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대인(大人)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호(富戶)이자 명문 깊은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는 30대 이전에 친가족 대부분-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간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을 잃었 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상(喪)과 부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이렇게 양부모와 친부모, 형제를 죄다 여의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일시에 십만 석을 일컫는 조 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나라 잃은 한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여러 선배와 스승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러다가 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키라고 길을 알려준다. 그의 권유 에 감동하여 대책 없이 방치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고 지키기로 결심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기며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통해 서화와 도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관련 식견을 풍부히 쌓아갔으며, 위창은 그에게 골동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의 간송은 이순황과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많은 문화유산을 수 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부도 등의 석조물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상당한 문화유산를 구 입했으며, 왜인들이 꽤나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 들였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막대한 고려청 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 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의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보기조(新 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었다. 그중에서 훈민정음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정(倭政)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하던 1943년 어느 늦여름 오후, 간송은 한남서림을 찾아 더 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책거간으로 유명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다. 뭔가 좋 은 건수가 있는 듯 싶어 이순황에게 그를 데려오게 하여 사연을 들이니 글쎄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이 안동(安東)에 출현하여 그것을 손에 넣고자 돈을 구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간송이 그 액 수를 물으니 당시 기와집 1채 값인 1천원~~ 그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거기에 11배인 11,000원 을 내주며 1천원은 수고비로 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간송에게 돌아갔으며, 6.25때 그 것을 품고 피난을 떠나 베게로 삼았다는 일화는 세인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간송은 문화유산으로 멈추지 않고 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 동성학원을 설립하면서 교육 분야 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정말 무리한 금 액을 요구했는데,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별도 청구 했다. 간송은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원 재단설립에는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팔았다.
해방이 되자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다.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인회 를 세워 문화재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 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는 배때기에 기 름칠하며 오래 사는 이 땅의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혔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각 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황 에서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재를 다시 거금으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 주했으나,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이승을 떠난 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 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그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 그의 호 를 따서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收藏庫)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타국살이를 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1446년 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을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 면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우리나라의 문자인 한글 해설서가 말이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 었는지 앞에서 언급한 일화를 통해 그에게 돌아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이 땅에서 편안하게 훈 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헌신으로 많은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었으니 이 역시 민족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 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술관을 세워 입장료 수입을 챙 긴 것도 아니다. 그는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 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졌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많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 땅(그래도 꽤나 넒음, 미술관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만 남게 되었다. 이렇 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 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 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때 서화와 소장 문화유산 을 속세에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림은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숫자가 고 개를 숙일 정도로 오히려 크게 증가된 셈이다. 허나 그가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방치 되고 해외로 마구잡이로 빼돌려지는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있었지 그걸로 수익을 챙 기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 다가 그의 자손들도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세상에 팔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등쳐먹고 갖은 간계로 돈벌기에 혈안이 된 우리나라 졸부( 猝富)들과는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 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우리나라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 간송미술관의 70년 역사 ~~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에 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 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 장을 비롯하여 인근 숲 1만 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고 매우 만 족하여 즉시 매입했다. 그는 숲속에 미술관 건물을 짓기로 결심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가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 단장(北壇莊)이 완성되었다. 북단장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단 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종 사촌 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으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스 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 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 본다. 만품 (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 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 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 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 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에게는 그야 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히 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 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 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재 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면서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공산당에서 책임자를 보내 그들을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하여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이거나 수집함)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 업을 이어받아 수집한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 로소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 랑 4주 정도 30일 정도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나날이 늘고 있는데 반해,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이 전부이며,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 하고 있다. 이곳은 사유지에다가 간송 일가의 집이 보화각을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 이다. 그리하여 뜨락 곳곳에 배치된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 나 아쉽다. 게다가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과 홈페이지가 없어 불편함을 가중시킨다.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시간 줄을 서야 되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 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시대가 변함에도 이곳은 여전히 옛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전시공간을 확장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금동3존불감,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紋梅甁), 혜 원풍속도 등 국보 12점과 백자박산향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금보(琴譜)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부도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2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초교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 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 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연장 가능) * 매년 5월 중/하순과 10월 중/하순에 각각 2주 정도만 한시적으로 공개하며, 공개 2주 전부터 주요 신문과 인터넷 언론에서 앞다투어 정보가 나온다. (미술관 홈페이지는 없음)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에 대한 도록(圖錄)을 판매한다. 가격은 무려 2만원, 내용이 다소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