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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육신묘의 어느 묘표(묘비)

사육신묘의 사당인 의절사 뒷쪽 숲에 사육신의 무덤이 있다. 박팽년과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무덤을 비롯해
1978년 성역화 사업 때 추가로 넣은 하위지, 유성원, 이개의 가묘 등 모두 7기의 무덤이 있는데, 주인을 잃은
묘표 1기가 더 있어서 무덤이 1기 더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비석 피부가 크게 깎이고 글씨도 싹 지워지면서 묘표의 주인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박팽년, 성삼문, 이개와 같이 처단된 성승(성삼문의 부친)의 묘로 의심하기도 한다. 허나 비석이 말
을 해주지 않으니 정답은 딱히 없는 실정이다.

2. 솔내음이 그윽한 사육신묘 소나무숲길

3. 사육신묘 문인석

홀을 쥐어든 문인석 2기가 사육신묘 주변에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숙종 때 사육신과 김문기
의 신원이 복구되고 이곳에 그들을 배향하는 민절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육신묘 무덤 주변에 세운 것으로 보인
다. (또는 관악구나 구로구에 있는 조선시대 무덤에서 가져온 문인석일 수도 있음) 그러니까 사육신묘에 있는
무덤 4기(지금은 7기)의 합동 문인석이 된다.

4. 땅에 반쯤 잠긴 문인석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을 예민하게 탄 것일까? 이 문인석은 아랫도리가 땅에 잠겨버렸다. 이 문인석 역시
앞서 문인석과 같은 사유로 이곳에 자리잡은듯 싶다.

5. 사육신묘 남쪽 소나무숲길

왼쪽에 보이는 철책 너머 밑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오고가는 노량진로가 있다. 원래는 사육신묘가 있는 언덕과
노량진로 남쪽 언덕이 이어져 있었으나 신작로 개설로 서로가 끊어졌다. 

6. 김문기의 가묘

1978년 성역화 사업 때 새로 붙여놓은 김문기(1399~1456)의 가묘이다. 묘표는 기존에 있던 4기의 묘표와 같
은 것을 썼으며, 묘표와 상석, 봉분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김문기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김관의 아들이다. 초명은 효기, 자는 여공, 호는 백촌으로 1426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바로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를 했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에 임명되었으며, 1447년 이질로 군무 복무가
어렵게 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 겸지형조사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안변, 정평 등지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1453
년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
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차사원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함경도 온성에 읍성을 축조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56년 박팽년, 성삼문 등이 주도한 단종복위 계획에 참여했는데,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 끝에 군기감 앞에서 거열로 처형되었다.

숙종 때 사육신이 복관되었고, 1731년 김문기가 복관되었으며, 1757년에 충의란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1791년 단종을 위
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했는데. 김문기
는 삼중신(민신, 조극관, 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
고,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 6명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하게 결정한 국가
적인 의전이다.
이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정난 때 처단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렸다.
김문기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3책이 전하며, 경북 김천시 지례면 섬계서원에 향사되었다.

7. 나란히 자리한 사육신묘의 무덤 4기

8. 소나무숲 그늘에 자리한 주춧돌
사육신묘 동쪽 소나무숲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주춧돌이 여럿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은 민절서
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로 여겨진다.

9.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육신묘의 무덤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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