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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여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 백사폭포 백석동천 별서 정자터, 연못

 


여름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을 보이던 8월의 첫 무렵,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백사골)을 찾았다.
백석동천은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꾸준히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
곳에 가면 뭐랄까?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으로 최근 며칠 동안 비
가 무지하게 내려 무더위가 조금은 가셨는데, 문득 폭우를 먹고 포동포동 살이 올랐을 백
석동천 별서 연못이 생각이 났다. 이미 지겹게 본 풍경이나 이상하게 질리지는 않아 폭우
가 그친 다음 날, 간만에 그곳으로 출동했다.
백석동천으로 접근하는 길은 세검정초교와 화정박물관, 하림각 건너편, 창의문 등이 있는
데, 세검정초교 코스가 접근성이 가장 괜찮아 그 코스를 주로 이용했고, 이번에도 그곳으
로 접근했다.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에 걸린 신영교를 건너 세검정로6다길 골목길을 오
르면 빌라 옆으로 계단길이 나온다. (이정표는 충분히 설치되어 있어 어지간한 길치가 아
닌 이상 방황할 우려는 적음) 그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로 거기서 야트막한 길을 넘으
면 백석동천의 북쪽 관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곳은 마치 속세를 버리고 신선 세계로 들어선 듯, 아랫 세상과 공기와 풍경부터가 확연
히 틀리다. 그것도 무려 서울 도심 지척에서 말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실계곡(백석동천)으로 넘어가는 산길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옛날 이름이 동령폭포란 이야
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평소에는 폭포수 줄기가 가늘지만 여름 폭우로 단단히 재미를 보면서 그 패기가 대단했다. 귀
신도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도 우렁차 그 소리만 들어도 더위가 보기 좋게 가시는 것 같다.
비가 그친 바로 다음날이고 평일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어린이들의 조촐한 물놀이 장소
이자 나그네들이 돗자리를 펴고 쉬었다가는 꿀피서지로 인기가 대단하다.


▲  옆에서 바라본 백사폭포의 위엄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
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
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  윗쪽에서 바라본 백사폭포와 너른 반석

▲  여름 녹음이 진하게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오랜만에 백사실계곡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
한 내음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한
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바로 앞에 보이는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이처럼 백사실계곡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로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 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
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
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
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
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면 여
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
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
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지만 나라
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
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풍류의 장소로 만들어진 세검정
(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
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의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
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
서 비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
로운 칭호이다. <동천 대신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한 것 같지는 않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
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1930년
7월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
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
이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고자가 되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백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
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
밀의 공간으로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
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인정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펴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나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연못에서 사랑채터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돌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락 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늦가을 풍경)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이
남아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있는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건진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잡석과 잡초만 가득하나 여름 제국이 내린 비로 물이 조금 고여
그런데로 우물이나 연못 티를 낸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 보니 정말로 부러움
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늦가을 풍경)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흔적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흔한 연못이
아닌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 그리고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
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계속 연못은 물갈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어 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
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 ☞ 관련글 보기)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
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고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작게 남아있는데, 6.25전쟁으
로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
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한다고 난리를 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연못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옆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오랜만에 연못티를 풍기는 연못

여름 제국이 내린 물폭탄을 배터지게 섭취하면서 연못의 절반 정도가 물에 찼다. 즉 왕년의
절반 정도의 위엄을 잠시 동안 되찾은 것이다. 못에 물이 잔뜩 고이면서 잡초들도 덩달아 물
이 올라 자연산 늪지대 같은 덥수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꽤 수심이 있어 보이나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수심은 1m를 넘지 않으며, 돌다리
가 있는 수로로 배출도 되지 않아서 고인물 상태로 있다가 조금씩 수분이 줄어들면서 결국 맨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면 언제 물이 고였냐는 듯, 태연스럽게 잡초밭이 되어 버린다.


▲  별서터를 지켜온 물푸레나무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장대한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
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무 밑에는 거대
한 돌이 누워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
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
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  백석동천 마무리

▲  별서터에서 백사실계곡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의 황금 구간을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
중 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과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이 구
간을 제외한 계곡은 접근은 물론 발 담구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으며
,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침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
나면 소나무숲과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계
곡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직각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관리들이 경관이 수려한 곳에 바위글씨를 남기는 습성이 있
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바위글씨가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
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연두연두하게 익은 백사실계곡 숲길 (응선사 방향)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연두연두하게 익은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실 상류, 능금마을 방향)

▲  너른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실계곡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별서터에서 잠시 떨어졌던 백
사실계곡이 다시 나타난다.
이곳은 진정한 계곡 상류로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옷을 걸친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
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묘향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
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계곡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
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펴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 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너른 반석을 타고 장쾌하게 흘러가는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도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 많고, 차량 많고, 빌딩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실계곡은 능금마을 안쪽까지 이
어진다.


▲  능금마을 방향 백사실계곡 상류와 마을 경작지(오른쪽)

▲  좁게 흐르는 백사실계곡 상류 (능금마을 경작지 주변)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
에는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면 집들
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가 맞거
늘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
마을(뒷골마을)이다.

이후는 분량상 생략하며, 한여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이렇게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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