙증맞은 모습이다.
정말 집으로 보쌈해 뜰에 두고 싶은 그들 역시 기구한 운명으로 간송의 손길을 받아 저 자리에
있게 되었다. 저들 앞에 놓인 수풀이 아니었다면 호암산(虎巖山)의 석구상(石狗像)처럼 손으로
쓱쓱 쓰다듬고 싶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들어가질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수풀 속에 몸을 가린 무인석
오른쪽 사진의 무인석과 비슷하게 생겼다.
자신에게 시련을 준 속세를 등지고 싶은지
수풀로 자신을 가리려고 한다.

▲  무인석(武人石)
조선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는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맵시가 예사롭지가 않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사이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
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얼굴은 상당
히 망가져 있는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
은듯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보이며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다만 기구한
운명에 처해 있던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달랑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
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
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
을 들였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크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정성을 다해 지은 보화각은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으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 지정 등급의 하나인 등록
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참으
로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건물은 20~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데 말이다. 이는
간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은 아닐까..?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 방향)

▲  보화각에서 바깥 방향으로 바라본 오솔길

보화각으로 들어서려면 꽃과 나무, 화분이 가득한 녹음이 짙은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
만 오솔길에는 벽돌이 촘촘히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
이나 식물원, 숲속의 산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간직한 석탑과 불상, 석등이 서로를 보듬고 있으
며,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거리, 닭과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
지 갖추고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품을
수 없는 특이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하얀 털의 여인네 공작이 한참 사람 구경에 넋이 나갔다.
우리를 위해서 꼬랑지를 펼쳐 보여줄 수는 없을까..?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탑
의 높이는 약 3m로 작은 편이며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아 타국살이는 면하게 되었으나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
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사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사나불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
見頂相)가 두툼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잠겨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왜인들이 빼돌
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
습도 넉넉하게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제스쳐로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누린다.

 ▲  석조비로사나불 좌측에 자리한 석등(石燈)
비로사나불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육중한 덩치의
석등, 무덤 앞에 세우는 장명등(長明燈)과 비슷
하다. 이 석등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石佛)은 어
디로 간 것일까? 광배 무늬는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주인(석불)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꽃잎을 펼쳐 보인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우측의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좌측의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소리를 치듯 입을 크게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
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의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 마냥 만지고 있고,
우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
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보화각 남쪽에 서 있는 장명등(長明燈)
누군가의 무덤을 지켜주었을 장명등, 허나 이제는 보화각을 지켜준다.


♠  봄과 가을도 반하여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곳, 통제가 심해
아쉬움이 심히 묻어난 ~ 간송미술관 서쪽 부분

▲  녹음이 깃들여진 저 언덕길 끝에 나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보화각 옆에는(방향은 북쪽)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간부분에는 석조팔
각부도와 석인(石人)이 있다. 관람객들은 기껏 해봐야 팔각부도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며, 어쩔
때는 거기도 못들어가게 바리케이드 같은 것을 친다. 그 이상 들어가는 경우 관리인이나 관계자
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여간 쉽지가 않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
람들은 중턱 갈림길에서 발길을 돌리거나 아예 올라가지도 않지만 속사정을 아는 일부 사람들은
살며시 안쪽으로 들어가 외사리부도나 문경5층석탑 등을 사진에 담기도 한다.
 
중턱에 지키고 선 사람이 없다면 혼자 몰래 외사리부도나 간송 저택 뜰까지 들어가보는 모험도
감행해 볼 만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올라가면 언덕 위쪽은 무엇일까? 호기심이 일어난 사람들
이 군중심리로 따라 올 수 있어 모험에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런 모험자들
이 꽤나 눈에 거슬렸는지 쥐방울만한 멍멍이를 여럿 배치하여 접근도 쉽지가 않다.

외지인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望鄕)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부도,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입장료를 비싸게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
세에 공개를 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서 보화각 주변으로 옮기는 것도 괜찮
을 듯 싶다.


▲  석조팔각부도(石造八角浮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언덕길 중턱 좌측에는 육중한 8각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8각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리고 그 위
에 탑신을 얹힌 후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형태로 기단 아랫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있다. 지붕돌
귀퉁이 추녀에는 꽃조각이 있으나, 몇몇 귀퉁이는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흘러가 약간 깨져있다.
머리 장식은 마치 그릇을 뒤집어 놓은 모습으로 이 탑의 주인이 누구고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긴 이곳에 들어온 문화유산치고 사연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탑의 모습으로 보
아 신라 후기로 짐작된다.


▲  두툼하게 생긴 석조8각부도의 지붕돌 귀퉁이 추녀

▲  석조8각부도 기단부에 피어난 연꽃잎
무심한 세월의 상처가 곳곳에 입혀져 있지만 대부분은 잘 남아있다.

◀ 괴산 외사리(槐山 外沙里) 석조부도 -
보물 579호

석조팔각부도에서 오른쪽 구석으로 시야를 돌리
면 추녀 귀퉁이가 아름다운 부도탑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이 탑은 원래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절터
에 있던 것으로 왜인들이 빼돌리려고 인천항에
가져다 둔 것을 간송이 이순황을 급히 보내 거
액을 주고 수습한 것이다. 6.25전쟁 때 무너져
내린 것을 1964년에 복원하였다.

멋있게 올려진 추녀귀퉁이에는 아름다운 꽃장식
이 깃들여져 있으며, 웅장함과 수려함이 돋보이
는 부도탑으로 고려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엎어진 석탑과 옥개석만 거의 남은 석탑

석조팔각부도와 괴산 외사리 부도 사이에는 조그만 석종형부도와 탑신은 없고 옥개석(屋蓋石)만
남은 석탑 2기가 있다. 사진 오른쪽의 5층석탑은 기단과 1층 탑신은 그런데로 숨쉬고 있으나 2~
5층 탑신은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옥개석만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간신히
살아있다. 3층탑으로 보이는 왼쪽 탑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여 탑신 자체가 아예 없다. 작년에는
그래도 탑처럼 그런데로 서 있었더니만 이번에 보니 완전 넘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안스럽게 한
다. 왜 엎어져 있는지는 모르나, 부근을 벌초할 때 잘못 건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들 탑 형제는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어떤 기구한 사연을 타고 이곳에 들어와 뜨락의
일원이 되었다.


▲  대추처럼 솟아난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조선 후기 부도탑으로 탑신 위쪽에 연꽃잎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  홀을 들고 선 석인(石人) 1쌍

조선시대 어느 지체 높은 양반의 무덤을 지켰을 석인, 홀(忽)을 들고 선 것이 분명 문인석인 듯
싶은데, 머리에 익선관(翼善冠)같은 모자가 없고 특이하게 2개의 혹(뿔)이 솟아난 모습이 고개
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전에는 관(冠)이 사라지거나 파괴되면서 생긴 상처 자국으로 생각했는데
왼쪽 석인의 혹 하나가 부러진 것 외에는 마땅한 상처자국도 보이질 않는다.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에는 동자(童子)와 같은 천진난만함이 깃들여져 있는 듯 하다.


▲  뚜껑만 남은 채 대지에 누운 장명등
저 뚜껑을 열면 없어진 장명등의 화사석과 기둥이 쑥 나오는 것은 아닐까?

▲  언덕길 끝부분에 들어앉은 애석한 통제 구역 ~ 간송 일가의 저택

간송 일가의 집은 저 푸른 녹지 위에 세워진 그림 같은 별장이다. 재화(財貨)나 토지 같은 간송
의 재산이 문화유산 구입과 교육 때문에 많이 줄긴 했어도 현재 후손들 살림에는 별 지장은 없
다. 부자 동네로 집값이 높은 성북동에서 저 정도의 집과 너른 대지를 가진 것은 정말 우리 같
은 서민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울분을 삼켜야 되는 그림의 떡이다. 다행히 돈에 환장한 졸부
의 일가가 아닌 찬양해야 될 위인의 일가이니 그것으로 조금 위안은 된다.

집 주변에는 소나무가 운치를 자아내며 늘어서 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산내음과 솔내음이 요
란하게 진동을 한다. 집 뜨락에는 문경에서 온 5층석탑과 석불입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0호),
광배 등의 여러 석물이 있으나 개인 주택이라 애석하게도 출입은 통제되어 있다. 예전에는 살짝
뜨락에 들어가 문경5층석탑을 담아오기도 했는데, 멍멍이들이 어디서 잠복근무에 들어갔는지 뜨
락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튀어나와 나그네를 개쫓듯 쫓아낸다.


▲  간송 주택 북쪽으로 펼쳐진 송림(松林)

간송미술관은 개인 소유의 미술관이고 주인 일가의 주거지도 있기 때문에 통제구역이 상당하다.
수려한 절경과 함께 석조문화유산들이 뿌리를 내린 미술관 구석구석은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기
가 아깝다. 하물며 호기심과 신비로움을 유발시키는 통제구역은 오죽하리, 그저 휴전선 너머로
북한 땅 바라보듯, 청와대 때문에 통제된 북악산(北岳山) 통제구역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그 아
쉬움은 정말 온 은하계를 뒤덮을 정도로 크다.

마치 왕릉의 송림처럼 하늘 높이 솟아난 소나무와 그 사이로 곱게 깔린 멋있는 산책로. 저 길에
나의 두 다리를 꼭 들이리라 다짐을 하지만 계속 다짐으로 끝나고 있다.


▲  무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고,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무인석
조선 왕족이나 지체높은 당상관(堂上官)의 무덤을 지켰을 무인석, 허나 지금은 자신을
구해준 간송 일가의 주택을 지킨다.

▲  간송 주택 정문 부근에 자리한 양석(羊石)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을 지켰을 양석이 무인석과 함께 간송 저택의 대문을 지킨다.

    ◀  문경(聞慶)5층석탑 - 보물 580호
간송 저택의 뜨락에는 균형잡힌 아름다운 몸매
의 문경5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하늘
재 고갯길 동쪽)
에 있던 것으로 왜인들이 빼돌
린 것을 간송 선생이 수습한 것이다.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형태
로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강은 매
우 양호하다. 탑신(塔身)은 1층부터 4층까지는
비슷한 모습이나 유독 5층의 옥개석만이 층급
받침이 많다. 1층의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
의 조각을 새겼는데, 문의 표현을 단순화시킨
듯 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에 새겨져
있는데, 네 귀퉁이마다 꽃조각이 깃들여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
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아 고려시대 탑임
을 짐작케 하며 전체적으로 탑의 비례가 아름답
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탑 앞에는 배례석(拜禮
石)이 놓여져 그 품격을 갖추었다.


▲  간송 저택 정문 옆에 양석 1기와 꽃무늬가 새겨진 석물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미술관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푸르게 수놓은 녹음(綠陰)은 1년 뒤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맛집
* 추천 명소 - 선잠단터,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家)>, 심우장(尋牛莊), 삼
  청각,
길상사(吉祥寺), 최순우 옛집,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성북천발원지), 북악산
  산행(숙정문, 백악마루, 촛대바위), 와룡공원 고개길, 정법사, 한국가구박물관, 성락원
(城樂
  園, 관람 거의 불가), 십주원(관람 불가)
* 맛집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식당(돼지불고기 백반, 02-743-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까스(02-
  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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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5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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