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노량진 사육신묘, 사육신공원(사육신역사공원) 정문

1호선 노량진역 동쪽에 낮게 솟은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 정상부에 사육신묘가 자리하고 있 다. 죽은 6명의
신하를 뜻하는 사육신이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6명의 충신 박팽년, 성 삼문,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
개 등 6명을 일컫는 것으로 사육신의 존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삼척동자도 능히 알 정도이다. (사육
신의 반대 기념으로 생육신이 있음, 세조 를 거부하고 단종에 대한 충심을 지키며 향리에서 조용히 살아간 6명의 신하를 뜻함)

1456년 사육신 멤버와 성승(성삼문의 부친), 김문기, 김질 등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 를 처단하고 상왕
으로 밀려난 단종의 복위를 꾀했는데, 마침 적당한 기회<세조가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주연을 베풀 때
성승, 유응부 등이 별운검으로 세조를 호위하기로 되어 있었음, 그때 세조와 의경세자(세조의 아들)를 처단하
기로 계획함>가 찾아왔으나 아쉽게도 물 건너 갔다. 하여 복위 계획은 연기되었고, 이에 가시방석으로 안절부
절 못하던 김질
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이를 알리면서 세조에게 고변한다.

크게 발끈한 세조는 단종 복위를 꾀하던 관련자를 붙잡아 문초하였고. 그들 중 핵심 인물인 성삼문, 성승, 하
위지, 김문기, 이개 등을 군기감으로 끌고가 거열형으로 처단했다. 허나 속세에서는 사육신과 성승, 김문기 등
이 한강변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며, 박팽년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 것을 그 시신
을 가져와 거열했고, 유성원(류성 원)은 체포되기 전에 자살하여 그 시신을 거열했다. 그리고 단종 복위에 관
련된 70여 명도 대부분 처형시켰다.
거열형으로 목과 사지가 조각난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성승, 이개 등의 시신은 버려졌으나 사육신의 일원인
김시습이 밤에 몰래 수습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실 외에는 딱히 전하는 것은 없으며, 처음부터
이곳에 매장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단종 복위로 처단된 70여 명 중, 핵심 멤버였던 박팽년과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등은 사육신으
로 격하게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생육신의 일원인 남효온이 그들
을 기리면서 작성한 '추강집'의 '육신전'
때문이다.

또한 숙종은 그들의 충정을 기리며 사육신묘 자리에 민절서원을 세웠는데, 박팽년과 성삼문, 이개 등은 집현
전 학사 출신이며, 사림파의 초기 인물이다. 명종 이후 사림파 출신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했고, 그 후학들이
계속 조정에서 크게 자리를 차지하면서 박팽년, 성삼문 등 사육신 띄워주기 작업을 열나게 벌였다. 그러다보
니 단종 복위를 꾀한 70여 명 중에서도 그들의 존재감이 너무 커져 충신
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사육신 멤버들은 3대가 모두 처형되었고, 부인과 딸 등은 노비가 되었는데, 유일하게 박팽년만 며느리(박팽
년의 아들인 박순의 부인)의 기지로 자손을 남겨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그 후손들의 마을이 있다.

사육신묘는 민간에서 육신묘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1679년 숙종이 노량진에 열무 의식에 갔다
가 그 이야기
를 듣고 육신묘를 봉식하였다. 그리고 1681년 그들 묘역에 사당(육신묘)를 세웠 는데 1682년 민절서원으로
사액되어 나라 최초의 단종 복위 관계자들을 기리는 서원이 되었다. 이때 박팽년의 7대손인 좌익찬 박숭고가
육신묘를 수축했다고 하니 감회가 참 남달랐을 것이다.
1691년 숙종은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노량진 모래사장에서 열무 의식을 하고 관원을 보
치제하게 했으
며, 곧 이어서 사육신을 숭장했다.

1782년 정조의 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이 찬하고, 글씨는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했다.

민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 때 사라졌으며, 사육신 4인(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무덤
과 신도비 정도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55년 서울시가 민절서원터에 6각형의 육신묘비(사육신비)를 세웠으
며, 1977~1978년
서 울시가 사육신묘를 크게 성역화하였는데, 이때 묘역 3,240평을 9,370평으로 크게 불리
고 사당인 의절사과
불이문, 홍살문을 세웠으며, 사육신묘 주위를 사적공원으로 꾸몄다.

사육신묘에는 박팽년 등 4인의 무덤만 있고, 성승 묘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묘표가 있다. 하위지 묘는 경북 
미(선산)에 별도로 있으며, 유성원묘는 위치가 전하지 않는다. 1977~1978년 사육신묘를 성역화하면서 하위
지와 유성원의 가묘를 추가로 만들었고, 단종 복위 멤버이나 소외된 김문기의 가묘도 넣으려
고 했는데, 이는
남효온의 '육신전'에서 김문기와 유응부를 바꿔 기술해 김문기가 
사육신 멤버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교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문을 받았는데, 세조 때 가려진 6신은 박팽년과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라 판정하며 김문기의 가묘를 넣어야 된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유응부 관련 유씨 문중과 일부 학계에서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문기, 유성원의 가묘를
모두 넣기로 하여 가묘 3기를 추가했다. 하여 7명의 무덤이 자리하게 되어 사육신묘가 아닌 사칠신묘가 되었
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 사육신공원 안내도
사육신묘는 사육신공원(사육신사적공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1980년대까지 입장료를 받던 곳이었으나 무료
의 공
간으로 해방되었으며, 사육신묘와 사당 시설(홍살문, 불이문, 의절사)만 있던 것을 나중에 사육신역사관
을 세워 사육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시민공원으로 꾸미면서 한강과 여의도를 조망하는 조망명소와
생화정원도 닦여졌다.
사육신공원은 24시간 개방된 곳이나 사당과 사육신묘, 사육신역사관은 9~18시에만 문을 연다.

3. 역사공원길 안내도

역사공원길은 노량진역에서 사육신공원, 노들나루공원, 용양봉저정, 용봉정근린공원, 학도의용현충비, 효사
정를 거쳐 흑석역(9호선)까지 이어지는 2km에 달달한 도보길이다. 기존 공원과 길을 적당히 활용
하여 짠 코
스로 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 한강 구경은 정말 실컷 할 수 있다.

4. 사육신묘 홍살문
1978년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때 달아놓은 것이다. 정문에서 홍살문을 거쳐 사육신역사관까지 쭉 오르막길이
이어지나 경사는 거의 완만하다.

5. 사육신묘 의절사의 정문인 불이문

불이문이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마음, 즉 상왕(단종 임금)만 섬기며 다른 임금(세조)
은 받
들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의 줄임말이다.

6. 늦가을이 잔잔히 내려앉은 사육신공원 (불이문 입구, 사육신역사관 방향)

7. 짧은 숲길 끝에 자리한 의절사의 정문, 불이문

의절사와 사육신묘 7기는 저 불이문을 통해 들어가야 된다. 9시부터 18시까지만 문을 열며 그 외에 시간에는
들어갈 수 없다.

8. 화사하게 타오른 의절사 단풍나무

9. 사육신묘 의절사
흥선대원군 시절 사라진 민절서원 자리에 1978년에 세워진 사육신묘 사당이다. 사육신과 김문기 등 7인의 위
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사당 뒷쪽에 사육신묘가 있다. 

10. 신도비각
1782년에 민절서원 신도비로 세워진 것으로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민절서원의 유일한 흔적이다. 사육신묘
가 있는 언덕에는 민절서원 외에도 사충서원과 노강서원도 자리하고 있었다. 하여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서원
밀집 지대였는데 사충서원은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 있던 것으로 1721년 신임사화 때 희생된 김창집과 이건명
, 조
태채, 이이명 등 노론 4대신을 배향한 서원이다.
1725년 건립되어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
군의 서슬 시퍼런 서원 정리 사업 때도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다.
허나 1927년 왜정이 이곳을 경부선 철도용
지로 넣으면서 보광동 28번지로 강제 이전되었으며, 6.25 때 소실
된 것을 1968년 하남시 상산
곡동(그 시절에는 광주군 동부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강서원은 사육신묘 서쪽 기슭 가칠목마을에 있던 것으로 1695년 인현왕후 폐출 때 이를 끝까지 반대했던
응교 박태보를 배향한 서원이다. 1697년 
조윤벽 등의 청액소로 '노강'이라 사액되었으며 1754년에 중건되었
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에도 살아남았으나 6.25때 파괴되었으며, 1968년 박태보의 무덤이 있는 의정부
시 장암동 수락산 골짜기로 이전되었다. 하여 사육신묘에 있던 서원 3곳 중 민절서원은 절단났으나 의절사로
부분 회복되었고, 나머지 2곳은 비록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업에서 살아남았지만 왜정의 탄압과 6.25로
모두 제자리를 잃고 경기도로 넘어갔다.

11. 신도비각에 포근히 감싸인 신도비
비좌와 비신, 지붕돌을 지닌 단출한 모습으로 사육신 4인의 무덤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12. 의열사에 봉안된 사육신 7인의 위패 (사육산+김문기)

13. 의열사에서 사육신묘로 인도하는 뒷쪽 후문

저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사육신 7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육신 7묘는 오로지 이곳을 통해서만 들어설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