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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쌍봉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화순 쌍봉사 '

▲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 삼청각에서 읊다'

시내 사이로 멋들어지게 지은 다리 누각이여
삼청이라는 글씨만 봐도 눈이 상쾌하구나
못에 비친 달은 고기들의 맑은 거울이요
구름 걷힌 산봉우리 학은 둥지를 사랑하네
금빛들에 머문 안개는 항상 서기를 드러내고
옷빛계곡에서 부는 솔바람은 언제나 차가워라
난간에 기대어 처마 밑에 흐르는 물을 다시 보니
낙화도 뜻이 있는지 잔물결 따라 쫓아가네

* 고려 명종 때 문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 삼청각에서
지은 시 (현재 삼청각은 없음)
 


늦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끝 무렵에 광주 동남쪽에 넓게 자리한 전남 화순(和順)을 찾
았다.
오전에 일행들과 만연산(萬淵山, ☞ 관련글 보기)을 둘러보고 화순 읍내로 내려가 점심
으로 한정식을 섭취했는데, 화순에서 유명한 밥집이라 사람들로 내내 미어터져 겨우 자
리를 잡아 먹었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운주사(雲住寺)와 더불어 화순 지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꼽히
는 쌍봉사를 찾았는데, 쌍봉사는 화순군 남쪽 끝인 이양면 산골에 있는 절로 화순 읍내
에서 30km 이상 떨어져 있다.


♠  쌍봉사(雙峯寺) 입문

▲  흙탕물이 되버린 연못

쌍봉사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동그란 연못이 마중을 한다. 주차장 옆에 자리한 이 못은 소나
무가 깃든 동그란 섬을 복판에 띄워놓아 운치를 우려내고 있는데. 고려 때 김극기가 지은 시
를 통해 그 시절 삼청각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삼청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
으로 형편없이 떠내려갔지만 연못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천왕문 직전에 넓게 누워있었다.
허나 관리 소홀과 주차장 조성으로 연못을 밀어버리는 우를 범했으며, 근래에 작게나마 연못
을 다시 닦았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 공사로 연못이 뿌연 흙탕물이 되어버린
채, 나를 맞이한다. 마치 흙탕물 같은 속세와 그보다 더한 종교계를 상징하듯이...


▲  연못 바위에 걸터앉은 돌거북

평범해보이는 연못에 눈길을 진하게 끄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거북 모양의 돌이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돌에 걸터앉은 작은 돌거북으로 거북의 등껍질과 얼굴, 발이 묘사되어 있는
데, 전체적으로 보면 거북선처럼 보이고, 등껍질 주위로 시선을 좁히면 기어가는 거북처럼 보
여 2가지의 시각 효과를 보인다. 그는 연못을 새로 지으면서 장식용이나 비보풍수(悲報風水)
의 일환으로 설치된 듯 싶다.

          ◀  쌍봉사 천왕문(天王門)
연못을 지나면 절의 2번째 문인 천왕문이 계단
을 늘어트리며 마중을 나온다. (1번째 문인 일
주문은 연못 남쪽에 있음)
이곳은 석가여래의 경호부대인 사천왕(四天王)
의 집으로 좌우로 길게 돌담을 둘러 속세의 기
운을 경계한다.


▲  쌍봉사 대웅전(大雄殿)과 그 주변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3층 모습의 늘씬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너른 경내가 펼쳐진다.
대웅전 좌우와 뒤쪽으로 지장전, 극락전, 호성전, 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이 포진해 있으며,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가 거의 풀밭이라 다소 허전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쌍봉사
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쌍봉사는 9세기에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825년
선비족 나라인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47년에 돌아왔는데, 화순 지역을 지나다가 이곳의 수려
한 풍경에 퐁당 반해 절을 세웠다고 한다.
허나 곡성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기)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
山門)을 열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이 839년 당나라에서 돌아와 쌍봉사에서 첫 하
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태안사 적인선사비에 쓰여 있어 적어도 8세기나 9세기 초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쌍봉사는 839년을 창건시기로 삼고 있음)
하여 실질적인 창건자는 철감선사가 아니며, 그는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구산선문의
일원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고 절의 이름을 크게 날렸다.

철감선사는 절의 앞쪽과 뒷쪽 산봉우리가 2개여서 도호(道號)를 쌍봉이라 했는데, 그의 명성
을 들은 신라 경문왕(景文王)은 그를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그의 도호를 따서 절 이
름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의 열성제자였던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스승의 법맥을 이어받아 영월 법흥사(法興寺)에서
사자산문을 본격적으로 개창했다. 그는 891년 쌍봉사에 들려 스승인 철감선사탑비에 예를 올
렸다고 전한다.

1081년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고 하며,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전라도관찰사인 김방(金倣)이 돈을 내어 절을 중창했다. 조선 세조(世祖)는 쌍봉사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8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67년과 1724년에 중창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배향한 인근 죽수서원(竹樹書院)의 말사
로 들어가면서 매년 66가지의 봉물을 상납하느라 허리가 거의 아작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984
년에 대웅전이 전소되어 쓰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 호성전, 극락전, 지장전, 종무소, 요사, 범종각 등 10여 동의 건
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철감선사탑과 보물인 철감선사탑비와 목조지
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문화재인 극락전과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웅전 목
조삼존불상 등이 있다.
그 외에 조선 후기에 세워진 쌍봉사 사적비(事蹟碑)와 승탑(僧塔, 부도) 5기, 관찰사 윤웅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절 자체는 '화순 쌍봉사'란 이름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247호
로 지정되어 있다.

쌍봉사는 이 땅의 승탑(僧塔, 부도) 중 우수급에 속하는 철감선사탑과 우수급 비석인 철감선
사탑비, 그리고 비록 화재로 다시 지었지만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으로 유명하다. 아마 그들
이 없었다면 이곳은 그저 그런 옛 절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첩첩한 산주름 속에 푹
묻혀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 앞까지 2차선 신작로가 닦여져 차량 접근성은 좋다.
단 대중교통이 영 좋지 못한 것은 함정이다.

* 쌍봉사 소재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741 (쌍산의로 459, ☎ 061-372-3765)


▲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된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모습)

쌍봉사 대웅전은 3층 목탑(木塔) 스타일의 건물이다. 높이 12m의 홀쭉한 정방형 집으로 2층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으며, 1962년 해체수리를 했을 때, 3층 중도리에서 고맙게도 상량문(上
樑文)이 튀어나왔다. 그 문서를 통해 1690년에 중창했고, 1724년에 3번째 중창이 있었음이 밝
혀졌으나 정작 중요한 첫 조성시기와 1번째 중창 시기는 나와있지 않았다.

건물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기로 여겨지며, 원래는 대웅전이 아닌 목탑이었다고 전한다. 경내
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렇다할 탑이 없는데, 이 건물이 탑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던 것이다.
법주사(法住寺)의 5층 팔상전(八相殿)과 더불어 이 땅에 몇 없는 목탑 스타일의 건물이자 거
의 유일한 3층 목탑으로 그 가치가 대단하여 일찌감치 국가 보물 163호의 지위를 누렸다.

6.25 시절에는 절의 상당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은 총탄이 비켜가 구사일행으로 살아
남았다. 그 큰 난리에도 살아남았건만 1984년 4월 어느 어리석은 신도가 촛불을 잘못 다룬 통
에 화마(火魔)의 부질없는 먹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허무하게 사라진 대웅전을 다시 소환하고자 1985년 8월 복원공사를 벌여 1986년 12월 완
성을 보았으나 국가 보물의 지위는 끝내 박탈되고 말았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본래 지붕이 사각이란 것이 확인되어 기존의 팔작지붕 대신 사각의 사모
지붕으로 바꾸었으며, 상륜(相輪) 부분을 보완했다.


▲  대웅전 목조삼존불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대웅전의 겉모습이 비록 3층이긴 하나 무늬만 3층이지 완전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에는 목조3
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
자(阿難尊者)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며 서 있다. 이들은 1984년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지
면서 자칫 화마의 먹이가 될 뻔했으나, 절 부근에 있던 마을 농부가 불길을 보고 달려와 저들
을 등에 업고 탈출시키면서 화를 면했다.
이후 대웅전이 복원되자 석가여래상과 존자상을 새로 개금(改金)하고 채색하여 제자리로 옮겼
다.

석가여래의 얼굴은 거의 4각형 모습으로 꽤나 복스러워 보이는데 머리는 꼽슬인 나발이며, 눈
은 지그시 감고 있고, 붉은 입술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있다. 중생들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
려는듯, 귀는 크고 두꺼우며 어깨를 감싼 옷은 두툼해 보인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펴서 무릎
안쪽에 올려놓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오른쪽 발바닥 위에 놓았다.
그의 왼쪽에는 다소 늙어보이는 가섭존자가 있는데 표정이 매우 밝고 손이 매우 두껍다. 그에
반해 아난존자는 명상에 잠긴 조금은 늙은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이들 3존불은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시기와 참여자 이름이 드러
나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 다른 조각상의 표준이 된다. 대웅전 화재 때 중생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만큼, 절과 불교의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중생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그들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  호성전(護聖殿)

호성전은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T자형 맞배지붕 집으로 절 건축물 중에 T자형은 오직 이
곳 하나 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제외) 앞서 대웅전처럼 매우 희귀한 형
태의 집이라 국가 지정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어
진 것이라 그 자격은 떨어진다.

이 건물은 쌍봉사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전해진다. 허나 지금은
철감선사와 그의 사형(師兄)인 조주종심(趙州從諗, 조주대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철감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천보원(南泉普願. 남천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
선사를 만났다. 조주는 철감보다 20살 연상으로 남천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道)이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철감과 조주는 친한 선후배 관계로 10년 정도 남천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철감이 조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들의 진영을 마련해 호성전에 봉안했다. 조주의 진영은 하북성(河
北省) 백림선사에 있는 송나라 때 판각된 그의 초상화 영인본(影印本)을 참고해 제작했을 정
도로 크게 공을 들였다.


▲  늙은 티가 너무 풍기는 조주대사의 진영와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철감선사의 진영

▲  나한전(羅漢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거처이다. 6.25때 파괴된 것을 다시 세웠다.

▲  극락전(極樂殿)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66호

두툼한 맞배지붕을 지닌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조선 중
기 건물로 6.25때 대웅전과 함께 운좋게 살아남았으며, 대웅전이 1984년 화재로 무너지자 경
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란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극락전 앞에는 수백 년 정도 묵은 단풍나무 2그루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운치
를 우려내고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화재 때 천하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했던 화마의 공격으
로부터 극락전을 지킨 존재들이다. 온 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나무들은 가지를 적지 않게 잃었
으나 덕분에 극락전은 무사했다. 만약 극락전까지 허무하게 날라갔다면 경내에 오래된 건축물
은 전멸하게 된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52호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좌상은 1694년에 조성된 것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었으나 1989년 8월, 어느 나쁜 손에
도난을 당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여 새로 협시보살상을 장만해 아미타불의 허
전한 옆구리를 채웠다.
아미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얼굴은 거의 네모진 큰 모습이며, 덩치도 제법
있어 보인다. 머리는 나발(꼽슬)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거의 무표정 같
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어깨를 감싼 옷의 주름은 매우 뚜렷하다. 오른손은 올리고 왼
손은 내린 모습인데,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걸치며 앉아있다.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조각 형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이 만든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웅전의 그것보다 허리가 곧고 늘씬한 모습이라 대웅전 삼존불 다음으로 조
성된 듯 싶다.


♠  쌍봉사 마무리

▲  지장전(地藏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의
거처이다. 조선 후기에 지어졌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세웠다.

▲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탱

지장전에 봉안된 지장보살3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은 1667년경에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
파 조각승들이 조성했다.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이 나왔고, 쌍봉사 사적기(事蹟記)와 '능
주지 사자산 쌍봉사제전 기문집록(綾州地 獅子山 雙峰寺諸殿記 文輯錄)' 등에 조성 관련 내용
이 나와있다.
이 지장보살상의 조성시기가 밝혀지면서 해남 대흥사(大興寺) 지장시왕상, 강진 백련사(白蓮
寺) 지장시왕상, 미황사(美黃寺) 지장시왕상, 순천 동화사(桐華寺) 지장시왕상 등 운혜 계열
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 추정에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명계조각(冥界
彫刻)이라는 종교적 엄숙성과 17세기 불교 조각계가 추구한 대중적 평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여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국가 보물 1,726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거의 네모난 지장보살상은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으며, 아미타수인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서 있는데, 도명존자는 합장
인을 선보이고 있고,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감추어져 있다. 그들 뒤로는 근래
조성된 지장탱이 있는데, 지장보살의 푸른 대머리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과 불꽃을 휘날리고 있는 금강역사상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①

쌍봉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철감선사탑과 탑비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경내에서 서
북쪽으로 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그 길의 끝에 쌍봉사 제일의 보물인 그들이 있다.


▲  경내에서 철감선사탑으로 인도하는 숲길 ②
늦가을이 철감선사탑과 탑비에 퐁당퐁당 반했는지 한참을 머물고 있다.

▲  철감선사탑 - 국보 57호

철감선사는 쌍봉사에 머물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다가 868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입적 소식을 들은 경문왕은 크게 아쉬워하며 '철감'이란 시호를 내려 탑과 탑비를 세우게 했
는데, 그가 입적한 그해에 탑과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철감의 제자들은 우수한 석공을 초빙하여 스승의 승탑을 조성했다. 비록 2.3m의 낮은 높이지
만 온갖 정성을 들여 탑의 밑도리부터 윗도리까지 조각을 했으며, 탑은 전체적으로 8각의 형
태로 8각 바닥돌 위에 기단부를 두었다. 기단부는 밑돌, 가운데돌, 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밑돌과 윗돌 장식이 꽤 화려하며,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8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
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제각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윗돌은 2단으로 두어 밑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악기를 다루는 모습을 새겼다.

철감의 사리가 깃들여진 탑신(塔身)에는 8개의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
다 문짝 모양, 사천왕상, 비천상(飛天像) 등을 조각했다. 지붕돌에는 아주 현란한 조각 솜씨
가 깃들여져 있는데,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
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나 너무 완벽하면 재미가 없는지
라 머리장식은 장대한 세월에게 싹 날라가 없어진 상태이다.

신라 후기 대표적인 승탑이자 9세기에 조성된 승탑 중 제일로 꼽히는 명작으로 1,100년의 적
지 않은 나이에도 조각이 살아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자연과 세월도 보는 눈이 있는지 그
를 비켜간 모양이다.

▲  내 시선을 계속 잡아두고 있는 철감선사탑의 위엄

▲  철감선사탑비 - 보물 170호

탑 옆에 자리한 탑비는 철감선사의 행장을 머금은 비석이다. 용 머리의 귀부(龜趺)와 비신(碑
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나 탑비에 군침을 흘린 세월이 비신을 잡아가버려 현재는 귀
부와 이수만 남은 상태다. 하여 비석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용머리의 귀부를 두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머금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어 앞으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 같다. 이수는 용조각을 생략하고 구름
무늬만 가득하다.
탑과 더불어 8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각 수법이 휼륭해 신라 말 대표적인 탑비로
꼽힌다. 이 역시 철감을 향한 제자들의 지극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철감선사탑비
거북이 등짐을 지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다.

▲  철감선사탑비의 옆모습

▲  철감선사탑비의 뒷모습

철감선사탑, 철감선사탑비를 끝으로 쌍봉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꽂힌 시선이
좀처럼 떼어지지를 않아서 나올 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모른다.

쌍봉사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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