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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겨울 나들이 (전주향교, 동고산, 문학대)



' 전북의 중심지, 전주 겨울 나들이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  전주향교 대성전

▲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겨울 제국이 가을을 몰아내고 강추위로 천하를 벌벌 떨게 하던 12월 한복판에 호남의 오
랜 중심지, 전주(全州)를 찾았다.
전주는 1년에 1회꼴로 발걸음을 하는 곳으로 이번에는 전주한옥마을 동남쪽에 있는 동고
산(승암봉, 기린봉)을 중심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을 하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 남부터미널로 달려가 삼례(參禮)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주를 가니 전주행을 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날따라 전주 수요
가 오지게 많아서 다소 여유로운 삼례행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전주행을 타나 삼례행을
타나 전주한옥마을(전주 도심)까지 시내버스를 1회 타야 되며, 삼례(완주군 삼례읍)에서
전주 도심까지 거리도 가깝고 시내버스도 한강수 흐르듯 많이 다닌다.

그렇게 3시간 여의 시간을 던져 전주한옥마을에 이르니 시장기가 요동을 친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하여 전주를 찾을 때마
다 거의 꼭 들리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점심으로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섭취하고 전주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전주천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북촌(北村)한옥마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전주
한옥마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10대부터 노인들, 다른 나라 잡것들까지 다양한 관광객들
로 거의 북새통을 이루어 이곳의 국제적인 명성을 실감케 한다.
전주의 명물 간식거리인 수제 초코파이를 하나 구입하여 입에 물고 북적거리는 전주한옥
마을을 주마등(走馬燈)처럼 흘려보내니 기와집 누각(청연루)을 이고 있는 전주천 남천교
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  전주천과 남천교

▲  전주천(全州川)에 걸려있는 남천교(南川橋)

전주의 젖줄인 전주천은 임실(任實) 관촌평야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내를 가로질러 만경강(萬頃
江)으로 흘러가는 30km의 하천이다. 한때는 다른 도시의 하천과 마찬가지로 개발의 난도질에
사망 상태까지 갔었으나 1998년 이후 꾸준히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여 살아있는 하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2002년 왜열도에서 열린 '강(江)의 날' 대회에서 생태
계를 성공적으로 복원시킨 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천에는 '남천교'란 다리가 걸려있다. 다리의 길이는
82.5m, 폭 25m로 전주천 몸매에 맞게 닦여져 있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특이하게 기와집 누각(
樓閣)까지 걸쳐 놓았다. 처음에는 한옥마을을 수식하는 용도로 최근에 지어놓은 별 의미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남천교는 조선 중기 쯤에 전주천에 놓여진 돌다리로 인근의 승암산과 한벽당이 어우러져 빼어
난 경관을 자랑했다. 5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지개처럼 생겨 '다섯 무
지개다리','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다리 윗도리에 용조각이 있어서 '오룡교(五龍橋)'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용조각은 승암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새겼다고 하며, 19세기
이후에는 5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닮았다고 하여 안경다리<안경교(眼鏡橋)>란 별명까지 추가
되었다. 이렇게 별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 다리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뜻이다.

1753년 다리가 유실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790년 지역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복원 공사를 벌
여 1791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남천교는 얼마나 잘 지었던지 그 모습
이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여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걸작을 자랑했지만 왜정(倭政)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그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가 2009년 전주시가 옛 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참고하여 이전보다 더 크게
재현했다. 또한 다리 한복판에는 팔작지붕을 지닌 청연루(晴烟樓)를 세워 쉼터와 풍류의 장소
로 삼았다.

청연루는 남천교와 달리 오래된 사연은 잡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가까운 한벽당(寒碧堂)이 전
주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의 현장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고 있어 그 이름을 따서
대칭적인 의미로 세웠을 뿐이다.
전주한옥마을의 새로운 명소로 여기서는 갈대와 온갖 식물, 물고기가 춤을 추는 전주천과 승
암산, 승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동고사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과 승암산

▲  남천교 개건비(改建碑)

청연루 옆에는 1790년 남천교 재건을 기리고자 1794년에 세운 개건비가 우뚝 자리해 있다. 네
모난 비좌(碑座)에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글씨를 머금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둥근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로 다리의 재건 과정과 남천교 건립에 돈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름
이 적혀있다.
원래는 한벽당 우측 하천변에 있었으나 남천교가 사라진 이후, 쓸쓸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어
떤 사람이 전주교육대 교정으로 옮겨놓았다. 이후 남천교가 새로 지어지면서 다리 한복판으로
가져와 안착시켰다.

남천교의 빛바랜 일기장 같은 존재로 세월을 탄 검은 때가 자욱해 중후한 멋을 드러내고 있으
며, 비석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잘 다듬어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전주천동로는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 길로 남쪽은 전주천, 북쪽은 한옥들이 늘어서 한옥마을
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상당수 근래 지어진 어린 한옥들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
로 피부가 뽀송뽀송한데, 산뜻하게 정비된 그 길을 걸으면 승암산, 한벽당으로 이어지며, 중
간에 전주향교가 홍살문을 내밀며 잠시 들릴 것을 권한다.


▲  전주향교 홍살문과 하마비(오른쪽 비석)

전주향교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비록 한참 전이긴 해도 들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붉
은 홍살문의 차가운(?) 유혹에 이끌려 잠시 승암산을 접고 향교로 길을 틀었다.

홍살문은 쌀쌀맞게 생긴 모습 그대로 권위적인 곳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주로 왕릉과 향교(鄕
校), 서원, 지체 높은 사람의 사당, 관청 입구에 세워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향교와 관
청, 높은 이의 사당에는 홍살문 보조용으로 하마비를 옆에 두기도 한다. (하마비만 두는 경우
도 있음)
하마비의 거친 피부에는 '이곳을 지나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라!'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다른 향교의 하마비는 거의 조그만 덩치이지만 이곳 향교는 나보다 키가 크다. 아무
래도 전주가 호남의 중심 고을이자 조선 왕실의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라 그에 걸맞게 향교
와 하마비를 세운 모양이다.
허나 시대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하마비와 홍살문의 위엄은 완전히 추락했으며, 이제는 문화
유산의 의미 밖에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위엄이 식어버린 하마비(下馬碑)
윗도리와 아랫도리 피부색이 서로 틀리다.

▲  박진 효자비(朴晉 孝子碑) -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5호


홍살문을 지나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를 들어서려는 찰라, 향교 담장 서쪽 끝에 조그만 기와집
하나가 손짓을 한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그 손짓을 따라가보니 '박진 효
자비'를 머금은 비각(碑閣)이었다.

효자비의 주인공인 박진은 전주박씨로 자는 내신(乃臣)이다. 부친이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전주로 내려와 부친을 간호했는데, 낮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허
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예법에 맞추어 장사와 제사를 치루고 3
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하여 지역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하여 조정에서는 1398년 정려비(
旌閭碑)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1724년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중각(重刻)했으며, 1805년 후손 박필성(朴必晟)이 '전주부 효자
박진정려기'를 지어 비각 안에 걸어두었다.

향교 앞에 자리해 있어 위치도 좋으며, 향교 유생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도 아주 그만이다. 하
여 그를 이곳에 둔 모양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음) 그 효자비를 둘러보고 만화루
를 통해 공자왈, 맹자왈이 귀를 때릴 것 같은 전주향교로 들어섰다.



 

♠  전주 지역 교육의 옛 중심지, 지방 향교 중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전주향교(全州鄕校) - 사적 379호

▲  전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향교는 나라에서 각 고을마다 세운 중등교육기관으
로 1410년에 창건되었다.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원래는 경기전(慶
基殿) 옆에 있었다고 전한다.

1441년 조정에서 향교 옆에 경기전를 짓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는데, 향교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경기전의 엄숙한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전주
부(全州府) 서쪽 성 밖, 화산<華山, 황화대(黃華臺)> 밑으로 내보냈다. 졸지에 경기전이란 굴
러들어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3년 전라도관찰사 장만(張晩)이 중건했는데, 전주부 성내(城內)
에서 멀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향교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조정에 알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크게 지었다. 이후 1654년과 1832년, 1879년, 1904년에 중수를 하였다.
향교 학생은 액내생(額內生, 정원내 교생, 양반 자제들) 90명, 액외생(額外生, 평민과 서얼로
정원외 교생) 90명 등 총 180명으로 정7품의 훈도(訓導) 1명을 두어 4서5경(四書五經)을 가르
쳤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사라졌으며 제사 기능
만 남게 되면서 거의 빈껍데기 신세가 되버린다.
전주향교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해 뒤로 물러나있다가 1949년 재단법인 명륜학원(明倫
學院)을 설립하여 다시 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0년 4월 초급대학인 명륜대학을 설립하여
법학과와 국어한문과를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주 최초의 대학, 전북대의 시초이다. 즉 전주
향교가 전북대의 산실인 것이다.
처음에는 향교 건물을 이용하여 대학교를 꾸렸는데,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으면
서 학생 수가 폭주했다. 하여 수용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전주 시내 북쪽에 덕진캠퍼스를 지
어 1955년 대학교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향교는 시민을 대상으로 조촐하게 한문과 서
예, 예절 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봄(3월)과 가을(9월)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매월 초
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향교의 기능을 계속 지키고 있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와 서무, 만화루,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수복실(守僕室), 고직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총 99칸을 이루고 있으며, 그
장대한 규모로 인해 전라도 53고을의 수도향교(首都鄕校)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대성전과 명륜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명륜당은 전국 향교
의 명륜당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또한 계성사는 제주향교와 더불어 천하에 딱 2곳
밖에 없어 나름 희소성이 있으며, 김제향교와 나주향교와 더불어 국가 사적의 높은 지위를 누
리고 있다.

전주의 꿀단지, 전주한옥마을이 천하 굴지의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면서 한옥마을 남쪽 구석에
자리한 전주향교에도 볕이 들고 있다. 이곳까지 관광/답사객들이 적지 않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뒤쪽 부분을 제외한 대성전, 명륜당 구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으며, '성균관스캔들'
,'YMCA야구단' 등의 드라마와 영화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 땅의 향교 대부분은 폐쇄일변도를 보이며 문을 굳게 잠구고 있으나 이곳은 문을 활짝 열어
살아있는 향교이자 전주한옥마을을 수식하는 관광 명소로 계속 옻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든다. 그럼 지금부터 은행잎 냄새가 진동하는 향교 내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전주향교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 (향교길 139, ☎ 063-288-4548)
* 전주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전주향교의 정문인 만화루(萬化樓)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만화루는 전주향교의 정문이다. 1866년 홍수로 붕괴된 것을 다시 지었
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가운데 문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고, 좌/
우 문은 활짝 열려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만화루란 이름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 공자의 도(道)로 만물이 교화된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방이 훤히 뚫린 모습이라 여름에는 강의 공간으로 쓰였으며, 종종 향시(鄕試)를 보는 곳으
로 쓰이기도 했다.

▲  대성전으로 인도하는 일월문(日月門)

▲  일월문 옆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7-1호

만화루를 지나면 솟을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일월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바로 향교
의 중심인 대성전 구역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3그루가 쏟아낸 은행잎이 대성전 뜨락에 가득하
여 은행잎 특유의 악취가 아주 코를 찌른다.
이처럼 향교 뜰에 은행목을 심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던 행단(杏壇)의 고
사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그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공간(
향교, 서원)에서는 꼭 그것을 심었다. (선비나무라 불리기도 함)
일월문 옆 은행나무는 290여 년 묵은 것으로 대성전 은행나무 3형제 중 막내이다. (1982년 9
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키는 약 20m, 둘레 3.7m로 겨울 제국의 의해 모
든 것이 싹 털린 채 앙상한 가지를 애타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하고 있다. 허나 이
제 12월이니 그때까지는 무려 4달 가까이 기다려야 된다. 그 시간이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
만 묵묵히 기다리면 어느새 소쩍새가 울 것이다. 내가 전주향교를 과연 갔었는지 햇갈릴 정도
로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니 말이다.


▲  동무(東廡)와 390년 묵은 커다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5호)

대성전 구역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무, 서쪽에 서무를 두고 있다. 이들 '무'자 돌림
의 건물은 대성전에 넣지 못한 유교 성현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동무에는 공자의 주요 제자인
'비공 민손','설공 염옹','려공 단목사','위공 중유','위공 복상' 등 5명과 송조(宋朝) 6현인
'도국공 주돈이','낙국공 정이','미백 장재' 등 3명, 중원대륙<서토(西土)> 7현 중 '평음후
유약','승민백 복승','창려백 한유','문정공 이등' 등 4명, 총 12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03년에 지어졌다가 1987년 해체복원했으며, 맞은편
으로 닮은꼴 모습의 서무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동무 앞에는 390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솟
아 뜨락에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높이 30m, 둘레 5.5m에 이른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  서무(西廡)와 440년 묵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4호)

동무를 마치 동무처럼 바라보고 선 서무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무와 완
전히 닮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제자인 '운공 염경','제공 재여','서공 염구','오공 언언','영천후 전손사'
등 5명과 송조 6현인 '예국공 정호','신안백 소옹','휘국공 주희(朱熹)' 등 3명, 중원대륙(서
토)의 7현인 '선보후 복불제','강도상 동중서(董仲舒)','온국공 사마광'의 3명 등, 총 11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서무 앞에는 이곳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짝 구부정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나이는 약 440살(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00년)로 전주향교가
이곳에 안착한 때(1603년)와 거의 비슷해 중건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높이는 30
~32m, 나무둘레 10.4m의 우람한 덩치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김해동'이란 사람이 암컷나
무 옆에 수컷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  전주향교 대성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잘 다져진 석축 위에 들어앉아 남쪽을 향해 3줄기 계단을 짧게 늘어뜨린 대성전은 향교의 중
심 건물이다.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인데, 1603년에 지어진 것을 1653년에 새로 지었다. 그때 이기발(李起浡, 1602~1662
)이 중건기(重建記)를 남겼으며, 이후 1907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孟子) 등의 성인 4명, 공자의 10대 제자<십철(十哲
)>, 송조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향교의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전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 양쪽 끝에 붉은 기둥을 별도로 설치하여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  대성전 중심에 자리한 공자의 진영(眞影)
동이족(배달민족) 출신인 공자<孔子, 공구(孔丘)>는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의 1인자로 오랫동안 대접을 받아왔다.

▲  대성전에 들어있는 맹자 등의 사성(四聖)과 십철 등의 위패

▲  대성전 서쪽에 자리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여러 돌덩어리들
느티나무의 나이가 약 150~200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의 그늘에는 여러
견고한 돌덩어리들이 누워있는데, 이들은 1987년 이후 향교 건물을
손질하면서 나온 옛 석재들이다.

▲  명륜당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3호)

대성전 뒤쪽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에 명륜당이 있다. 그 명륜당 앞에도 오래 숙성
된 은행나무가 개골(皆骨) 상태로 마치 하늘을 원망하듯 가지를 높이 쳐들고 있다.
그는 약 420년 묵은 나무로 높이 32m, 둘레 6.6m이다. (1982년 9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380년) 서무 은행나무보다 허리 둘레는 작지만 키도 비슷하고 나이도 그리 차이
가 나지 않으며, 대성전 주변에 있는 늙은 은행나무(3그루)와 달리 명륜당을 혼자 도맡으며
그곳의 그늘을 책임진다.


▲  향교에 흔치 않은 건물, 계성사(啓聖祠)

향교는 20세기 이후에 신설된 시,군 단위 행정구역이 아닌 이상은 전국의 주요 고을에 대부분
남아있다. 기러기의 털처럼 너무나 흔한 향교이지만 '계성사'란 건물을 지닌 향교는 오직 제
주향교와 이곳 전주향교 2곳 뿐이다.

명륜당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계성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자의 부친인 '제국
공 공숙량흘', 안자(晏子)의 부친인 '곡부후 안무유', 증자(曾子)의 부친인 '내무후 증점',
자사 공급(子思 孔伋)의 부친인 '사수후 공리(공자의 아들)', 맹자(孟子)의 부친인 '주국공
맹격'을 봉안하고 있다. 1741년 판관(判官) 송달보가 세웠으며, 상량문(上樑文)은 정광(正匡)
이기보가 남겼다.


▲  장판각(藏版閣)

계성사 뒤쪽에는 창고 모양의 장판각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7년
에 전주시에서 향교 소장 목판 5,059판의 보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들 목판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1,775판을 위시해 주자대전(朱子大全) 1,471판, 성
리대전(性理大全) 571판, 율곡전서(栗谷全書) 491판, 사기평림(史記評林) 484판, 동의보감(東
醫寶鑑) 151판, 사략(史略) 56판,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1판, 주서백선(朱書百選) 1판, 증
수무원록 언해(諺解) 53판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향교 목판이 아닌 전라감영(全羅監營)에서 서적 간행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으
로 감영 내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9년 전라도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전주향교로
싹 보낸 것인데, 1920년 책고(冊庫)를 지어 관리하다가 장판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들의 보존
과 연구를 위해 대부분 전북대 박물관으로 보냈고, 일부는 향교 동쪽에 있는 완판본문화관에
가 있다. 하여 지금은 간단한 서적과 기물만 들어있다.
(장판각에 있었던 목판들은 '전주향교 소장 완영책판'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4
로 지정됨)

▲  향교 뒤쪽 부분

▲  향교 후문인 입덕문(入德門)

장판각과 계성사 서쪽에는 뒷간을 머금은 기와집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볼일
이 아주 급한 사람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시설만큼은 현대식으로 잘 닦여져 있어
원초적 볼일을 보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다.
해우소 담장 너머로도 여러 건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 '향교가 참 지독하게 넓구나!' 혀를 차
게 하는데, 이들은 관리인 숙소와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는 건물로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다. 허
나 밑에서도 거의 보이므로 굳이 통제를 뚫고 접근할 필요는 없으며, 계성사 앞에는 향교의
후문격인 입덕문이 한쪽 문짝을 열어두고 있다. (향교 사정에 따라 닫아두는 경우도 있음)


▲  날개짓을 하는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설마 저대로 허공으로 날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대성전 뒷통수에 자리한 명륜당은 이곳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이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로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의미이다. 특이하게도 양쪽으로 1칸씩 눈썹지붕을 이어 덧붙였는데, 이는 공간을 넓히고자
그런 것이다. 하여 큰 새가 마치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모양 같다.

이 건물은 16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 땅의 명륜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1904년 중수했다. '성균관스캔들','YMCA야구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며, 뜨락 좌우에는 동재
와 서재를 두었는데, 이는 유생들이 기숙사이다. 가까이 사는 유생들은 집에서 통학을 했겠지
만 먼 사람들은 여기서 숙식을 하였다. 기숙사 비용은 나라와 전라감영에서 모두 지원을 해주
어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

▲  옆에서 바라본 명륜당

▲  명륜당 동쪽에 자리한 동재(東齋)


▲  입덕문 서쪽 돌담길 (왼쪽 한옥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명륜당 주변을 둘러보고 입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입덕문 서쪽과 남쪽에는 돌담을 둘
러 호젓하게 돌담길을 내었는데, 이렇게 양쪽으로 돌담을 두룬 돌담길을 지닌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보통 한쪽만 돌담을 내기 때문이다.
돌담 북쪽은 전주향교 영역이며, 서쪽에 대나무가 우거진 한옥은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돌
담길의 길이가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짧긴 하지만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힐 만큼 강하게 인상
에 남는다.


▲  전주향교를 뒤로하며 (입덕문 남쪽 돌담길)
왼쪽이 전주향교, 오른쪽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서로의 성격과 연륜이
틀리다보니 돌담 또한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  승암산(僧巖山) 둘러보기 (한벽굴, 동고사)

▲  한벽당 앞 전주천 (좁은목)

전주향교로 잠시 접어두었던 전주천동로를 다시 꺼내 동쪽으로 걸었다. 한벽당의 주변 풍경을
크게 말아먹은 한벽교의 밑도리를 지나면 전주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한
벽굴이 있고, 그 위쪽에 한벽청연의 현장인 한벽당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한벽당이라 간만에 들릴까 했지만 그곳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밑에서
잠깐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벽당 동쪽에 있다는 승암산 산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한벽굴을 통해 북쪽으로 넘어가서 승암산으로 진입했다.


▲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칙칙한 한벽굴

한벽굴은 옛 전라선(全羅線, 익산~여수) 철도의 흔적이다. 지금은 전주시내 동쪽 외곽을 얌전
히 지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전북대와 전주시청, 오목대 등 전주 도심을 거쳐 지나갔다. 이
는 시내 교통 편의도 있지만 한벽당과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든 오목대(梧木臺)의 정기를
자르고 욕보이려는 왜정(倭政)의 나쁜 의도가 더 컸다. 그래서 한벽당과 오목대 뒤에 땅굴을
파고 열차를 지나가게 한 것이다.

왜정의 고약한 장난에 한벽당과 오목대가 뿔이 난 것일까? 열차가 한벽굴을 지날 때마다 이상
하게도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고 한다. 하여 그때를 틈타서 많은 무임 승차객들이 열차에서 뛰
어내렸다는 것이다.
이후 전라선은 시내 동쪽으로 옮겨졌고, 한벽굴은 철도가 아닌 뚜벅이를 위한 땅굴이 되어 한
옥마을을 수식하는 명소이자 오목대,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굴에 들
어가면 한여름에도 매우 시원하며, 옛날에 사라진 열차의 기적 소리가 두 귀에 아련하게 들리
는 듯하다.


▲  한벽굴 왕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인터넷에서 가져옴)

왼쪽은 전주천, 가운데는 한벽당, 오른쪽은 전라선 한벽굴이다. 한벽당은 왜정에 의해 전라선
열차로 고통을 받았고, 2000년 이후에는 한벽당 바로 앞에 신작로(기린대로)가 뚫리면서 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인간의 이기(철도, 도로)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한벽당의 비애..


▲  승암산

한벽굴을 지나 낙수정(樂水亭) 방면으로 가면 승암산 숲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동고사
를 찾기 위한 승암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전주시내 동남부에 듬직하게 자리한 승암산(306m)의 원래 이름은 기린봉이다. 산의 형세가 마
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이 달(또는 여의주)을 토해내는 듯한 모습<기린토월(麒麟吐月)
>이라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정상부에 중바위가 있어 승암산, 중바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후백제(後百濟, 892~936) 시절에 지어진 동고산성과 왕궁
터가 남아있어 이곳이 후백제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동고사와 승암사 등의 오래된
절과 치명자산(致命者山) 천주교 성지를 머금고 있다.

낙수정 서쪽(무애사 앞)에서 승암산의 품으로 들어서 10여 분 오르니 동고사로 이어지는 포장
길이 나타난다. 가파른 벼랑 위에 닦인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이어서
윗쪽 벼랑에 자리한 동고사가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치명
자산 성지(천주교 순교자 묘)이다.


▲  승암산에서 바라본 좁은목과 전주천 (전주천 건너편 산이 남고산)

▲  동고사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  동고사 밑 대나무숲과 주차장(오른쪽 공간)
겨울을 잊은 푸른 대나무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  동고사(東固寺)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호

승암산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 동고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
해발 210m)로 876년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창건하여 전주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고사'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덧붙여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
王)의 2째 왕자 범공(梵空)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 들어와 불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랬
다 하나 이 역시 신빙성은 장담할 수 없다.

창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당한 바퀴 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허주
화상(虛舟和尙)이 1844년 지금의 위치에 중창했다고 한다. 하여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후 1946년 주지 영담 김용욱(暎潭 金容郁)이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경내를 이루고 있는 건물과 석탑, 미륵불은 모두 그때 이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진작
에 말라버렸으며, 대웅전과 염불원(念佛院) 등 6~7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각박한 벼랑이라 돌로 단단히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닦았다. 그리고 윗쪽에도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석가여래의 사리를 머금은 석탑
과 미륵불 등을 층층이 지었고, 경내 밑에는 주차장과 돌탑을 다졌다. 절까지 차량이 마음놓
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은 괜찮은 편이나 길 서쪽이 벼랑 수준이라
바퀴를 잘 굴려야 된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샘터
여기서 물 1모금 들이키고 경내로 들어선다.

▲  서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위쪽 부분
범종각과 3층석탑, 미륵불 등

▲  석가여래의 사리가 깃든 3층석탑
(석가여래진신사리 보탑)


동고사는 오랜 내력에 비해 볼거리가 변변치 못하다. 다만 높은 벼랑에 자리하여 시내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조망만큼은 아주 끝내준다. 여기서는 전주천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를
비롯해 전주시내 상당수가 시야에 들어오며, 전주한옥마을과 전주 시내를 마음 편히 사진에
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물론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 중바위나 정상부에 이르면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동고사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0-88 (낙수정2길 103-100 ☎ 063-288-16
  26)


▲  동고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 (바로 밑에 보이는 산이
오목대와 이목대)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고사 경내
절은 비록 작고 고색의 내음 또한 모두 날라갔지만 전주 시내를 너른 뜨락으로
삼으며 그들을 굽어보니 뜨락과 조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미륵불입상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서학동과 완산구
지역 (중앙에 보이는 산이 완산공원)


▲  미륵불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와 전주한옥마을(가운데 부분)

동고사를 둘러보고 중바위와 동고산성 등 승암산의 주요 메뉴를 살펴보고자 산 윗쪽으로 길을
향했다. 허나 추운 날씨에 귀차니즘까지 진하게 발동하여 그들에 대한 구미가 99% 떨어지면서
조금 가다가 길을 돌렸다. 하여 낙수정마을로 내려갔는데, 낙수정은 전주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산골 마을 분위기가 진하여 그야말로 도심 속의 산골마을 그 자체였다.


▲  낙수정으로 내려가는 숲길

낙수정은 전주시내버스 430번(낙수정↔백구,용지)이 들어오는데, 배차간격이 무려 2시간이 넘
는다. 허나 운이 좋게도 낙수정 종점에 그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굳이 타지 않더라도 전주한옥마을과 오목대, 전동성당까지 조금 나가면 버스는 널려 있다.
승암산 일정이 너무 일찍 마무리가 되어 일몰까지 시간이 좀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문학대'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살펴보기로 했다. 그곳은 여기와 정반대인 서부신시가지 효
자동에 있는 명소로 그곳을 둘러보고 바로 삼례로 빠질 생각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지친 두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으니 운전사가 부릉부릉~♪ 시동을 걸며 지정
시간보다 약 5분이나 일찍 출발을 했다. 승객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런 것 같은데, 아무
리 그래도 일찍 출발은 좀 아닌 듯 싶다. (버스 시간표는 장식이 아님)
어쨌든 그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려(기린대로, 오목대, 전주천 경유) 남부시장에서 내렸
다. 그런 다음 전주시내버스 61번(비전대↔전주대)으로 환승하여 전동성당, 전주시교육청, 서
신동, 서곡지구를 거쳐 서부신시가지 현대아이파크에서 하차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문학대공원이 마중을 하는데, 서쪽은 문학대1공원, 동쪽은 문학대2공원이라 부른다. 바
로 문학대1공원 남쪽 언덕에 공원 이름의 유래가 된 문학대가 있다.



 

♠  고려 후기 대학자인 황강 이문정이 만년을 보냈던 곳
전주 문학대(文學臺) - 전북 지방기념물 24호

문학대는 1357년에 황강 이문정(黃岡 李文挺)이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그는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성리학(性理學)을 강의해 후학을 길러냈고, 상소(上疏)를 통해 불교의 폐단과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수시로 간해 이를 바로 잡게 하는 등, 멀리 고향에서도 조정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것을 1824년 후손들이 중건했으며, 원래는 효자동3가 산 334
-1번지에 있었으나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2006년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황강서원 뒤쪽인 황방
산 자락에 안착을 했다. 문학대 주변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전 시골이었으나 그곳까
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전주 시내는 서쪽으로 크게 팽창을 했다. 그래서 문학대는 한참
이나 후배인 신식 건물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문학대1공원 언덕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바닥을 돌로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고된 세월이 녹아든 기둥을
설치해 지붕을 받들게 했다. 문이 모조리 닫혀져 있어 내부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가운데에 방
을 두고 좌우에 마루를 깐 형태이다.
문학대 앞에는 그의 후손들의 무덤이 펼쳐져 있고, 그 밑에는 이문정을 봉안한 황강서원(黃岡
書院)과 후손이 살고 있는 한옥들이 포진해 조그만 한옥마을을 자아내고 있다. 황강서원은 이
미 문이 닫힌 상태라(내가 갔을 당시 서원 관리인이 막 대문을 닫아걸었음) 굳이 살피지는 않
고 담장 너머로 대충 살피고 넘어갔다.

▲  문학대 이건(移建) 사적비와 황강 이선생
(이문정) 문학대 유적비(오른쪽)

▲  서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마치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창고 같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  문학대의 뒷모습

문학대는 황강서원과 이문정의 후손(전주이씨)들이 사는 한옥 뒤쪽에 있어 신변에 그리 위험
은 없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못 이겨 이곳으로 오긴 왔지만 이곳 역시 서부신시가지에 둘러
싸인 도시 속의 외로운 섬이 되버린 상태이다.
다행히 문학대가 있는 황방산은 그 칼질에서 살아남아 그 숲을 보전할 수 있었고, 문학대 북
쪽과 동쪽은 문학대1공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특히 공원 동부에는 개발 도중에 나온 마
전(馬田)고분군까지 갖추고 있어 사적공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문학대에서 바라본 후손들의 묘역과 황강서원(기와집들)
그들 너머로 서부신시가지(효자동)가 바라보인다.


문학대 뒤쪽에 있는 숲길을 통해 마전고분군으로 내려갔다. 이 고분은 5세기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무덤들로 5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더 있었다고 하나 죄다 도굴되어 파괴되면
서 간신히 5기만 수습하여 봉분을 복원했다.
고분 주변에 마전마을이 있어서 마전고분군이라 불리며, 조금이나마 남은 햇님의 기운에 의지
해 무심히 짙어져만 가는 땅꺼미에 저항하며 사진에 담았으나 다들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여
본글에서는 부득이 마전고분군은 생략한다. 사진이 엉망이니 안그래도 엉망인 내용이 더 엉망
이 될 수 밖에 없다.
문학대를 끝으로 전주 연말 나들이는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문학대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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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6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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